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이야기

귀신들의 속삭임

갓바위 2018. 5. 31. 08:49
귀신들의 속삭임

떠돌이 보부상 홍가는 타고난 
역마살에 한번 집을 나서면 몇달씩, 
어떤 때는 1년 넘게 방방곡곡을 쏘다닌다. 
장사 수완이 좋아 곧잘 이문을 남기지만
 방탕한 기질을 버리지 못해 
주색잡기에 다 쏟아버린다.
영월 땅 산마루 주막집 주모와 눈이 맞아 
열흘째 기둥서방처럼 눌러앉은 홍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그날도 손님이 
없는지라 술을 한잔 걸치고 
저녁나절부터 육덕이 푸짐한 
주모를 끼고 운우의 정을 나눴다.
“오늘이 며칠인가?” 
“초이레지 뭐요.”
홍가는 벌떡 일어났다.
“오늘이 선친 제삿날이야!”
주섬주섬 옷을 입은 홍가는 
도롱이만 걸치고 걸음을 내달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하지만 제사 때는 이미 놓쳤다.
날은 어둡고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지고 
주모한테 진을 뺀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워 
도저히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 
어슴푸레 산길 옆에 움막 하나가 보였다. 
홍가는 움막에 들어가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귀신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놈의 제사, 다시는 안 간다.”
“제삿밥 한술 얻어먹으려다 
기절할 뻔했네. 구렁이가 
다섯마리나 밥 속에 있지 뭔가.”
“맏상주는 작년에도
 안 오더니 올해도 안 왔대.”
“그 못된 놈, 제 딸년과 
상피 붙어먹을 사주야!”
홍가는 벌떡 잠을 깼다. 
그 움막은 바로 초분이었으니, 
남의 시체 거적때기 
위에서 잠을 잔 셈이다.
‘밥 속의 뱀 다섯마리’와 ‘딸년과 
상피 붙어먹을 놈’이라는 구절이 
생생하게 귓전에 맴돌았다.
“밥그릇 속에 무슨 뱀? 
딸도 없는데 상피 붙어?”
홍가는 코웃음을 치며 움막을 나왔다.
봉평 집에 다다랐을 땐 부옇게 동이 텄다. 
부인이 눈을 비비며 대문을 열었다. 
홍가는 아직 그대로 있는 
제사상으로 가 밥그릇을 열었다.
긴 머리카락 다섯개가 섞여 있었다. 

그때 안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누구여?” “누구긴 누구요. 
당신 딸아이지.”그러고 보니 
그가 집을 나선 게 1년도 넘었다. 
귀신의 말이 생각나 
그는 억장이 무너졌다. 
그는 낫을 들고 들어와 
돌 지난 어린 딸을 내리쳤다. 
그때 딸을 안아올린 부인이 몸을 돌리는 
바람에 낫 끝은 딸아이의 등을 벴다. 
피범벅이 된 포대기를 안고 
도망친 부인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40대 중반의 홍가는 여전히 
보부상으로 팔도강산을 떠돌았다. 
어느 날, 줄포 포구의 색주가에서 
진탕 술을 마시고 어린 기생을 끼고 잤다. 
운우가 지나고 등잔불을 켜 담뱃불을 
붙이는 홍가를 발가벗은 
기생이 빤히 바라보더니,
“초면이 아닌 것 같아요.”
홍가 눈에도 어린 기생이 낯설지 않다. 
갑자기 홍가는 얼어붙었다.
“너, 등의 상처 자국은 왜 생겼느냐?”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해준 얘긴데
 제가 젖먹이일 때 아버지가 
실성해서 낫으로 저를 죽이려다가….
”“그만! 그만!” 이튿날 아침, 
색주가가 발칵 뒤집혔다. 
뒤뜰 감나무에는 
목을 맨 시체가 매달렸다. 
- 사랑방야화 -
복 받는날 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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