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설(薛)씨. 원효는 법명,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 (新幢). 압량(押梁 :
지금의 慶山郡) 불지촌(佛地村) 출신.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
648년(진덕왕 2) 황룡사에서 중이 되어,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650년(진덕여왕 4)에 의상 과 함께 당(唐)의 현장과
규기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
10년 뒤, 다시 의상과 함께 해로를 통하여 입당
(入唐)하기 위하여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지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후, 655년에서 660 년 사이에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 실계(失戒)의 사실이
오히려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계 후,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광대들이 무롱(舞弄)
하는 큰 박을 본 따 무애(無碍)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인데, 그 노래를
<무애가(無碍歌)>라 불렀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친 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여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어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고, 혹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祠堂)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는 또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는 등
대중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하 여 가난뱅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 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일생은 화쟁의 방법에
의하여 자리(自利)를 구하고 대중교화를 통하여
이타(利他)를 행함으로써 석가 이후 '
상구보리 하화중행' 으로 대표되는 불타의
참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나 <대승기신론소>
등에서 볼 수 있는 일심사상 (一心思想) ·
무애사상(無碍思想) ·화쟁사상(和諍思想) 등은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이론을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공헌하였으며,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시키려 한 대 저술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
일생을 참선과 저술, 대중교화에 힘쓰던 그는,
686년(신문왕 6)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나이 70세, 법랍 38세 로 입적하였다.
뒤에 1101년(고려 숙종 6)에 대성화정국사
(大聖和靜國師)라 시호했다.
저술은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3권·
<금강삼매경론(金剛三 昧經論)>3권·
<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 <유마경소(維摩經疏)>3권·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3권·
<범망경소(梵網經疏)>2권·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2권·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1권·
<섭대승론소(攝大乘論疏)>4권·
<대승기신론종요(大乘起信論宗要)>1권·
<초장관문(初章觀文) >2권·
<반주삼매경소(般舟三昧經疏)>1권·
<아미타경소(阿彌他經疏)>1권·
<무량수경소(無量壽經疏)>1권·
<삼론종요(三論宗要)>1권 등 9부 240여권에 달한다.
이는 양으로도 남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하여
당나라의 석학들이 그의 저술을
'해동소(海東宵)'라고 칭송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