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 인도의 한 마을에 바라문이 살고 있었다.
그 바라문에게는 목소리가 고울 뿐만 아니라
갸름한 얼굴에 코와 눈이 알맞게 자리 잡힌 예쁜 외동딸이 있었다.
웃으면 콧잔등까지 예쁜 미소가 조롱조롱 맺히는 상큼한 매력을 지닌 딸이었다.
바라문은 이 외동딸을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길러
이웃 마을에 있는 바라문 가문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이웃 마을로 시집간 바라문의 딸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신랑은 오로지 아내만을 사랑했으며,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도 며느리를 아껴주었다.
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꿈결 같은 세월이었다.
그런 가운데 바라문의 딸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고, 몇 년이 지나자 또다시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러니 집안에서는 웃음꽃이 끊이지 않았다.
바라문의 딸은 '임금님도 나보다는 더 행복하지않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바라문의 딸이 둘째 아이를 가졌을때, 시어머니가 병석에 눕더니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자상하기 그지없던 시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부모의 장례식을 치른 며칠 뒤 바라문의 딸은 해산달이 가까워지자 남편과 함께 친정집으로 가게 되었다.
친정집으로 가는 길은 험한 산길인지라 군데군데 나뭇가지가 걸리고
바닥이 패이고 돌이 솟고 게다가 굽이굽이 개울물이 흐르는 데를 지났다.
산길을 벗어나니까 인적이 없는 강 기슭이 나왔는데, 이때 갑작스레 바라문의 딸은 산기를 느끼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인가를 찾아보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어 그만 강기슭에서 아기를 낳고 말았다.
아이를 낳을때는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 해마저 저물어 강을 건너갈 수 없게 외었다.
그래서 부부는 강기슭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피곤한 심신을 달래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바라문의 딸은 으스스한 찬 기운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강을 건너기 위해 옆에 누워 있던 남편을 흔들어 깨웠지만 남편은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발목이 까맣게 된 것으로 보아 독사에게 물려 죽은 것이다.
바라문의 딸은 큰소리로 을부짖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이들 울음소리에 바라문의 딸은 다시 눈을 떴다.
하지만 출산 후의 아픔과 독사에 물려 죽은 남편 생각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망연자실 누워만 있던 바라문의 딸은 남편의 주검을 묻기 위해서라도 한시바삐 강 건너 친정집으로 가야만 했다.
그녀는 큰 아이를 등에 업고 갓난아이는 품에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있는 힘을 다해 강가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녀의 힘으로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생각 끝에 그녀는 큰아이는 내려놓고 갓난아이를 안고 강을 건너가서 잔디밭에 누이고
다시 강을 건너와 큰아이를 데려가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먼저 갓난아이를 안고 강을 건너갔다.
잔디밭에 갓난아이를 눕혀놓고 나서 강 저쪽을 보니까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큰 아이가 엄마를 보고 아장아장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놀란 나머지 큰소리로 외쳐댔다.
"아가야, 오지마! 아가야, 오지 마!"
그녀의 외침 소리를 어서 빨리 오라고나 한 줄 알고, 아가는 자꾸자꾸 깊은 강물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그만 세찬 물살에 휩쓸려 저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다.
"아이고, 우리 아가야!...아가야!"
부리나케 강을 건너와 울부짖고 뒹굴어 보았지만 떠내려간 큰 아들은 돌아올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저쪽 강가 잔디밭에 누인 갓난아이가 생각나 강 건너를 보았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끔찍한 일이란 말인가! 수십 마리나 되는 늑대떼가 몰려들어
갓난아이에게 차마 눈뜨고 못 볼 짓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아이고, 어머니! 우리 아기! 우리아기!..."
그녀는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허겁지겁 그녀는 다시 강을 건너갔으나 갓난아이를
뼈 한조각까지 다 없앤 늑대 떼들은 입맛을 다시며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바라문의 딸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음날 낮에서야 정신이 깨어난 그녀의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남편과 두 아이를 따라 죽지 않고 자기 혼자만 살아 있다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그녀는 독사가 다시 와서 남편처럼 자기 발도 물어주기를 바라며 풀숲에 계속 누워 있었다.
그러나 하루낮, 하루 밤이 지나가도 새끼 독사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때, 문득 그녀는 친정 부모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걷다 기다하면서 겨우겨우 고향 마을에 당도했다.
그런데 친정집은 불타 버리고 잔재만 남아 있었다. 다시금 그녀는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웃사람이 들려 준 말에 의하면 갑작스레 불이나서 가족 전부가 불에 타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또 기절을 하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마에 찬 물수건이 닿는 느낌에 그녀는 눈을 떴다.
어떤 사내가 그녀를 보살펴 주고 있었다.
갈 곳이 없는 처지가 된 그녀는 그 사내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내는 술만 마셨다 하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바라문의 딸을 마구 때렸다.
손과 발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몽둥이질까지 해대는 바람에 그녀는 만신창이가 되곤 했다.
그녀는 그 사내의 매질을 못 이겨 밤에 도망을 가게 되었다.
이곳 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 거지 신세가 다 되었다.
어느 곳을 지나다 보니 푸른 수풀 속에 거뭇거뭇 보이는 높은 기와집들이 보였다.
그녀는 그 집에 가서 하룻밤 신세를 지자고 했다.
그런데 그 집의 나이 많은 주인이 그녀의 미모를 아깝게 여겨 후처로 들여앉혔다.
거지 신세에서 하루 아침에 부잣집 후처가 된 바라문의 딸은 잘 입고 잘 먹으며 즐겁게 지냈다.
불행은 끝나고 이제는 사람답게 사는가 싶었다.
누가 알았으랴! 그 나이 많은 남편은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덮친데 덮친다고, 그 고을에서는 남편이 숨을 거두면 부인도 함께 땅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이른바 순장 殉葬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라문의 딸은 죽은 남편과 함께 땅에 묻힐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험한 꼴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마침내 남편의 주검과 함께 땅에 묻히는 날이 되었다.

남편의 관옆에 그녀의 관이 놓이고 그 위에 자꾸자꾸 흙이 쌓여갔다.
숨결이 가빠지면서 정신이 희미해져갔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녀는 다시 한 번 죽기 직전에 소생하게 되었다.
부잣집 무덤에 묻힌 물건을 훔쳐내는 도둑의 손에 의해 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 도둑은 살아있는 바라문의 딸을 보더니 이렇게 외쳤다.
"이게 웬 떡이냐! 아니, 웬 꽃 같은 색시냐! 부잣집 물건도 얻고 예쁜 색시도 얻게 되다니!
난 참으로 복이 많은 사내야, 훗흐흐!"
도둑은 바라문의 딸을 자기 소굴로 데려가서 자기 여자로 삼았다.
그녀는 도둑이 훔쳐온 음식과 돈으로 참기 힘든 삶을 영위하며 살았다.
처음에는 도둑의 처로 살아가는 게 치욕스러웠으나,
도둑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 전에 무덤 속에서 싸늘한 시체로
굳어져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살아있다는 게 좋게도 느껴졌다.
한 마디로 도둑의 처로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냈을까.
어느 해 안 여름, 한낮의 뙤약볕 속에 도둑은 패거리들과 함께 큰 고을을 털러 갔다.
그런데 그 고을에서는 이미 도둑떼가 올 줄 알고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도둑 남편은 포졸들에게 붙잡혀 백사장에서 목이 잘려 죽게 되었다.
그녀는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그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송두리째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는 것 같은 전율에 휩싸였다.
"아, 내 팔자는 도둑과도 살 수 없는 기구한 팔자구나!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불행한 여인은 없을 것이다!"
그 날부터 바라문의 딸은 다시 정처 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을 흘러다니다가 그녀는 도가 높은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스님은 바라문의 딸을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떠났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손으로 이마의 땀을 씻어가며
스님의 뒤를 부지런히 따랐으나 한참을 가다 보면 어느새 스님을 잃어버리곤 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가시덤불에 얼굴을 긁히고, 돌부리에 채여 무릎이 깨지며 '스님..., 스님!' 하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스님은 혼잣말로 뭐라 아무 말도 없이 그냥 휙 돌아서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걸어, 밤중도 훨씬 넘어 조각달이 수풀 사이로 비쳐들 무렵,
산봉우리 근처에 자리한 암자에 당도했다.
그 암자에서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키가 작달만한 노스님이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맞아 주었다.
그 노스님은 당대에 최고로 도가 높은 스님이었다.
그녀는 그 노스님 밑에서 뼈를 깍고 살을 가는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녀는 삼생三生을 꿰뚫어보는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됨으로써, 자기의 전생을 알게 되었다.
자기의 전생을 알게 된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며
두 다리와 아래턱을 덜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는 노스님의 두 눈은 쏘아보듯이 빛나고 있었다.

바라문의 딸의 전생은 이러했다.
그녀는 전생에도 어는 부잣집 아들과 결혼했는데, 자식을 낳지못했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은 후처를 얻게 되었으며,
그 후처가 아들을 낳자 그녀는 시기와 질투로 인해 눈이 뒤집혔다.
남편의 사랑은 이미 후처에게만 쏠렸으며, 앞으로 그 많은 재산마저
후처의 아들에게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그녀는 잠이 오지않았다.
그녀는 후처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 잠든 아이의 정수리에 실바늘을 꽂아 버렸다.
그 날부터 후처의 아들은 실바늘이 핏줄을 타고 돌아
젖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고 계속 울어대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그러자 시부모, 후처와 친척들은 본처를 의심하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나는 내가 낳은 아이처럼 후처의 아들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했다고요? 그렇다면 저 하늘로부터 큰 벌을받을 것입니다.
만일 다음 생이 있어 내가 결혼을 한다면 내 남편은 독사에게 물려 죽을 것이며,
내 자식은 물에 빠져 죽거나 늑대 떼에게 뜯어 먹힐 것이며,
내 부모는 불에 타서 죽을 것이며. 내가 만나는 남자마다 비명횡사할 것입니다."
이렇듯이 극도의 말로 변명함으로써 그녀는
전생에서 가족 친지들의 의심과 추궁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한 번 죽음으로써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생, 현생,
내생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게 삶인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현우인연경賢愚因緣經>에 나와 있는 인과 설화다.
<현우인연경>은 송나라 문제文帝 때 혜각, 담화, 위덕, 등 8인이 우뎐국에 가서
큰절에서 여러 법사들이 경經, 론論을 강의하는 것을 듣고 돌아와 들은바를 모두 모아 엮은 것이다.
성현과 범부의 인연사적을 말하여 악한 일은 그치고
선한 일을 행하도록 권하여 불교를 믿는 기회와 인연을 지은 경이다.
자기가 한 번 지은 업은 당대뿐만 아니라 영생을 두고 몸을 바꾸어 가면서 받게 됨을 말한다.
-인연 산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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