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 어둠속 등불

호국팔만대장경

갓바위 2020. 8. 29. 07:36
호국팔만대장경 

고려는 8만대장경 즉「고려대장경」을
완성함으로써 일대국난을 이겨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문화유산을 오늘에 남기는 바가 되었다.

고려대장경 최조판이 침략해온 몽고병사에 의해
소실되고 다시 오랑캐의 침입을 받게되자

이예 임금(고종)은 발원하되 고려대장경은 나라와
이 겨레를 수호하는 수호신(守護神)의 구실을 하였으며,

또한 우리 민족의 문화성을 너무나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니 이에 읽힌 비화(祺謠)가 적지 않다.

팔만대장경판 조성과 삼목구(三目狗) 고려 때이니
합천(陝川) 땅에 지금의 면장과 같은 소임을 맡고 있는

이거인(李居仁)은 생활이 곤궁했으되, 청렴·
정직하고 순후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느날은 몸은 누런털에 검은 줄이 나타나
머리 모양은 개이고 눈은 세 개인 짐승이 있어

괴이했지만 영특하니 이거인을 따르는지라
아끼며 3년동안 같이 지냈으나 그만 죽어버렸다.

그 후 3년뒤 거인도 별안간 죽게 되어 저승에 오게 되었는데,
염라국에 채 가기전에 어떤 나라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만나니 삼목대왕이 있는지라, 삼목대왕은
거인을 보더니 주인님이라 하며 매우 반겼다.

지난날 키우던 짐승임을 알고 거인도 반가워 하니
삼목대왕은 염라대왕에게 가서 팔만대장경판을
조성해야 한다고 이르라 하였다.

후에 염라대왕을 만나 삼목대왕이 이른대로 하니
염라대왕은 거인을 다시 지상세계로 보내며 업을 이루라 하였다.

이에 다시 삼목대왕이 내려와 임금에게 말해
거인을 시켜 팔만대장경판을 조성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삼목귀왕이 자의로 한 것이 아니라
염라대왕이 삼목귀왕을 시켜서 장경불사를 조성케
한 것이라는 전설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또 6·25때도 해인사에 포탄을 떨어뜨리자는 말이 무수히
많았으나 비록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민족공유의 문화유산에는 적도 우군도 없이
숙연해져 폭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불교의 전통은 호국불교에서 찾을 수 있고
사람들의 안심 입명을 도모한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거니와 가야산록에 말없이 자리하고 있는 고려대장경은
겨레의 영원한 보배로서 길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설화내용]

고려 태조 왕건은 그가 지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부처님이 보호하여 지키는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였거니와 고려는 8만대장경 즉「고려대장경」을
완성함으로써 일대국난을 이겨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문화유산을 오늘에 남기는 바가 되었다.

고려대장경 초조판이 침략해온 몽고병에 의해 소실되고 다시
오랑캐의 침입을 받게되자 이예 임금(고종)은 발원하되

「대장경도 한가지요, 선후의 조각도 한가지요, 군신상하가
다 같으니 오랑캐는 어찌 아니 물러가리오.」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려대장경은 나라와 이 겨레를 수호하는
수호신(守護神)의 구실을 하였으며,

또한 우리 민족의 문화성을 너무나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니 이에 읽힌 비화(祺話)가 적지 않다.

팔만대장경판 조성과 삼목구(三目狗) 고려 때이니
합천(陝川) 땅에 지금의 면장과 같은 소임을 맡고 있는

이거인(李居仁)은 생활이 곤궁했으되,
청렴·정직하고 순후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느 해 가을에 나라의 조세를 독촉하기 위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부락을 돌아다니다가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짐승 한 마리와 마주쳤다.

거인이 놀라서 자세히 살펴보니 몸은 누런 털에
검은 줄이 나타난 호랑이나 사자같이 생겼는데

귀와 머리 모양은 개였다.그런데 불이
번쩍거리는 눈이 그 위에 세 개가 붙어 있다.

그야말로 괴상한 동물이다. 늑대 같으나
늑대도 아니요 호랑이 같으나 그것도 아니다.

그런 짐승이 거인(居仁)을 따라온다.
거인은 겁이 나서 몸이 오그라졌다.

피할 도리도 없고 하여 무서운 것을
억지로 참으며 태연스럽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짐승도 거인을 뒤따라서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다.「무슨 저런 짐승을 데리고 왔소?」

이것을 본 부인이 물었다.「나도 모르겠소.」
「모르다니요. 데리고 들어오면서 모른다면 말이 돼요?」

「그게 따라왔지, 내가 데리고 온 것이 아니오.」
거인은 이렇게 말하고 용기를 내어 그 짐승에게 나가라고
몽둥이로 때렸더니「껑 껑 껑 !」하는 개 소리를 한다.

보통 울적에도 개와 같이 짖으며 내물아도
나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이름을 삼목구

(三目和)라고 부르면서 집에서 기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삼목구는 동네에서 왕개였다.

동네 개들이 이 개만 보면 겁을 먹고
감히 가까이 하지를 못하고 피하여 간다.

그것은 이 개가 사납게 생긴 까닭이리라.
그러나 이 개는 주인에게만은 다시없는 충견이었다.

주인이 부락 출장을 가면 이 삼목구가 5리나 10리길을
쫓아 나와서 전송하여 주고 또 돌아올 때는 어떻게

알았는지 5리나 10길을 쫓아 나와서 먼저 기다리고
있다가 꼬리를 흔들며 반가이 영접하고 앞서는 것이다.

그러더니 어느 해 갑자년에 이 삼목구는 병든 사이도
없이 날마다 해만 바라보더니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다.

주인이 불쌍하게 여기고 관을 짜서 시체를 거두어 깨끗한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제문을 지어 읽어주는 정성을 보였다.

그 후 3년이 지나서 병인(丙寅)년 겨울10월에
거인이 앓지도 않고 별안간에 죽었다.

거인이 저승을 갔는데 염라국을 채 못가서 사자가
이끄는 대로 어떤 나라의 대궐에 들어가서 임금을
찾아보니 대왕이 용상에 앉아 있는데 눈이 셋이었다.

그 대왕이 머리에 5봉관을 쓰고 손에는 보배 홀(忽)을 들어
곤룡포를 입은 위엄이 등등하게 떨쳐 있는데

좌우에 종관이 늘어서 있고 우두마면
(牛頭馬面)의 사자들이 삼엄하게 호위하였다.

거인이 뜰앞에 국궁하여 읍하고 서 있으니 삼목(三目)
대왕이 당하에 내려와서 거인의 손을 반가이 잡으며
「주인님이 어찌하여 이런 곳을 오셨습니까?

내가 세상으로 귀양 갔을 때에 당신의 집에 가서
3년 동안을 신세 지고 귀양살이가 풀려서

복위되어 이렇게 와 있으나 주인님의
신세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사옵니다.

당신의 은공을 어찌 한시인들 잊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뵈오니 반가운 마음 비할 데가 없나이다.」

하면서 거인의 손목을 끌고 당상에 올라가서
좋은 의자에 앉히려 한다.거인도 이때에
과거사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대왕이 그렇게 귀양을 오시느라고
내 집에 오신 것을 모르고 보통 개짐승으로 취급을

하여 황공하온 마음 가눌 길이 없사옵니다.」
「천만의 말씀을 무슨 귀양살이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지금 염라대왕께 잡혀 가는 길인데 본시부터
배운 것이 없어서 염라대왕이문초할 때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런지 알 수가 없사오니 어떻게
하면 좋으리까. 가르침을 바라나이다.」

「그것 좋은 말이오. 염라대왕에게
가거든 내가 이르는 대로만 말하시오.」

하고 그 대답할 내용을 말하여 준다.
거인은 공손히 청명하고 염라국으로 들어갔다.

염라국은 그 으리으리한 폼이 삼목왕 나라에 비할 것이 아니다.
대결도 갑절이나 크고 판관도 많고 사자와 옥졸도 무수히 늘어서 있다.

염라대왕은 드높은 의자에 않아서 문초를 한다.
「저 백성은 어디서 온 누구인가?

인간으로 있을 때에 무슨 일을 하다가 이곳으로 들어 왔느냐?」
「소인은 경상도 합천에 사는 이거인이 올시다.
소인은 이서(里胥)라는 직으로 부락 일을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직무에 바빠서 뚜렷한 선행을 지은 것이
없사오나 큰 죄도 지은 일이 없다고 아뢰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원통한 것은 제가 하고 싶은
큰일을 다 이루지 못하고 온 것이 한이 됩니다.」
「해보고 싶은 큰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일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소인이 듣건대 부처님이
설하신 팔만대장경은 천상천하에 가장 높은 보배라

하옵기에 이것을 나무판에 새겨서 세상에 오래 전포하면
불법이 널리 유포되어 혼미한 죄악에 빠진 중생을

모두 다 건져 낼 것인데 이 중대한 사업을
이루려다가 성취하지 못하고 온 것입니다.」

거인의 이 말을 들은 염라대왕은 감탄하고 자리에 일어나서
계하로 내려와 거인에게 읍하고 거인을 전상으로 이끌고 가서

극구찬양하고 이러한 대보살을 모르고 여기까지 잡아
오게 하여 미안한 일이라 하며, 곧 판관을 불러

거인 이름을 명부 호적에서 지워버리고 빨리 인간계로
호송하여 큰 불사를 이루게 하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거인은 염라대왕에게 하직 인사를하고
삼목대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더니 벌써 자리를
배설하고 있었다.거인이 삼목왕과 환담을 나누고

「소인은 대왕이 시키는 대로 염라대왕에게 사뢰어서
이렇게 놓여나오기는 하였습니다만,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하오리까?
거짓말이 되지 않도록 하여 주소서.」
하였더니 삼목대왕이 부탁하되

「주인님은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집에 돌아가서
좋은 종이 한권을 구하여 책을 만들고 그 표지에

<팔만대장경판 조성권선문>이라 쓰고 합천 군수에게
말하여 관인을 적어서 집에 두고 내가 나갈 때까지 기다리시오.
내가 오래지 않아서 인간을 순찰할 일이 있을 것이오.」한다.

거인은 이 말을 듣고 섭섭하게 삼목대왕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찰나에 죽었던 몸이 다시 깨어나는 것이었다.

꿈을 꾸다가 깬 것과 같이 저승에 갔다 온 정경이 역력히 생각난다.
그래서 거인은 삼목왕이 시킨 대로 좋은 장지 한권을 마련해서

책을 만들고 <팔만대장경판 조성권선문>이라고
표지에 쓰고 합천군수에게 저승갔던 일을 얘기하고
관인을 적어 보관하고 있었다.

이 때에 고려왕에게는 두 공주 자매가 있었는데
모두 위급한 병에 걸려서 앓고 있었다.

전의를 불러서 약을 써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그런데 큰 공주가 귀신 들린 것처럼
헛소리를 하더니 부왕에게 말하기를

「아바마마 대왕이시여. 왕의 딸인 공주의 병을
고치려거든 급히 팔만대장경판 조성의 화주를 찾아서
맞아들이도록 국내에 조서를 내리소서.

만약 나의 말을 거역하면 왕의 딸을 저승으로
잡아가고 말 것입니다.」한다.

왕은 이 말에 깜작 놀라서 조서를 내렸더니, 이 일을
잘 알고 있는 합천군수가 이거인을 천거하여 왕도로 보냈다.

거인이 대궐문 밖에 이르러서 사유를 말하였더니 수문장이
거인을 대궐 안으로 안내하고 사유를 주달한다.

이 말을 들은 공주가 곧 일어나 앉아서
「잘 오셨습니다. 팔만대장경 판각 화주처사님이시여,
그간에 아무런 신병이나 없었나이까?

나는 삼목귀왕인데 주인님과 같이
약속이 있었기로 이 곳에 이르렀나이다.」
하고 공주가 다시 부왕을 보고 말하기를

「대왕이여, 들으소서. 나는 저승의 삼목귀왕인데
이 화주 처사가 저승에 왔을 때에 팔만대장경을 판가하여

모시고자 약속한일이 있어서 서로 인간에 나가서
만나 보기로 하고 이곳에 온 것이니 대왕은 큰 시주단월이
되어서 이 장경불사를 시작함이 어떠하겠소?

만일 그리한다면 이 두 공주자매의 병이 나을 뿐만 아니라
외적이 물러가고 국가가 태평할 것이요, 왕실이
번창하고 왕족이 수명 장수하여 천수를 누릴 것입니다.

나는 이 일을 굳게 부탁하니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물러가겠소.」
「아버지, 저승인 명부세계에서도 대장경에 대하여

이토록 좋은 일로 알고 판각을 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이 세계에서 이것을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서 서둘러 불사를 이루도록 하소서‥‥」한다.

그래서 왕은 왕실의 친용금 중에서 수만냥을 희사하고
기술자인 양공(良工)을 불러서 거제도에 있는 재목을 운반하여
해인사에 옮기고 사간판(寺刊板)의 장경을 조성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것이 아주 본분은 못 되었어도
수백권을 조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삼목귀왕이 자의로 한 것이 아니라
염라대왕이 삼목귀왕을 시켜서 장경불사를 조성케
한 것이라는 전설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나. 문화재(次化財)와 인명(人命)

고려대장경에 얽힌 3목구의 전설과는 달리 전화(戰火)
속에서도 이 대장경을 수호할 수 있었으며

또한 인명을 구제할 수 있었던 실화(實話)가 있다.
즉, 6 ·25 는 문자 그대로 처절한 것 이었다.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고 백성들을 전란 속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고려대장경이 조성되었던 것과는 달리

6·25는 동족간의 싸움이었던 만큼 그 상흔(傷痕)의
아픔은 어찌 피아가 있을 수 있으랴.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서도 그 전화(戰禍)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가야산(伽倻山)에 자리한 해인사

(海印寺)이고 보면 부처님의 가피(加被)요,
우리 선인들의 뜨거운 불이라 하겠다.

이때(1950) 해인사 가야총림(伽揶叢林)의 원주이던
이법홍(李法弘)화상의 수기 「간문역정-幹門瀝程」
에는 다음과 같이 그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이효봉(李曉峯)대종사를 조실로 하여 기도법사
인곡(麟谷)화상은 장경각(藏經閣)에서 <국태민안·남북통일>의

천일기도를 올리고 있었으며 이에 50여명의 운수납자
(雲水納子)는 자성불(自性佛)을 찾아 보리도량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였으며 이미 남단의
일부만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산군에 침멸 되어 있었다.

이때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연합군은 공산군의 집결처를
정찰하고 맹렬한 폭격을 가하고 있었으므로 가야산 부근에
머물고 있던 공산군은 해인사로 피신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때 이효봉은 여기는 겨레의 보배 8만대장경을 모신 곳이다.
이 신성한 곳에 군인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 모두의 목숨과도 바꿀 수없다는 부동의 자세를 보였다.
이 문화재야말로 주의나 주장을 초월하는 것이니 물러가라고 호령하였다.

처음에는 좀처럼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던 공산군들도 효봉스님의
말에 감동하였음인지 마침내 그들은 산속으로 피했다는 것이다.

비록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민족공유의 문화유산에는
적도 우군도 없이 숙연해지는 모습이더라고 하였다.

그런데 미공군이 해인사에 밀려드는 공산군을 포착하고도
공격하지 않은 데는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 미공군은「저 사찰 일대의 공산군을 네이팜과 폭탄으로 공격 하라.」
는 훈령이 빗발치듯 하였다는 것. 그러나 이때의 전투비행단

작전참모와 폭격지휘관이던 한국장교들에 의해
공격목표를 우회해서 다른 곳을 폭격케 하였다고 한다.
뒤에 이들 장교는 미군장교에게 말하되

「이 사찰은 몇 명의 공산군의 목숨과 바꿀 수 없는
<8만대장경>이 소장되어 있는 국보사찰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2차대전 때 <프랑스 파리>나 <
일본의 경도지방>을 폭격하지 않은

그 사실을 기억하신다면 알 것입니다.」
라고 엄숙하게 말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한국불교의 전통은 호국불교에서 찾을 수 있고 사람들의
안심입명을 도모한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거니와

가야산록에 말없이 자리하고 있는 고려대장경은
겨레의 영원한 보배로서 길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호국팔만대장경 >

복 받는날 이루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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