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회의 영원한 균형추
인간 사회의 영원한 균형추
실리가와 이념가
우리 사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부류는 '금력'이나 '권력'과 같은 동물적인 힘을 지향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그런 동물적인 힘보다 '정의'나 '자비'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싯다르타 태자의 탄생설화에서 거론하는 전륜성왕은 전자에 햐당하지만,
부처님은 후자의 길을 선택하셨다. 현대사회에 적용하면 유능한 기업가,
종속적 정치인 등은 전자에 해당하고 '올바른' 법조인, 언론인, 교육가,
시민운동가, 그리고 종교인은 후자에 해당한다.
'물질적 이익'이나 '세속적 명예'를 목표로 삼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전자를'
실리가(實利家)'라고 명명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든 '정신적 가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후자를 '이념가(理念家)'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실리의 길과 이념의 길을 칼로 무 자르듯이 구분할 수는 없다.
실리와 이념 가운데 무엇을 더 중시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행로가
달라지지만, 실리의 길을 가도 언제나 이념의 좌표가 함께 하고,
이념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라고 해도 의식주(衣食住)의 실리를 무시할 수 없다.
"먹어야 양반이다."라는 속담에서 보듯이 어느 정도의 실리가 충족되어야
이념의 길을 갈 수 있고, 아무리 실리가 차고 넘쳐도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는 '배부른 돼지'와 다를 게 없다.
어떤 사회의 구성원들이 오직 실리만 추구한다면 그 사회는 약육강식의
밀림으로 전락하고, 이념만 추구하는 사회는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산업혁명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서구사회는 전자와 같았고,
'육체노동을 천시했던 구한말의 한반도'와 '88올림픽 이후
도미노처럼 몰락한 공산권 국가들'은 후자와 같았다.
실리가와 이념가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계급(class)'과 그 의미가 다르다.
계급은 '권력이나 금력의 양(量)'으로 그 위계가 구분되지만, 실리와 이념은
'질(質)적으로 대립하는 힘'이다. 마르크스 역시 이념가에 다름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계급 없는 사회가 올 것이라고 꿈꾸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실현가능한 이상 사회는 '계급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실리가와 이념가의 힘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다.
예를 들어 원시사회에서 추장이 실리가였다면 무당은 이념가였다.
중세유럽에서 교황은 이념가의 수장(首長), 왕은 실리가의 우두머리였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사제(司祭)인 바라문은 이념가인 반면
정치가인 크샤트리아와 상업인인 바이샤는 실리가에 속한다.
조선시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에서 '사'가 이념가라면
'무공상'은 실리가에 해당한다. CEO는 실리가, NGO는 이념가다.
이 두 힘이 균형을 이룰 때 사회는 안정되고 번영하였다.
실리가와 이념가, 그 지향점은 상극(相剋)이지만 우리 사회가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이끄는 두 마리의 말과 같다.
실리가는 사회의 부를 창출하고 이념가는 그것이 공정하게 분배되게 만든다.
실리가는 무력을 통해 외적의 침입을 퇴치하고 이념가는 그런 무력이
구성원에게 행사되지 않도록 감시한다. 우리 사회에서 실리와 이념이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독단을 넘는 제3의 길이다.
불교는 지극한 이념의 종교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평등과 그에 대한
자비를 가르친다. 지금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저울대는 실리의 방향으로
지나치게 기울어 있다. 이때 실리가들의 지친 마음을 보듬고 충혈된 눈을 식히며,
동물적 횡로를 견제하고 삶의 좌표를 제시하는 일 등은
이념가인 불교인들이 적극 나서서 해야 할 일들이다.
김성철 교수의 불교하는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