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
"등잔 밑이 어둡다."
가까운 곳에서 생긴 일을 잘 모를 때, 이를 지적하는 속담이다.
근대 이전, 우리 선조들은 접시 모양의 작은 그릇에 콩기름이나
아주까리기름을 붓고 한지나 솜을 꼬아 만든 심지에 불을 붙여서 밤을 밝혔다.
한자로 '상(上)'자처럼 생긴 등잔대의 수평받침 위에서
오롯이 타는 등잔불이었지만 그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등잔과 가장 가까운데도, 그 불빛이 결코 도달할 수가 없으니 역설적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냉소적 기미를 띠는 이유다.
어두운 방을 밝히기 위해 등잔불을 켜도 절대 비추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그 등잔 아래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등잔불에 비유할 때,
우리의 생각 역시 생각의 등잔불 밑을 비추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세속에 묻혀 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숨 막힐 듯 바쁜 삶의 와중에서
간혹 삶과 죽음, 인생과 우주에 대한 의문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죽으면 이 세상이 끝나는지 내생으로 이어지는지,
깨달은 분이 돌아가시면 어딘가 계시는지 아닌지,
영혼과 육체가 같은지 다른지? ···"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구 전통의 이웃종교들이 대개 그렇다.
또 부처님 당시에 자이나교에서는
"관점에 따라서 그 답이 달라진다."고 가르쳤다.
예를 들어서 현생이 내생으로 이어지는가, 그렇지 않은가?라고 물을 경우,
"본질의 관점에서는 이어지지만, 현상의 관점에서는 이어지지 않는다. ···"와
같이 답을 하였다. 이를 상대주의적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코끼리를 더듬어서 다양하게
그 모습을 주장했다는 우화가 이를 비유한다.
또 출가 전 사리불과 목건련의 스승이었던 산자야 벨라티뿟타는
위에 열거한 종교적, 철학적 의문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확답을 하지 않고 이런 저런 말을 하면서 답변을 회피했다.
그래서 그를 회의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형이상학적 의문에 대해 어떤 답을 제시하는 서구전통의 종교든,
관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고 보는 자이나교든,
답변을 회피하는 산자야 벨라티뿟타든 공통점이 있다.
그런 의문 자체를 문제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해결방식은 이들과 달랐다.
부처님게서는 그런 질문에 대해 침묵을 지키셨다가
십이연기나 사성제와 같은 연기(緣起)의 교설을 베푸셨다.
그 어떤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서도 침묵 후에 연기법을 설하셨던 것이다.
동문서답과 같은 방식이었다. 『대지도론』에서는, 그런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석녀(石女)를 보고서 그녀 아이의 피부라 흴까, 검을까?"하고
의문을 품는 것과 같은 잘못된 물음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모두 흑백논리적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생각이
만든 허구의 것이기에, 질문자가 연기법을 자각할 때 모든 의문이 해소된다.
종교적, 철학적, 형이상학적 의문은 그런 의문을 만든 생각의 등불이
비추는 곳을 조사하여 해답을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의 등잔 밑에 깔린 어둠을 비추어서 '해소될 성질의 것'이다.
생각의 허구성을 발견함으로써 의문을 해소하는 것 -
종교적, 철학적 의문에 대한 불교적 해결 방식이다.
선(禪)에서 말하는 회강반조(廻光返照)의 방식이다.
속담 속에 담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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