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흥법사(憬興法師)
(생몰년 미상)
삼국통일 전후 신라의 고승. 성은 수(水)씨.
웅천주(熊川州) 사람이다.
18세 때 출가하여 삼장(三藏)에
통달하고 이름을 신라 전역에 떨쳤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확실한 전기가 전하지
않으므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삼국 유사>의 경흥우성조(憬興遇聖條)에
간단한 전기와 일화가 전한다.
이에 의하면 경흥은 신라 신문왕대(681∼691)의
사람으로,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이 후
그의 만년에 이르러 장차 승하하려 할 적에
태자 신문(神文)에게 이르기 를 "경흥법사를
국사로 모시는 것이 좋으니 명을 잊어서는
안되다"라고 고명 (顧命)을 하였기 때문에
신문왕이 즉위하자 곧 국로(國老)로
봉하여졌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문무왕이
경흥을 국사로 봉하라고 하였으나 고명을 받은
신문왕이 경흥을 국사로 봉하지 않고 국로로
모시게 된 데에는 경흥이 백제 의 옛 땅인
웅천주 출신이었다고 하는 신분적인
제약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고도 한다.
그에게는 이적(異蹟)이 여러 번 있었다.
삼랑사(三郞寺)에서 병을 얻어 한달 동안
고통을 받고 있었을 때, 한 여승이 찾아와서
법사의 병이 우로(憂勞)의 소치이니 약으로
치료할 수는 없고 희락대소하면 치유된다고
하면서 11가지 모습의 가면을 만들어 기이한
춤을 추었다. 그는 춤사위의 괴이한 모습을 보 고
웃다가 병이 감쪽같이 치유되었다.
이때의 여승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 다고 한다.
또, 법사가 말을 타고 왕궁에 들러가려고 했을 때
모습이 남루한 승려가 석장의 끝에 삼태기를
짊어지고 와서 하마대(下馬臺) 위에서 쉬고 있었다.
그 삼태기 속에는 썩은 냄새가 나는 마른 고기가
들어 있으므로 시자 가 "스님의 몸으로서 어찌하여
탁한 물건을 가지고 있소?"하고 질책하였더 니,
그 승려는 태연하게 "산 고기를 두 가랑이 사이에 끼고
다니는 것은 어 느 것이 더한 것인가."하고 떠나버렸다.
이에 경흥은 자신이 말타고 다님을 훈계한 것이라
깨닫고 다시는 말을 타고 다니지 아니하였다고 하며,
그때의 승려는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무량수경연의술문천(無量 壽經連義述文贊)>3권,
<삼미륵경소(三彌勒經疏)>1권,
<금광명최승왕경약찬 (金光明最勝王經略贊)>5권과
현재 전하지 않는 <법화경소(法華經疏)>16권,
<열반경소(涅槃經疏)>14권,
<열반경술찬(涅槃經述贊)>14권,
<무량수경소(無 量壽經疏)>3권,
<관무량수경소(觀無量壽經疏)>2권,
<아미타경약기(阿彌陀經 略記)>1권,
<관정경소(灌頂經疏)>2권,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5권,
<사분 율갈마기(四分律?磨記)>1권,
<구사론초(俱舍論초)>3권, <성유식기(成唯識 記)> 2권,
<현양론소(顯揚論疏)>8권, <대승기신론문답>1권,
<법원의림기(法 苑義.林記)>4권,
<미륵성불경고적(彌勒成佛經古蹟)>3권 등이 있다.
그는 신 라 3대 저술가 중 1인으로서,
신라불교를 체계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고승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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