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교리 강좌

보리수 아래의 깨달음

갓바위 2024. 1. 5. 09:44

보리수 아래의 깨달음

왕궁을 나온 싯다르타는, 당신이 살던 카피리라 성에서

동남쪽으로 500km 남짓 떨어진 마가다 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도중에 '바가완'이라는 선인(仙人)은 만나서 고행을 닦기도 했고,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에게서 삼매를 배우기도 했지만,

이런 수행을 해도 태자의 번민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결국은 죽고 마는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태자는 네란자라 강 부근의 전정각산(前正覺山)

으로 들어가서 다섯 친구와 함께 다시 처절할 정도로 고행에 전념하였다.

 

6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삶과 죽음에 대한 번민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행의 무익함을 확인한 태자는 이를 중단하고 전정각산에서 약 8km 떨어진 보드

가야의 보리수 아래로 자리를옮겨서 당신의 방식대로 새롭게 수행을 시작하셨다.

 

12세 어린 나이에 농경제에 참석했다가 '고기 몸'의 비극을 목격하고서

염부제 아래에서 곰곰이 생각하던 일을 떠울렸다. '고행'이나 '삼매'와

같은 어떤 테크닉을 이용한 수행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yathabbutam)' 보는 진솔한 수행이었다. '선(禪)'이었다. '고행'과

'삼매락(三昧樂)'을 모두 배격하는 고락중도(苦樂中道)의 수행이었다.

 

태자는 곰곰이 생각하였다. '어째서 죽음이 있는가?'

'어째서 모든 생명은 죽어야 하는가?'···· 그러다가 첫 번째 답을 발견하였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였다.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어났기 때문에 늙어 죽는다.

 

모든 생명체가 무한히 생로병사 하는 원리와 과정을 열두 단계로 요약한

십이연기설(十二緣起設)에서는 이를 "생이 있음에 노사가 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태자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 어째서 태어나는 것일까?'······

 

기억을 더듬으며 깊이 숙고하다가 한참 시간이 흘러 초저녁〔初夜〕이

되었을 때 호흡조차 잦아들면서 당신의 전생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언제 어디에 태어났는지,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먹고살았는지,

수명은 어땠는지, 어디서 죽어서 어디에 태어났는지······.

이렇게 자신이 전생을 기억하는 능력을 '숙명통(宿命通)'이라고 부른다.

 

태자는 시선을 다른 생명체로 돌려서 그들의 삶에 대해 면밀히 통찰하였다.

그리고 자정〔中夜〕무렵이 되었을 때 태자는 모든 생명체의 탄생과 죽음,

행복과 불행의 원리에 대해 '있는 그대로' 직관할 수 있었다.

 

천안통(天眼通)이 열렸던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탐· 진 · 치와 같은

번뇌로 인해서 계속 태어냐며, 악을 행하면 그의 미래와 다음 생이 불행해지고

선을 행하면 행복해진다는 인과응보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어떤 생명체든 그의 행복, 불행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에 해당하는 원인에 의존해서 발생한 것이었다.

후대의 교학에서는 이런 '의존적 발생'의 법칙을 연기(緣起)라고 부른다.

 

싯다르타 태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깊은 생각에 침잠하였다.

새벽〔後夜〕이 되었을 때 모든 번민이 사라지고 최고의 깨달음이 열렸다.

생명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괴로운 곳이라는 점〔苦〕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이런 괴로움의 원인〔集〕인 번뇌를 제거하면, 괴로움이 사라진 열반〔滅〕을

증득하는데, 이는 팔정도〔道〕를 실천으로써 성취된다.

번뇌〔漏〕가 소진〔盡〕 되었다는 의미에서 이를 누진통(漏盡通)이라고 부른다.

 

모든 생명체를 약육강식의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길을 발견하셨던 것이다.

전륜성왕의 길을 버리고 출가하신 후 6년이 지나서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의

세 가지 신통력〔三明〕이 열리면서 드디어 부처님이 되셨다. (《사분율四分律)》).

김성철 교수의 불교하는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