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슬픔 ~찡한글

넉보 아지매

갓바위 2023. 3. 18. 10:41

 

어시장에 장사를 나온 첫날,

겨울 바닷바람이 불 때마다 칼날이 스친듯 얼굴이 따끔거렸다.

간판도 가림막도 없는 도매 판매장 입구에 쭈뼛 쭈뼛 서 있는데

다가오는 걸음마다 힐끔힐끔 얼굴을 살피며 "새댁 얼굴이 낯서네."

 

말을 던지고는 그냥 지나갔다. 경매장에서 가져온 생

선 상자를 쌓아 놓고 두 시간 동안 팔지 못한 채 남편과 장승처럼

서 있을 때 찾아 온 첫 손님이 넉보 아지매였다.

 

"젊은 사람들이 뭐 한다고 이 험한 어시장에 나왔노?

이런 데서 장사 하게 생기지도 않았구만!" 등을 툭 치며 하는 말에

울 일도 아닌데 눈 물이 주륵 흘렀다.

별말 없이 갈치 네 상자를 사 간 그녀는 이후 매일 찾아오는 단골이 되었다.

 

냉동 수산물은 공산품과 달리 배에서 선원들이 하나하나 상자에 담아서

경매로 유통한다. 냉동이라 일일이 확인하기 어려운 탓에 가끔은

속에 다 품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생선들을 숨겨 포장하는데,

이런 일로 도매상이 손님들로부터 억울한 곤욕을 치를 때가 종종 있다.

 

넉보 아지매는 그런 사정쯤은 진즉 알고 있기 때문인지 물건이 나쁘면

나쁜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팔고 와서 이야기를 전해 줬다.

덕분에 물건 상태를 아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언제나 억지 부리지 않고

자갈치 시장에서 단가 높은 중 자, 대 자 갈치를 잘 파는 손님 중 한 분이었다.

 

모두가 힘들었던 IMF 때도, 코로나19로 경기가 어려울 때도 장사를 잘

해 온 넉보 아지매에게 비결이 뭐냐고 물어보면 물건을 속이지 않고

주는 우리 부부 덕이라며 웃었다. 말 많고 시샘 많은 시장에서 흔들림

없이 강단 있게 장사하는 그녀가 어렵기도 했지만 언제나 고마웠다.

 

도매 시장임에도 자기 이문을 먼저 생각하는 손님들도 가끔 있다.

습관처럼 깎는 손님, 정찰제 없는 시장이라고 홍정으로 버티는 손님 등.

그런 손님들과 거래를 지속하기 위해 외상 사정 봐주다

돈 잃고 사람 잃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느 날 그녀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함께 사는 아들에게 딸만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늦둥이 손자를 봤단다.

좋은 것일수록 자랑하지 않아야 한다며 그걸 지키겠다고 입을 감췄다.

 

장사를 잠깐하고 그만두려고 했는데 손자 본 뒤로는 좀 더 하려 한다고 말 한 뒤로

그녀는 몇 년간 물건을 받아 갈 때마다 착한 손자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했다.

자랑도, 고뇌도 터놓은 적 없는 그녀가 나에게 기쁜마음도, 묵은가슴도 털어놓았다.

 

서른여섯 살에 혼자되어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자식 굶기지 않으려 자갈치

시장에 나왔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개상어를 벗기고 가오리를 말리다

힘에 부쳐서 갈치 장사를 시작했단다. 단신으로 장사해 자식

넷 다 키워 짝 맞춰서 살게 하고, 자신은 아들과 따뜻하게 산다고 했다.

 

요즘에야 굶고 사는 사람 없지만, 자신이 젊을 때는 배고픈 일이 제일 무서운

일이었다고. 지난봄엔 손자가 군대 갔다며 쓸쓸해하는 표정을 처음으로 보였다.

손자 용돈 주는 재미로 새벽이면 일어나 시장에 오던 그녀가 기운을 잃어 갔다.

 

잠깐이면 제대하고 온다고 위로해도, 자기 나이가 여든일곱인데 그때까지 살지

모르겠다고 힘없이 말한 그녀가 발걸음을 조금씩 늦추더니 몇 달째 보이지 않는다.

 

손님으로 만난 25년간 외상 한번, 홍정 한번 하지 않고 거래처 한번 옮기지 않은

그녀는 자갈치 시장의 산증인이다. 그녀가 예순이고 내가 마흔이었을 때다.

내가 넉보 아지매로 시를 쓰고 싶다고 한 적 있다. 아무것도 내놓을 것 없는

인생인데 그 귀한 시를 쓰냐며 웃던 모습이 떠 오른다.

 

넉보 아지매는 문맹인이다. 휴대폰도,

장부도 없이 자갈치 시장에서 50년을 신용 하나로 장사한 참된 손님이다.

대쪽 같은 자존심이 있어 언제나 가지고 있는 돈만큼만 물건을 샀다.

그 이름 누가 지어 부르게 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나에게는 '

넉넉한 마음'이라는 보석을 가져서 넉보아지매다.

 

오래도록 걸음이 없어 안부를 물으러 찾아갔다.

자갈치 시장속 연락처조차 알 길 없는 빈 좌판을 봄을 재촉하는

햇살이 혓바닥 붙여 핥고 있다.

 

"오십 년 전/바다 비린내 나는 앞치마 두른/자갈치 넉보 아지매//

서른여섯에 혼자되어/어미 새우처럼/자식들 안고 노점상인 되었다//

개상어 껍질을 벗기다가/가오리를 말리다가/갈치 꼬리 자른 지 삼십 년이다//

새벽 그믐달 닮은 허리로 앉아/생선 자른/여든일곱 살 아지매

신 발 속에는 비린내 묻은 바다가 소금밭이다//

 

글도 모르고 전화기도 없 이/늦둥이 손자 용돈 주는 재미로 장사 나온다던/

마음씨 넉넉한 넉보아지매//온다 간다 말도 없이/

어느 날 아침부터 자갈치 시장에 결석이 다."(<넉보아지매>)

 

박희자 / 시인, '영진수산'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