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새로운 시작
죽음은 새로운 시작
"나는 이곳에 와 지내면서 새삼스레 죽음에 대해서 가끔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은 삶과 무연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연소요, 소모이므로 순간순간 죽어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죽음이란 삶 끝이 아니라 다음 생 시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나는,
평소부터 죽음에 따르는 의례 치르는 번거로운 의식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면 여럿이 사는 절에서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많은 이웃들에게 내 벗어버린 껍데기로고인해 폐를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버리고 떠나기〉 '달 같은 해 해 같은 달'에서
법정 스님은 늘 위와 같은 말씀을 자주 꺼내신다.
예지 능력을 가진 코끼리가 죽음이 임박해 오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밀림으로 들어가 조용히 삶을 마감하는 것처럼 그렇게 가고 싶다고,
아울러 스님들 장례에서 사리 따위 줍는 일을 하지 말라고 경계하시면서
그 부질없음을 늘 지적하신다. 스님은 죽음은 삶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승용차를 바꿔 타거나 옷이 낡으면 새 옷으로 갈아입는 일이니
굳이 번거로움을 떨 필요가 없다고 하신다.
하지만 우리 같은 범부들은 죽음이 그렇게 단순하게 느껴지지만 않는다.
우리에게 죽음은 그저 관념 속에 자리한 일처럼 실감이 썩 가지 않는다.
어떻게 죽음을 맞아야 할까?
앞서 간 이들 입을 통해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할 수밖에 없다.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100년을 살다가 스스로 곡기를 끊어 죽음을 맞은 수콧 니어링 아내
헬렌 니어링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죽음을 이렇게 말한다.
"늙음은 땅과 죽음 사이에서 순환하는 삶 내리막길을 가는 것, 나는 몸에서
떨어져서 정박 밧줄을 느슨하게 하고. 미지 세계로 건너가 더 이상
분리 되지 않는 필연 존재인 '전체'와 하나가 되고 싶다.
스코즈 죽음은 내게 훌륭한 길, 훌륭한 죽음을 보여주었다.
고통과 억압이 없는 죽음, 여전히 생명 흐름이 이어지는 것을.
나는 이제 분명히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으며, 더 이상 예전에
쉽게 그랬듯이 힘 있게 오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걱정 없는 행복한 여행길이었으며, 이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모퉁이 돌면 끝이다. 죽음 없는 삶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한 삶, 죽음과 소멸은 모두를 하나로 만든다. 관계를 뒤얽는다. 저마다
아들의, 아들의 아들들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모두 영속하는 것이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과 섞이는 것이다.!"
미지 세계로 건너가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필연 존재인 '전체'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헬렌 니어링은 죽음을 이제껏 존재했던
조상들과 섞여 하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은 친구 차례지만 이다음은 바로 우리들 자신 차례임을 알아야 한다.
친지 죽음은 곧 우리 자신 한 부분 죽음을 뜻한다.
삶은 불확실한 인생 과정이지만 죽음만은 틀림없는 인생 매듭이기 때문에
더 엄숙할 수밖에 없다. 삶에는 한두 차례 시행착오도 용납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그러만한 시간 여유가 없다. 그
러니 잘 죽는 일은 바로 잘 사는 일에 직결되어 있다."
법정 스님 말씀이다
죽음 그 뒤가 어떨지 알 수 없지만, 목숨을 가지 모든 복숨붙이는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둘레 가까운 이들
죽음을 맞기 전에는 죽음은 그저 신문에 보도되는 사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러다 가까운 사람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 죽음을 맞고 나서야 우리는 참으로
죽음과 맞서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뼛속 깊이 실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죽음이란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아프리카 수와힐리족은 두 가지 시간 개념을 갖고 잇다.
하나는 사사SASA 시간이고, 또 하나는 자마니,ZAMANI시간이다.
그들은 누군가가 죽었을 때, 비록 그 몸은 죽었을지라도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한, 그는 사사 시간에 살아 있다고 여긴다.
기억되는 한 살아 있다는 말이다.
반면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마저 다 죽게 되면 그 사람은 그때
비로소 이 세상에서 풀려나 영원한 침묵, 자마니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커다란 생명 응집이다. 내 몸뚱이
하나에는 조상 대대로 숨결과 궤적이 기억이라는 유전자에 새겨 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내 삶을 기억하는 것이고, 우리 살아있는
생명체 자체가 내 아버지 기억이고 내 어머니 기억이며, 내 존재가
내 아버지와 어머니 존재 증명이듯이, 내 자식이란 존재가 또한
내 존재 증명이다. 우리는 그걸 대를 이어간다고 말한다.
좋은 인생이란 좋은 기억을 남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대를 이어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좋은 기억이다.
"나는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경영나침반이라고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열세 살 나이에
'나는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화두와 부딪힌다.
스승이었던 필리글러 신부가 남긴 말이다.
"너희 나이가 50이 되어서도 '나는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가'에 대해서 나름
대답이 나오지 않고 그 의미가 잡히지 않는다면, 그 인생, 헛산 줄 알아라."
이 물음은 이제 우리 물음이다. "나는 무엇으로 기억 될 것인가?"
법정스님 숨결 변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