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스님 좋은 말씀

지금도 마음 아픈 엿장수 이야기

갓바위 2023. 9. 9. 08:23

 

 

지금도 마음 아픈 엿장수 이야기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어요.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가 없고 말을 더듬는 불구자였습니다.

 

저는 친구 대여섯 명과 함께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습니다. 돈은 서너 가락 치

밖에 내지 않고, 그는 그런 영문을 모른 채 연방 싱글벙글 웃고 있었어요."

그 일이, 돌이킬 수 없는 그 일이 두고두고 스님을 괴롭히고 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강한 엿장수였다면 스님은 벌써 그런 일은 잊고

말았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가 장애자라는 점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채 기억 속에 생생하다고,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스님을 쫓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이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한다.

내가 살아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순박한 사람

선의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하다"고 말씀하시는 스님. 이

말씀은 오래전 법석에서도 두어 번 들은 적이 있다. 늘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아주 솔직한 고백이고 준엄한 자기 심판이시다.

수억, 수십억, 수천억을 도둑질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상에서

엿가락 몇 개 그것도 철모를 때 놀이 삼아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하는 참회는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스님 출가 직후와 맞물리는 내 어린 시절은 전쟁직후라서 상의 군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

구걸을 하거나 노점으로 생계를 잇는 이들이 많았다.

 

다니던 초등학교 근처에도 오른팔에 갈고리를 한 상의 군인 아저씨가

군고구마를 팔고 있었다. 아저씨는 왼손과 오른손을 대신하는

갈고리로 군고구마를 돌려가며 타지 않게 잘 구워냈다.

 

그 아저씨는 다른 군고구마 장수들과는 달리 큰 고구마를 구워 팔지 않고,

요즘에 호박고구마라고 불리는 작고 갸름한 물고구마만 구워 팔았다.

그때는 참 어렵고 배고픈 시절이라. 어른들은 한두 개만 먹어도

속이 든든한 큰 밤고구마를 파는 사람에게 고구마를 샀지만,

 

우리들이 먹기에는 너무 큰 밤고구마보다 한입에 쏙 들어가는 부드럽고

다디단 상의군인 아저시가 파는 물고구마를 더 즐겨 먹었다.

덤도 잘 주실뿐더러, 돈이 없어 다른 아이들이 먹는 걸 바라만 보고 있을 때도

"너도 먹고 싶지? 옜다 하나 먹어보련?"

하면서 하나씩 거저 주는 고마음에 보답하려는 마음도 컸다.

어릴 적 초등학교 한 3,4학년 때쯤 나도 도둑질을 한 적이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만화책을 책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때는 내남직없이 헐벗고 굶주릴 때라 만화책을 사서 볼 엄두를 내지 못할

때여서 '만홧가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만화책을 어디서 구했지?"

 

하면서 어린 마음에도 그들이 몹시 부러웠다.

알고 보니 그 만화들은 만홧가게에서 훔친 것들이었다.

그 말을 처음엔 별생각 없이 들었지만, 만화책을 가진 애들이 너무

부러워 나중에는 '나도 한 번 훔쳐볼까?' 하는 유혹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도 용기가 나질 않아 몇달을 그냥 흘려보냈는데,

그해 겨울, 오랜 망설임 끝에 할머니가 하시는 만홧가게에서

만화책을 훔쳐 스웨터 속에 집어 넣는데 성공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만화방에서 나오려는 데 만화방

할머니가 불러 세우셨다. 태연한 척하려고 애썼지만

가슴은 벌렁거리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냥 도망가까

싶었지만 발바닥이 땅에 딱 달라붙어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평소와 달리 어딘지

어색하고 태도가 다르다는 걸 눈치채고 예의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늘 앉던 자리를 나두고 구석 어두운 곳에 틀어박혀

할머니를 흘끔흘끔 보면서 진땀을 흘리며 만화를 훔쳤던 것이다.

 

너는 그런 애가 아닌데 누가 시켰느냐며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이르시는

할머니 말씀에 화도 나고 창피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뒤로 나는 만홧가게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그 바람에 좋아하던 만화와 인연을 끊게 되었다.

만약 그때 할머니에게 들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만화뿐 아니라 다른 물건도 훔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법정스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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