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상식

평생 청빈과 무소유를 보여 주신 서암큰스님

갓바위 2015. 7. 4. 04:51
 평생 청빈과 무소유를 보여 주신 서암큰스님 
무소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가질 수 있지만 다 나누어 
주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탁해져 가는 세월, 평생 무소유를 
몸소 보여 주신 서암선사는 청빈 그 자체셨지요.
"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열반송을 묻는 제자들의 간청에 던진 이 유훈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대중 100여 명이 사시사철 정진하는 
오늘의 봉암사를 만드신 서암스님의 
일장을 자세히 소개 합니다. 
말년에 걸망하나만을 지고 훌쩍 떠나셨던 
그 모습이 선하기 때문인데, 태백산의 
無爲精舍에서 하시던 말씀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 있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하실 때도 넉넉하셔습니까?"
"암, 그랬지. 난 없으면 쓸 생각을 안 하거든"
서암큰스님의 행장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현대불교신문에서 전제)  
정말 나는 걸망하나 지고 
훌훌 떠날 수 있는가를 살펴보며.
우연히 산에 올랐다가 문득
 스님이 되고픈 소년이 있었다.
 “스님, 저도 절에서 살고 싶어요.”
 “중노릇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다.” 
그래도 소년은 끊질기게 스님에게 
매달렸고 드디어 허락을 받는다.
 3년 동안 절에서 머슴살이하는 조건으로. 
이리하여 서암 스님은 불가와 인연을 맺는다. 
1914년 경북 영주에서 나신 서암 스님은, 
1935년 예천 서악사에서 화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8·15광복 전에는 금강산 일대의 제방을 
두루거쳤고, 철원의 심원사에서는 
강사 소임을 맡기도 했다. 
이후 조계종 총무원장,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봉암사 조실을 거쳐 조계종 제8대 종정을 지냈다. 
2003년 3월 29일 오전 7시 50분경 봉암사 
염화실에서 열반에 들었다.
 세수 87세, 법랍 68세. 
서암스님은 원적에 들기 하루 전 
태고선원을 비롯한 봉암사 대중 1백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달리 할 말이 없다. 
누가 (열반송을)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라고 말한 뒤 
염화실로 돌아와 29일 오전 입적에 들었다. 
행장(略譜) 
1917년 10월8일 경북 안동군 녹전면 
구송리에서 아버지 宋東植님과 어머니 
申東卿님의 5남1 녀중 삼남으로 탄생. 
본명은 홍근(鴻根). 부친의 독립항쟁으로 
참담한 유랑생활 도중에서도 마을 서당과 
단양의 대강보통학교, 예천의 대창학원
 등에서 한학과 신학문을 修學, 
그 영민함으로 '천재소년'으로 불리워짐.
1932년(16세) 경북 예천 서악사 (西嶽寺)에 
출가, 3년간 머슴과 같은 고된 행자생활. 
1935년(19세) 경북 문경 금룡사(金龍寺)에서
 화산(華山)스님을 恩師로, 낙순스님을 
계사(戒   師)로 사미계(沙彌戒)를 수계(受戒) 
법명은 홍근(鴻根). 수계후 김룡사 강원에서 수학
1937년(21세) 금룡사에서 금오(金烏)선사를
 계사(戒師)로 비구계(比丘戒)와 보살계(菩薩戒)
를 수지(受持). 대덕법계(大德法戒)를 
품수(稟受). 법호를 서암(西庵)으로 받음.
1938년(22세) 김룡사 강원을 졸업하고 
독학으로 日本大 종교학과 입학.
1940년(24세) 당시 사형선고와 같은 
폐결핵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귀국.
1941년(25세) ‘세상에서의 마지막 봉사‘라는 
생각으로 각혈을 하면서도 대창학원에서 
학생 들을 지도.1942년(26세) 죽음만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헛되다고 돌이키시고, 
‘이제부터 생사의 근본 도리를 놓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시고 금룡사(金龍寺) 
선원에 안거.
1943년(27세) 북쪽으로 만행중 철원 심원사
(深源寺)에서 1년간 화엄경을 강의.
1944년(28세)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에서
 하안거. 대승사(大乘寺) 바위굴에서
 성철(性徹)스님과 함께 동안거.
1945년(29세) 대승사(大乘寺)에서 
청담(靑潭), 성철(性徹)스님과 하안거.
해방을 맞아 예천의 대승사 포교당에서 징병, 
징용당하여 죽음의 땅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는 보살행을 
실천함과 동시에 불교 청년운동을 전개.
1946년(30세) 계룡산 나한굴(羅漢屈)에서 
단식하며 용맹정진 도중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한갓 공허한 그림자처럼 사라짐. 덕숭산 
정혜사(定慧寺) 만공(滿空)스님 회상에서 안거
1947년(31세)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효봉(曉峰)스님 회상에서 안거
망월사(望月寺)에서
 금오(金烏)스님을 모시고 동안거
1948년(32세)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금오(金烏)스님를 모시고 ‘공부하다 
죽어도 좋다’는 서약서를 쓰고 
도천(道川)스님등과 함께 결사정진.
1949년(33세) 광양 상백운암(上白雲庵), 
보길도 남은사(南隱寺)에서 금오(金烏)
스님을 모시고 정진.
계룡산 사자암(獅子庵)에서 
금오(金烏)스님을 모시고 정진.
계룡산에 정진굴(精進窟)을 짓고 동안거
1950년(34세) 계룡산 정진굴(精進窟)에서 하안거. 
상원사(上院寺) 한암(漢岩)스님 회상에서 동안거
1970년(54세) 원적사(圓寂寺)에 다시 주석.
구산선문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조실(祖室)로 추대되시었으나 고사(固辭)하시고
 선덕(禪德)소임을 자청하여 원적사를 오가시다가, 
1979년 이후부터 조실로 계시면서 승풍을 
바로 잡으시며 낙후된 가람을 새롭게 중창, 
조계종 종립선원으로 제정하여 선풍을
 드날리며 납자(衲子)들을 제접(提接)하심.
1975년(59세) 제10대 조계종(曹溪宗) 
총무원장(總務院長)을 2개월 동안 역임.
1991년(75세)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1993년(77세) 제8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
1994년(78세) 종정직과 봉암사(鳳巖寺) 
조실을 사임하시고 거제도, 삼천포, 팔공산 
등지를 거쳐서 태백산 자락에 가건물을 
지어 무위정사(無爲精舍)라 이름하고 
무위자적(無爲自適)하심.
2001년(85세) 봉암사 대중의 간청에 
의하여 8년만에 봉암사 염화실로 
다시 돌아와 한거(閑居)하심.
2003년(87세) 봉암사 염화실에서 
3월 29일 오전 7시 50분 무렵에 열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