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여유 좋은글

흑백이서

갓바위 2023. 7. 9. 09:33

 

흑백이서 黑白二鼠

 

한 나그네가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 때 무엇인가

인기척 같은 소리가 나기에 뒤돌아보니 무서운 호랑이가 뒤쫓아오고 있었다.

'이거 큰일났다'라고 생각한 나그네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겨가다 보니 앞에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절망에 사로잡힌 나그네가 가만히 보니 낭떠러지에 우뚝 솟아 있는

등나무 넝쿨이 절벽 밑으로 늘어뜨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황급히 넝쿨을 타고 내려가 중턱에 이른 뒤 '이제는 살았구나'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손에 쥐고 있는 넝쿨이 더 이상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는수 없이 다시 밑으로 더 내려가다 보니까 우물 속에서 똬리를 튼

큰 뱀이 입을 딱 벌리고 나그네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그네가 황급히 가까운 곳에 발을 디딜 곳이 없나 하고 살펴보니

네 마리의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나그네가 다시 위를 올려다보니 등나무 넝쿨의 뿌리를

흰 쥐와 검은 쥐가 열심히 갉아먹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죽었구나'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그네의 머리 위에 걸려 있는

벌집에서 벌꿀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서 나그네의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나그네는 그 단맛에 도취되어 정신 없이 벌꿀을 마셨다.

 

그런데 벌집에서 날아온 벌이 나그네의 온몸을 찌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느 사이엔가 타오른 들불이 넝쿨을 태우는 것이었다.

나그네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되었다.

 

산길을 걷고 있는 나그네는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비유한다.

호랑이는 우리가 살면서 지고 가는 무거운 짐을 말한다.

우물 속은 인간 세계를 뜻한다. 우물 속의 큰 뱀은 죽음을,

네 마리의 독사는 땅· 물 · 불 · 바람 등 모든 물체를 구성하는 4원소를 말한다.

 

등나무 넝쿨은 생명의 줄이다.

이 줄을 검은 쥐와 흰 쥐가 쉴새없이 갉아먹고 있다는 것은

밤과 낮이 부단히 생명의 줄을 갉아먹고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벌꿀에 도취된다.

 

이 때의 벌꿀은 재욕 · 색욕 · 식욕 · 명예욕 · 수면욕의 오욕을 말한다.

들불은 질병과 노쇠함을 뜻한다.

이처럼 우리는 매일 무상의 바람에 쫓기고 미혹과 번뇌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질병과 노쇠함에 의해서 끝내 죽음을 뜻하는

무서운 큰 뱀의 입 속으로 끌려들어간다는 것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