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어느 날 원효대사가 외출을 했다가 분황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스님이 길을 가로막더니 반갑게 아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반갑구려 원효대사! 대사께서 쓴 글을 읽어 보았는데 깊이가 정말
대단하더군요!" "보잘것 없는 글인데 송구스럽습니다."
"대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저랑 같이 어디 가서 식사라도 하시지요."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 스님은 원효 대사를 데리고 천민이 사는 동네로 향했다.
솔직히 원효대사는 그때까지 천민이 사는 동네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젊은시절 화랑이었을 때는 당연히 갈 이유가 없었고 출가해 스님이 된
뒤로는 공부하느라 갈 일이 없었던 것이다.
스님은 어느 주막집에 이르러 자리를 딱 잡고 앉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어이, 주모! 여기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술상 하나 봐주게나."
그 순간 원효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럴 수가! 수행하는 사람이 술상이라니'
원효대사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곧바로 뒤돌아 나와 버렸다.
"어이! 이보시오. 원효대사!"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해 버렸다.
이때 갑자기 그 스님이 이렇게 외쳤다. "원효 대사, 마땅히 구제해야 할
중생이 지금 여기 있거늘 어디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단 말이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원효는 그 자리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원효는 자신의 공부가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이치는 깨쳤지만 실천이 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원효는 승려들을 가르치던 스승 역할을 그만 두었다. 남을 가르치고 글을 쓰는
대신 머리를 기르고 신분을 숨긴 채 절에 들어가 부목(負木) 생활을 시작했다.
부목이란 사찰에서 땔나무를 마련하는 일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즉 젊은 승려들에게 무시 당하며
땔나무를 구하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절에 꼽추 스님이 있었는데 다들 그 스님을
'방울 스님'이라 불렀다. 걸식을 할 때 아무 말 없이
방울만 흔들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었다.
방울 스님은 공양 때가 되면 다른 스님들처럼 제때에 와서 밥을 먹지 않고
꼭 설거지가 다 끝난 뒤에 부엌을 찾아와 남은 누룽지를 달라고 했다.
"아이참! 저 스님은 꼭 저렇게 늦게 와서 사람을 귀찮게 한다니까"
부목들은 그런 방울 스님을 무시하곤 했다.
하지만 원효만은 방울 스님을 정성껏 모셨다.
하루는 원효가 마루를 닦다가 학승(學僧)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보아하니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공부하면서 논쟁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효가 그 옆에서 들어보니 학승들이 얼토 당토않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원효는 자기 신분을 망각한 채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스님들! 그건 그게 아니라 '.....중략...' 이런 뜻입니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아니, 일개 부목 주제에 어디 스님들
공부하는 데 와서 이러니저러니 아는 체를 하는게냐?"
그제야 자기가 실수했음을 알아차린 원효는 얼른 고개를 숙여 사죄를 했다.
"소인이 뭘 모르고 저도 모르게 아무 소리나 막 튀어나온 모양입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공부 판이 깨진 스님들은 스승을 찾아가서
'대승기신론'이 너무 어려워 이해하기 힘들다며 하소연 했다.
그러자 스승은 원효가 쓴 '대승기신론소'를 건네 주면서 말했다.
"자, 이것으로 공부해 보거라!"
스님들이 그 책을 잃어보니 깊이가 있음에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일개 부목이 한 소리가 그 책에 그대로 적혀 있는 것이었다.
스님들은 이상하다 싶어 부목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원효는 신분이 들통 날 위험에 처하자 몰래 절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대중이 다 잠든 시각 원효 스님은 대문을 살짝 열었다.
그때 문간방에 있던 방울 스님이 방문을 탁 열고는 이렇게 말했다.
"원효, 잘 가시게."
방울 스님의 이 한마디에 원효는 그 자리에서 확연하게 깨달았다.
사실 그 절에 있던 부목과 다른 스님들은 원효 대사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원효대사만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과 공부 수준을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원효대사는 방울 스님을 몰랐지만 방울 스님만은
원효대사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원효, 잘 가시게."
이 한마디로 원효는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자신의 환영을 확 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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