독 안에 든 쥐
독 안에 든 쥐
"독 안에 든쥐,"가 독 속에 빠지면 도저히 나올 수가 없기에 결국 잡히고 만다.
궁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이르는 속담이다 불교의 선가(禪家)에도
이와 유사한 가르침이 있다 '쇠뿔 속에 들어간 쥐'의 비유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서는 간화선 수행에서 화두를 드는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화두가 일어난 곳에서 알아맞추려고 해도 안 되고,
생각으로 그 의미를 추측해도 안되며, 미혹한 채로 깨달음을 기다려서도 안된다.
생각할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 생각하다가 마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마치
늙은 쥐가 쇠뿔 속에 들어간 듯이 하면 문득 '전도된 생각의 끊어짐'을 볼것이다.
" 화두의 의미를 '알아맞춘다'든지 '추측한다'는 것은 속된 말로 '머리를 굴린다'는
뜻인데, 머리를 굴리게 되면 반드시 흑백논리의 이분법에 빠지고 만다.
따라서 화두를 들 때는 쇠뿔 속에 들어간 쥐가 옴짝달싹 못하듯이,
간화선 수행자의 생각에서 흑백논리가 작동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흑백논리를 불전에서는 이변(二邊)이라고 부른다.
이변이란 양극단의 사고방식이라는 의미로 어떤 사태에 대해서
이어졌다거나 끊어졌다고 보는 상견(常見)과 단견(斷見), 같다거나
다르다고 보는 일견(一見)과 이견(異見)등이다.
비근한 예를 들어서 어떤 촛불을 다른 초에 옮겨 붙일 때,
앞의 촛불이 뒤의 촛불로 그대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뒤의 촛불은 새로운 초를 녹여서 타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앞과 뒤의 촛불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도 아니다.
앞의 촛불이 없었다면 뒤의 촛불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앞의 촛불과 뒤의 촛불의 관계는 불상부단(不常不斷)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앞과 뒤의 촛불이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것도 아니기에 불일불이(不一不二) 불상부단,
불일불이등의 통찰을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초전법륜 시 부처님의 중도 법문에서 시작하여 현대 한국의 간화선
수행에 이르기까지 수미일관하게 계승되는 불교적 통찰이다.
불교적이랄 것도 없다 모든 존재의 참모습, 제법의 실상이다.
물론 상견과 단견, 일견과 이견 등의
흑백논리적 사유가 전혀 쓸모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생명체의 진화과정에서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된 사유의 속성이다.
어제 우리 마을에 내려와서 사람을 물어간 호랑이가 오늘 다시 내려왔을 때,
그 두 놈이 같은 놈이라는 상견(常見)과 일견(一見)이 있어야
도망치거나 숨어서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
흑백논리적으로 작동하는 언어와 생각은 생존의 도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언어와 생각으로 삶과 죽음, 인생과 세계 등 철학적
종교적 문제에 대해 고민을 시작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불교에서는 이들 고민에 대해 다시 언어와 생각으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언어와 생각의 허구성을 자각하여 고민에서 벗어나게 한다.
초기불전에서는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이고, 일체개고인 현상을
통찰하게 함으로써 분별적 사유의 허구성을 자각하게 하고,
간화선에선 화두를 듦으로서 흑백논리적 사유를 타파한다.
간화선 수행자의 생각이 쇠뿔 속에 들어간 쥐처럼 옴짝달싹 못 할 때
우리의 생각은 중도의 궁지와 만난다.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생각의 끝장이다.
속담 속에 담은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