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고난이 닥쳐옴에도 이유가 있다
일타 스님
어떤 부부가 살았는데 나이 마흔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홀연히 사내 자식을 하나보게 되었어요..
늘그막에 본 귀한 자식인지라
이들 부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이름도 금덩어리, 옥덩어리 같다 해서 금옥이라고 짓고,
애지중지하기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어요.
변소에 가도 업고 가고, 마실을 가도 업고 가고,
무엇이든지 달라고 하면 다 사 주고, 맛있는 것,
좋은 옷 등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키웠습니다.
그래 놓으니까 자연히 아이의 습관이 아주 못쓰게 되었지요.
어느 날 하루는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에게 바람을
쏘여 준다고 같이 들판에 나갔습니다.
먹을 것도 준비하고 포대기로 아이를 싸서 등에 업었지요.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 주고 재미있는 장난감도 사 주고
맛있는 것도 듬뿍 사 주엇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등에 업힌 아이가 아버지의 머리를 탁 치면서
---'아버지 저것 줘' 했어요. 아버지는 어리둥절하여
--- '저것이 뭐냐' 하고 물었지만 아이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무작정
---"저것 줘..." 하고 ----바락바락 떼를 쓰는 것입니다.
애가 탄 아버지는 아이를 달래고 어르면서 무엇을 달라고 하느냐고 물어도
제 성질을 못 이긴 아이는 그만 거품을 물고 새파랗게 까무러쳤습니다.
당황한 아버지는 아이를 업고 집에 달려와 방에 눕히고 팔다리를
주무르고 코를 빠는 등 모든 방법을 썼는데도 아이는 끝내 죽어 버렸어요.
참 기막힐 노릇이지요.
사람의 목숨이 숨 한번 쉬는 데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허망할 수가 있는가..
늘그막에 얻은 자식을 졸지에 잃었으니 그 쓰라린 심정이 오죽했겠어요.
또 집에 돌아온 아내는 죽은 아이를 보고 더 울고 불고 난리가 나 버렸습니다.
---"이놈의 영감, 어쩌다 멀쩡한 아이를 죽였소, 응?
아이가 무얼 달라고 하면 돌멩이라도 집어 줘야지"하고
----남편을 때리고 꼬집고 이빨로 물어 뜯고 발악을 합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아이가 갑작스럽게 ----"저 것 줘" 하고
---발버둥 치던 것이 괴이하게 생각되어 곰곰이 생각합니다.
여자는 여자대로 자식 잃은 슬픔에 몇 날 며칠이고 식음을 전폐하고
울고불고 날리를 치고, 남자는 남자대로 아이의 갑작스런 죽음이
괴이하게 여겨져 도대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가 남자의 등짝을 뻥 차면서 아이를 살려내라고
고함을 치는 소리에 그만 번쩍 확철대오하게 깨달아 버렸어요.
깨닫고 보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빈주먹입니다.
그러나 비록 빈주먹이지만 이 사람이 손바닥을 펼 때마다 향기로운
천만 송이 꽃들이 훨훨 떨어져서 수 많은 중생들을 정토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백만 대금을 주는 것도 일체 병고를 고치는 것도
무수한 액난을 물리치는 것도 이 빈주먹입니다.
또 이 사람이 깨치고 나서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니
자기 아들하고는 전생에 함께 수행하던 좋은 도반이었어요.
저 깊은 산속에서 청정무구한 도를 닦는 수좌로 정진을 하고 있는데
어떤 보살이 이 둘을 지성으로 시봉했어요.
양식도 가져오고, 과일도 올리고, 옷도 지어다 주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보살이 두 스님을 공평하게 시봉을 해야 하는데,
그만 분별심을 내서 얼굴이 반듯하고 미남인 스님에게는 좋은 과일과
좋은 옷을 주고 그렇지 못한 스님에게는 소홀히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를자꾸 하다 보니 이 보살이 미남 스님에게 자꾸 마음이
쏠리는 거예요. 그 스님 또한 이 보살의 정성에 자꾸 마음이 이끌리는데,
이것이 모두 상대적인 인간 세계의 인정이 아닙니까?
결국에는 다음 생에 태어나서 전생의 인연으로
이 보살과 스님은 부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공부를 해야 할 사람들이 부부가 되었으니 가정이 평탄할리가 없지요.
그 가운데에서도 자식이 없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공부하던 못생긴 스님은 열심히 정진해서 도를 성취했어요.
이렇게 도를 이루고 나서 어디에 가서 중생을 제도할까 하는데,
마침 전생에 같이 공부하던 도반이 자식이 없는 것을 알고
이들 부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어요. 이 자식이 바로 금옥입니다.
그리고 금옥이는 자기의 부모를 고통으로 몰고가서 끝내는 깨닫게 만든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버리더라도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의심을 궁구해 나가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하는 데는 간절한 마음이 제일입니다.
선지식을 만나서 화두에 커다란 의심을 일으키고 또한 그 의단을 끝까지
이어갈 대분심(大忿心)이 필요한데 이것은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선문에서는 화두의 길에 간절하다는 뜻인
'절'자가 가장 유럭한 도반이라고 말합니다.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해태심이 생기고, 해태심이 생기면
방종한 생각이 구름같이 일어나 이 몸을 이리저리 끌고 다닙니다.
한 번 이런 해태심이 일어나면 공부의 길에서는 아주 멀어집니다.
오직 화두를 정수리에 달아 두고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가
외자식을 잃은 뒤에 자식 생각 간절하듯이 한 생각으로 공부를 지어야 합니다.
입산게(入山偈) 높은 산 험한 물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애써 이 곳까지찾아 온 것은 무엇 때문인가?
결정코 이 일단사(깨달음)를 밝히고자
손가락을 태우고 분향하면서 계(戒)와 원(願)을 세웠도다.
나는 오늘부터 10년을 기약하고다시는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오로지 정진하리니 만약 본가(本家)의 업(業)을 밝히지
못한다면 천상을 돌아다닌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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