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원인을 멀리하라
고통의 원인을 멀리하라
고苦는 물결, 자연 등 외적인 요소에서 오는 것이든 혹은 마음이나 견해 등
내적인 요소에서 오는 것이든 결국 그 근본적인 뿌리는 모두가 자기의 몸과
마음에 사물을 주재하는 상주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 아집我執과
자기의 편협된 견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노자老子가 "내가 내 몸을 위하는 생각이 가장 큰 걱정거리이다" 했다는데,
불교의 가르침에 근거하면 모든 고통의 근원은 오온화합五蘊和合으로 생기는
가짜 나에 있습니다. 이른바 오온화합은 우리의 생명은 물질적인 색色과
정신의 식識에다가 심식心識의 움직임으로 생겨나는 작용-수受,
상想, 행行 세 가지를 더하여 쌓이고 모여지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단지 그때그때의 조건으로 모여 합쳐진 일시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연이 갖춰지지 못한다면 모두가 환멸로 돌아갑니다.
일반 사람들의 관념에는 오온화합에 의한 색신色身은 영원불멸한 것으로
여겨 그것을 참된 자기로 고집하여 갖가지 탐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나의 허망성을 통찰하여 본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집착할 곳이 없이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치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모든 고통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말하길 "오온이 모두 헛됨 것임을 안다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照見五蘊皆空 度一體苦厄)"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오온이 헛된 것임을 알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나에게 집착하지 않으면 곧 오온은 흩어버릴 수 있고
오온을 흩어버리면 고통은 자연히 없어져 버립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가벼운 예를 하나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미국에서 미식축구가 크게 성행하는데 매번 시합마다
10만 명 이상의 관중이 빽빽이 들어찹니다.
어떤 사람이 경기를 관전하는데 정신이 팔려 손에 담배를 들었다는
사실도 잊고 결국에 옆에 앉은 한 신사의 옷을 태웠습니다.
그 사람이 너무 놀라서 정말 죄송하다고 얼른 사과했습니다.
옷이 타버릴 사람도 온 정신이 격렬한 시합에 모여져서 "상관없어요,
돌아가서 다시 사지요, 뭐" 했습니다. 이는 무슨 마음인가요?
무아無我의 경지로 이때의 아訝는 이미 선수들이 던지는 공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어서 이때, 이 순간은 공을 보는 것이 옷을 염려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라서 누가 옷을 태웠어도 시비를 다투지 않습니다.
옷이 타서 새로 살 지경이어도 개의치 않고, 따지지 않습니다.
만약에 시합에 온 정신이 빠지지 않았다면 옷이 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단지 담뱃재가 떨어졌어도 기필코 상대와 시비를 따질 것이며
심지어는 경찰서까지 가서 시비를 가릴 것입니다.
그러나 경기를 볼 때는 온 정신 모두가 경기에 집중되어 시합의 승부가
중요하지 '내(我)'가 무슨 일을 당했어도 이미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경기가 우리의 주의력을 끌어들여, 나늘 잊게 하여 불에 덴 고통을
모르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오온이 모두 헛된 것임을 살펴 알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모든 고통을 없앨 수 있습니다.
고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이 사실을
더욱 강조하며, 한 발짝 더 나아가 해결의 방법을 찾아내려 합니다.
현재 학술, 경제, 의약, 정치 등 모든 방면에서 보다 나은 것을 찾아
끊임없이 고쳐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함이며,
인류의 고통을 가장 낮은 수준으로 줄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흔히 보는 빈민구제나, 옷과 음식물을 도와주는 것은
단지 일지적으로 곤란을 해결하고 돕는 방편이지 고통의 뿌리를
철저하게 뽑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눈앞의 재액을 없애려 할 뿐만 아니고,
더욱 중요한 생사의 본원을 해탈하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이르길 "(존재하는 모든 중생을) 내가 다 완전히
열반에 들게 해 제도하리라(我皆令入 無餘涅槃 而滅度之)" 했는데
이는 바로 인생의 문제를 철저히 해결한 것으로 금생의 번뇌를 끊어 버리려는
것뿐 아니고 끝없는 생사윤회를 벗어나서 번뇌를 끊고 분별을 떠나 육신까지
없애서 적정에 들어간 경지, 곧 무여열반의 경지를 깨달으려는 것입니다.
모든 고통의 근원을 철저히 뿌리까지 뽑아 버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말하는 '고'는 단지 고를 아는데 머무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고를 없애어 고통의 속박을 초월하려는 적극적인 의미의 '고'입니다.
그러면 고통을 멀리하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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