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각스님 이야기
(1905~1998)
“부처님 일 하려면 계율 지켜야”
“윽~ 윽~ ” 제주도에 있는 한 사찰의 해우소 안에서
누군가 속이 안 좋은지 계속 신음 소리를 낸다.
해우소 밖에 있는 장정들의 표정에 근심이 가득하다.
한참 만에 나온 이는 스님이었다.
“몹쓸 사람들. 다음부터는 그런 것 먹지 말게”
평소 화 한번 안내는 스님의 꾸중에 장정들이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단청을 하는 스님과
젊은이들을 위해 누군가 간식을 사왔다.
스님이 한 조각을 물었다가 맛이 이상해
장정들에게 물어보니 삶은 오징어를 먹기 좋게
얇게 썰어놓았다는 것이다. 사실을 알고는
곧바로 해우소로 달려가 먹은 것을 모두 토해 냈다.
“부처님 계신 전각을 장엄하는 단청을 하는데
계율에서 어긋난 음식을 먹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
또 그러면 내 밑에서 일하지 말게”
우리시대 불모(佛母)로 추앙받는 혜각
(慧覺,1905~1998)스님의 젊은 시절 일화이다.
혜각스님은 부처님 계신 전각을 장엄하는
단청 불사의 외길을 평생 묵묵하게 걸은 어른이다.
1992년 정부로부터 인간문화재 제48호로
지정받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다.
단청 일을 하는 장인(匠人) 가운데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없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해체보수작업을 한
국보 1호 숭례문의 단청도 스님 손길이 닿았다.
[단청불사 외길 ‘불모’
숭례문 단청 도맡아]
그러나 스님은 ‘단청기술자’만이 아니었다.
수행자의 위의(威儀)를 잃지 않고 여법한
모습으로 정진했던 부처님의 참된 제자였다.
하심(下心)과 인욕(忍辱)을 기반으로
부처님 가르침에서 한 치의 어긋나는
일이 없어 생활 자체가 정진 그대로였다.
때문에 스님은 불모인 동시에 계율을 철저하게
지킨 율사(律師)였고 한순간도 화두를
놓지 않은 선사(禪師)였다.
혜각스님은 1905년 7월 9일 황해도 신촌군
남부면 사동리에서 부친 김구하(金求夏)
선생과 모친 밀양 박씨(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남다른 면이 있었다.
마을에서 상여 나가는 소리라도
들리면 열 일 제치고 달려갔다.
“애야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니”
어머니가 만류해도 소용이 없었다.
장례행렬의 뒤를 따르며 ‘화려하게’
치장한 상여의 문양(紋樣)을 유심히 보았다.
출가 이전부터 단청 문양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 땅바닥에 나무 꼬챙이
하나로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려,
어른들이 “그런 재주가 어디서 났냐.
참 신통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스님은 1920년 회명(晦明) 스님과
인연이 닿아 부처님 제자가 된다.
이때 나이 불과 15살.
당대의 강백이며 선지식으로 존경을 받던
회명스님은 이후 혜각스님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혜각스님은 1938년 강화 전등사에서 대련(大蓮)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1950년에는
영축산 통도사에서 구하(九河)스님에게 일옹
(一翁)이라는 법호를 받고 영축총림과 인연을 맺는다.
[계율 어긴 제자에 “짐 싸게!”]
해방 전의 일이다. 혜각(慧覺, 1905~1998)
스님이 돌장승 앞에 섰다.
돌장승 앞에 돈을 놓고 합장 반배한
스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진다.
3년 전 금강산 참배를 위해 떠날 때 여비가 없어
돌장승 앞에 누군가 놓고 간 30원을 들고
나섰는데 오늘에야 갚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날 쓰라고 주셨나보다.”라고
돌장승 앞에 놓여있던 돈을 여비로 사용했었다.
하지만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했던
스님은 돌장승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다.
또 다른 일화. 스님이 70년대 중반에 조계사에
일이 있어 올라와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한
여관에 걸망을 풀었다. 도시생활이 낯선 스님은
평소 절에서처럼 방문을 잠그지 않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밤새 ‘밤손님’이
들어와 걸망을 들고 줄행랑을 놓았다.
졸지에 무일푼이 된 스님은 통도사로
돌아오는 여비 5000원을 여관 주인에게 빌렸다.
며칠 뒤 통도사에 도착한 스님이
돌아오자마자 다시 걸망을 꾸렸다.
이유를 물으니 “여관 주인에게 꾼 5000원을
갚기 위해 서울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상좌들이 “우체국을 통해 보내면 됩니다.
”라고 만류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내가 빌렸으니 내가 손수 갚는 게 도리”라면서
스님은 그길로 서울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신세지면 꼭 직접 갚아
서릿발 수행 예외 없어]
30년간 혜각스님을 시봉한 상좌 동원(東園)스님
(통도사 사명암 감원)은 “우리 스님은
참 ‘미묘한 어른’이셨다.”면서 “어른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회고한다.
혜각스님은 부처님 제자가 되어
계율을 어기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이보게 그만 짐을 싸게” 노스님이
젊은 스님에게 꾸지람을 호되게 한다.
무릎 꿇고 앉은 스님은 손을 싹싹 빌며 용서를 구한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결국 젊은 스님은 걸망을 싸고 떠나야 했다.
라면을 끓여 먹었기 때문이다.
동물성 재료가 들어간 라면을 부처님 모신
도량에서 출가수행자가 먹는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않았던 혜각스님이다.
단청불사를 할 때 스님은 계율에
어긋한 행동을 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스님 성품을 잘 모르고 작업하는
인부들이 담배라도 피워 물면 혼줄이 났다.
또 마을에 내려가 막걸리를
사먹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부처님 일을 해서 품삯을 받은 것을
담배 피고 술 먹는데 쓴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야.”
회명(晦明)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혜각스님은
1920년부터 화응(華應)스님 문하에서
5년간 전통단청교육을 받았다.
1959년 문교부 주최의 단청문양 강습회도 마쳤다.
“법당을 여법하게 장엄하는 것도 수행자의
중요한 소임”이라는 생각을 한시도 버리지 않고
세연을 다하는 날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부처님 말씀대로 살았을 뿐”]
후학들이 “스님 가르침을 전해주십시오”라면서
법문을 청했지만 혜각(慧覺 1905~1998) 스님은 사양했다.
생활하는 매순간마다 ‘살아있는 설법’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늘 겸손했다.
“나는 중 노릇 잘한 게 없어”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며 수행했건만
늘 “잘한 게 없다”는 스님의 말씀이다.
“나는 단지 부처님 말씀대로 살았을 뿐이야”
부처님 제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가르침이다.
스님은 말보다는 행(行)을 위주로 했다.
제자들이 계율에서 어긋난 일을 하면
용서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자비보살’이었지만,
잘못을 목격하면 눈물이 쏙 나도록 야단을 쳤다.
‘나한’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새벽 3시면 불이 켜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근하는 스님의
음성이 통도사 사명암의 정적을 깨웠다.
“사문이 되어 아침 저녁으로 부처님께 문안을
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말년에 잠시 몸이 불편해 바깥출입을
삼갈 때도 예불시간만 되면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정근과 참선을 했다.
[자비 보살…‘나한’별명도
세수 80 넘어 지리산 종주]
여행을 좋아했다.
상좌나 손상좌들과 함께 걸망 하나
둘러메고 산천(山川)을 만행하는 것을 즐겼다.
80 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손상좌와 함께 지리산을 거뜬히 종주 했다.
노스님이 지리산을 종주하는 모습을 본
등산객들이 눈이 동그래졌음은 물론이다.
상좌 동원스님(통도사 사명암 감원)과
흑산도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조약돌이 깔린 해변을 걷고 있던
스님이 상좌에게 한마디 한다.
“여보게. 가장 마음에 드는 돌을 하나씩 주어 볼까”
은사 스님의 말에 동원스님은 뜻을 따랐다.
30분이 지났을까.
서로 고른돌을 내 보였다.
그런데 혜각스님이 고른돌은 조약돌이 아니었다.
누군가 버린 ‘하찮은’ 유리병 조각이었다.
파도에 닳고 닳았지만
유리병 조각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은사스님, 그것은 유리병 조각인데요.”
“나는 그래도 이게 제일 좋아”
조약돌 대신 유리병 조각을 선택한
스님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혜각스님은 단청하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동원스님이 들려주는 일화이다.
“스님께서 단청한 도량
가운데 한 곳이 김천 직지사입니다.
다른 절이나 전각도 그렇지만
정말 혼신을 다해 마무리 하셨지요.
그리고는 한참 뒤에 우연하게 북한 사찰
모습이 담긴 도록을 보게 되었습니다.
불타버리기 전의 금강산 신계사 단청 문양이
실렸는데, 어쩌면 그렇게 똑같던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스님은 전생에도 단청을 했던 인연이 있었나 보다.
[“단청도 마음 닦는 법의 하나”]
노스님 한 분이 아스팔트 길을 걷고 있었다.
커다란 병풍을 등에 짊어진 노스님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 한다. 얼마를 걸었을까.
노스님 앞에 승용차 한대가 멈추어 섰다.
차에서 황급히 내린 젊은 스님이
합장하며 인사를 올린다.
“아니, 큰스님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그리고 그 큰 병풍은 무엇이구요”
“부산에 갔다 오는 길이네”
“차를 이용하시지 않구요”
“하하. 나는 이렇게 걷는 게 좋네”
절까지 차로 모셔 드리겠다고 했지만
노스님은 “괜찮다”며 극구 사양했다.
그렇다고 그냥 갈 수는 없는 일.
노스님을 ‘강제로’ 차에 오르게 한 뒤
병풍은 뒷좌석에 실었다.
불과 20여분 만에 통도사 산문에 들어서자
노스님은 “이제 됐으니 그만 내려달라”고 말했다.
차가 멈추어 서자 “고맙소.” 라는
인사를 뒤로하고 노스님은 내렸다.
그날 저녁의 일이다.저녁 공양을 마치고
포행에 나선 젊은 스님은 깜짝 놀랐다.
오늘 낮에 차를 태워드린 노스님이 같은 병풍을
지고 통도사 산문에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성을 담아 만든 병풍을 선물해준 분의 마음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손수 짊어지고 큰절까지 왔던 노스님이
바로 혜각(慧覺, 1905~1998)스님이다.
차를 타고 온 길을 되돌아가 다시
큰절까지 걸어왔던 노스님의 마음.
그리고 후학의 ‘정성’마저 홀대하지 않고
차에 올랐던 노스님의 마음은 과정을
소홀히 하고 편리만을 추구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교훈으로 다가온다.
[선물 받은 병풍 짊어지고
부산서 통도사까지 걸어]
혜각스님에게 단청(丹靑)은 수행이다.
스님은 “단청이란 수행의 한 부분”이라면서
“단청의 근본은 해탈의 도를 얻는데 있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청정심이 바탕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요” 때문에 아무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단청한 것을 지워버렸던 스님이다.
스님의 손길이 닿은 전각만 해도 한둘이 아니다.
개성 안화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화엄사 각황전,
함경도 석왕사 대웅전, 함경도 귀주사 대웅전 등
전국 100여개 사찰에 200여동의 단청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국보 1호인 숭례문, 우정총국,
황해도 봉산향교 대성전의 단청 작업에도
참여해 민족문화재의 계승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단청 일을 하게 된 까닭을 스님은 이렇게 밝힌바 있다.
“전생의 어떤 인연으로 현생에서 화업(畵業)을
수행으로 삼게 됐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 번도 이 일을 싫어해 본적은 없어요.
출가한 사람이 평생을 두고 자신을 닦는 일로,
부처님의 거룩한 회상을 재현하고 불당을 장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글과 사진 어찌 함부로…”]
“큰스님, 어디에 쓰시려고 물건들을 사 모으십니까.
굳이 사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아니네. 다 쓰일 데가 있는 거야.
들여 놓게”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통도사 사명암으로
이런 저런 물건을 갖고 오는 사람이 많았다.
혜각(慧覺, 1905~1998)스님은 웬만하면
그 물건들을 비용을 주고 사들였다.
시자들이 만류했지만
“나와 인연 있어 여기까지 왔는데,
모른 척 할 수 없어”라며
흔쾌한 마음으로 받아 들였다.
특히 문화재급에 해당하는 고서화(古書畵)는
많은 금액을 주고라도 반드시 매입했다.
단청일 때문에 전국을 만행하던 혜각스님은
자연스럽게 고서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삼보정재를 소중하게 여겼던 스님의 이 같은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
주위에서 “무슨 이유로 모으는지 모르겠다.”는
걱정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스님은 개의치 않았다.
고서화를 수집한 까닭은
스님이 열반할 때 되서야 드러났다.
스님은 열반에 들기 몇 해 전 당신이 평생 모은
고서화를 통도사 박물관, 동국대 박물관, 해인사,
송광사, 도선사 등에 전량(全量) 기증했다.
“일제 강점기를 겪어오면서 귀중한 우리 고서화가
멸실(滅失)되는 것이 안타까웠던” 스님이 평생
정재로 문화재 모아 영원히 보존토록 한 것이다.
[휴지 한 장 서너 차례 사용
평생 고서화 수집 전량 기증]
스님은 부처님과 관련된 것이면 무엇이든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목숨처럼 여겼다.
신문이나 잡지 등을 보다가 부처님과
관련된 기사나 사진이 나오면 절대 버리지 않았다.
그 부분을 가위로 오려 스크랩을 해 놓았다.
앨범이나 공책 같은 곳에 고이 모셨다.
“어찌 함부로 버릴 수 있겠어.
세상 모든 게 다 소중한 것이고,
특히 부처님 글과 사진이 나온 것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지.”
혜각스님은 화장지 한 장도
그냥 버리는 법이 없었다.
두세겹으로 되어 있는 휴지를 사용할 때면
한 겹만 따로 떼어 사용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잘 말려 또 다시 이용한다.
그런 뒤에는 휴지를 반으로 접어 쓰고,
다음에는 또 다시 반으로 접어 활용한다.
더 이상 사용하기 어려울 때는 그동안 모은
휴지를 한데 모아 해우소에서 뒷일을 볼때 처리한다.
이처럼 철두철미한 삶을 사셨던 어른이 혜각스님이다.
물질이 풍부해 너무 많은 것을 함부로 헤프게
사용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상좌인 동원스님(통도사 사명암 감원)은
“우리스님은 언제나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이면서
사중을 위하는 마음으로 항상 삼보정재를
아끼셨다”면서 “또 평생 원력으로 단청 비법을
전승해 수많은 도량을 가꾸어 온
우리 시대의 스승”이라고 회고한다.
[“자연보다 더 뛰어난 단청 없어”]
혜각(慧覺,1905~1998)스님의
은사는 회명(晦明)스님이다.
출가사문의 길을 걷도록 해준 어른이기에
혜각스님은 회명스님을 극진하게
시봉했던 효상좌였다.
하지만 한동안 ‘불편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당대 선지식으로 존경받던 은사스님에 대한 행장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1994년 상좌인 태연(泰然)스님이 관련
자료를 수집해 〈회명문집(晦明文集)〉을 펴내자,
혜각스님은 “내 평생 은사스님의 행장과 뜻을
후학들에게 전하지 못해 서운했는데
문집이 발간되었으니 이제야 마음을 놓게
되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태연스님(약사사 주지)도 “회명 노스님 문집을
발간한데 이어 97년도에 건봉사에 노스님 부도를
모셨다”면서 “은사스님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무척 기뻤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은사스님께 더 없는 ‘효 상좌’
1분 1초 아껴가며 수행 정진]
혜각스님은 1분 1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람 몸 받기 힘들고 더구나 불법(佛法)을 만나
출가하여 살기 쉽지 않은데 어찌 한순간도 허비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철저하게 지녔던 어른이다.
때문에 새벽같이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찰나의 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하는데 일념(一念)으로 집중해
정성을 다했음은 물론 화두를 놓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혜각스님에 대해 평생 단청에
전념했던 어른으로만 기억하지만,
스님은 수행에 있어서도 철두철미했다.
그런 까닭에 주변에는 스님을 좋아하는
수행자와 재가불자가 많았다.
구하스님을 비롯해 경봉, 벽안, 월하스님 등
영축총림의 ‘어른스님’들도 “혜각스님만한 분이
드물다”면서 후학들에게 “혜각스님처럼
수행 정진하라”고 당부했다.
전각에 그림을 그리는 단청장(丹靑匠)으로 평생 보낸
스님이지만 가장 좋아했던 ‘그림’은 자연이였다.
“자연은 욕심이 없어요. 계절마다 아름다운
색으로 세상을 단청해 주는 그 마음을 배워야 돼요.
사실 자연보다 솜씨가
뛰어난 단청을 난 본 일이 없어요.”
스님은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훼손되는
자연에 대해 안타까움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의 욕심이
자연을 망치니 참으로 안타까워요.
욕심을 못 버려 끝내 중생으로
남아 있는 게 바로 사람들이지요”
반백년 가까이 주석했던 통도사를
스님은 이렇게 찬탄했다.
스님의 유품 가운데 있는 수첩에 기록된 글이다.
“일월명천지(日月明天地).
탑영조문루(塔影照門樓).
우연통도래(偶然通度來).
비조산중부(飛鳥山中浮).
고산영축봉(高山靈鷲峰).
고금기천추(古今幾千秋).
북악종남산(北岳從南山).
서출수동류(西出水東流)”
동국역경원 최철환
부장은 우리말로 이렇게 옮긴다.
“해와 달이 천지를 밝게 하고,
탑그림자가 문루를 비추네.
우연히 통도사에 오니,
나는 새가 산 가운데 떠 있네.
높은 영축봉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몇 천 년을 흘렀겠는가.
북악은 남산에서 쫓아 나오고,
서쪽으로 나온 물이 동쪽으로 흐르네.”
[“갈려니 섭섭, 있으려니 괴로워”]
세수 90을 넘기면서 법체(法體)가 많이 약해진
혜각(慧覺, 1905~1988)스님이었지만
정진을 그치지 않았다.
상좌들과 함께 해외불교성지를 돌아보았을 정도.
부처님과 관련된 일이면 언제 몸이
안 좋았냐며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말년에 거동이 불편해진
스님은 그때서야 외부 출입을 삼갔다.
하지만 평생 실천해온
수행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새벽 3시면 자리에서 일어나 예불을 모시고
도량을 포행한 후 조용히 참선에 들었다.
상좌와의 대화. “스님, 오늘은 날씨도 찬데
요사채에 머물고 마당에는 나가지 마세요
“아니다. 부처님 모신 도량에 머물면서 어찌
도량을 살피는 일을 빼어 먹을 수 있느냐.”
스님은 붓글씨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평생 붓을 들었던 스님은 서예에 있어서도
경지에 올랐다. “내 글씨는 볼품이 없어”라며
겸손하게 말했지만, 정성과 신심이 들어간
스님 글씨는 향기를 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스님이 주로 썼던 글씨는 스님의 ‘마음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단서이다.
불(佛), 선(禪), 중도(中道), 광명정대(光明正大)
등이 스님 손을 통해 종이에 쓰인 글이다.
90노구에 해외성지순례
“더 이상 사는 것은 욕심”
혜각스님의 비문을 쓴 석정(石鼎)스님은
“계덕을 갖춘 불모는 희귀한 때에 혜성같이
나타난 청정불모”라면서 “혜각스님께서는 신심과
원력으로 모든 불사에 임하셨다”고 회고한다.
“사원(寺院)의 우열을 가리지 않고 보수의 다과
(多寡)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혹 스님이 현장에 없을 때 소홀히 한 곳이 발견되면
반드시 이를 고쳐서 다시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갈려니 섭섭하고 있으려니 괴롭다”
입적 하루 전날 혜각스님은
‘열반송 아닌 열반송’을 남겼다.
한문으로 된 ‘그럴듯한’ 열반송은 아니었지만
“갈려니 섭섭하고 있으려니 괴롭다”는
‘마지막 말씀’은 오히려 더 큰 감동을 준다.
상좌들이 “은사스님 좀더 계셔서 저희들을
이끌어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자, 혜각스님은
“더 이상 사는 것은 욕심일 뿐”이라며
조용한 목소리로 답하고 원적에 들었다.
이때가 1998년 1월 2일 오전 8시20분.
열반처는 통도사 사명암이다.
법에 귀의한 나이는 78세. 세상나이는 94세.
당호는 1963년 통도사에서 구하(九河)스님에게
입실(入室)하며 받은 일옹(一翁)이다.
관악산 연주암과 남해 용문사 주지 소임을
보면서 퇴락한 도량을 일신하고 재건한 뒤에는
미련 없이 소임을 넘겨주었던 욕심없는 스님이었다.
평생 단청불사의 외길을 묵묵히 걸으며 수행
자로서 위의를 흩트리지 않았던 혜각스님이다.
상좌로는 동원스님(통도사 사명암 감원), 태연스님
(약사사 주지), 동하스님(통도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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