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
팔정도
정도正道라 하는 것은 치우치고 삿됨을 떠난 중도中道로
성자聖者의 도道에 속하며 성도聖道라 이름하기도 합니다.
중도는 아주 중요하고 두드러진 덕행 품목으로 부처님이 명시하신 것이며,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팔정도를 설하시고 열반에 들기 전에는 더 늘리고
넓혀서 삼십칠각지三十七覺支를 설하셨습니다. 팔정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른 앏과 바른 견해 정견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불법을 바로 이해하고
신神 중심, 자기중심, 물질 중심 등이 잘못된 견해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정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떠한 불합리한 일이나 곤란에
부딪혔다 하더라도 진리의 가르침에 대하여 변함이 없는 것을 정견이라 합니다.
세간의 지식에는 선악이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믿을 수 없고
우리를 속일 수도 있습니다. 치痴라는 글자의 생김새를 보면 知자
위에 병病자를 더한 것입니다. 병든 지식이 바로 어리석음, 치痴입니다.
아주 똑똑한 사람이 나쁜 일을 벌이면 더욱 지독합니다.
예를 들면 히틀러, 진시황제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 해서 인격을 갖추었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은 칼날과도 같아 쓰임새가 바르지 못하면 마치 호랑이에게
날개를 붙여준 것과 같아서 사람을 더욱 많이 다치게 합니다.
지식을 어떻게 지혜와 정견이 되도록 하느냐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지식을 바른 앎과 바른 견해가 되도록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원리는 광선, 거리, 속도 모두가 알맞게 조절되어야 선명하고
아름다운 화면이 찍히는 사진의 원리와도 같습니다.
정견이 있을 때 인생우주의 참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정견이 부족해서 세간을 보면 안개 속에서 꽃을 보고,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는 것과 같아 엄중한 차이를 불러옵니다.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방법은 모든 사람의 근기가 다름에 따라서
갖가지 법문을 펼쳐 냅니다. 중생은 자기의 지혜를 맞춰서
자기 자신의 근기에 상당되는 불법의 이해를 기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예를 들면 범부인 중생은 정견을 기르도록 하여야 하며
이승근인二乘根人은 인연의 도리를 알도록 하여야 합니다. 대승보살은
공혜空慧를 깨닫도록 하고 부처님은 반야를 증득하신 각자覺者입니다.
정견에서 인연, 공空, 반야로 이어지는 수행 과정은 마치 초등학교에서 중고등
학교를 거쳐 대학교로 진학해 순서를 따라 학업을 계속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초등학교의 불법을 배우자면 먼저 바른 앎과 바른 견해를 길러야 합니다.
그런 후에 한 계단 나아가 중고등학교로 십이인연의 도리를 관찰하며, 중고등
학교를 졸업하고는 더욱 한층 올라가 공혜空慧를 관觀하고 비추도록 합니다.
대학의 학업을 이루고 나서는 마지막으로 더욱더 한 걸음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닦아 익힙니다.
이것은 순서가 매우 엄격한 학사제도로 어느 정도까지 이를 수
있는가는 각자 스스로 얼마나 자기 정진이 높은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다른 면에서 볼 때 설사 부처의 반야까지 닦고 익히게 되었다
할지라도 정견의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정견은 도에 드는 중요한 관문입니다.
바른 앎과 바른견해를 키우는 것은 우리들이
불법을 배우는 데 첫 번째 중요한 항목입니다.
보통중생 보통 부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