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교리 강좌

다시는 오지 않을 염화미소의 사제

갓바위 2025. 11. 3. 19:53

 

다시는 오지 않을 염화미소의 사제

 

가섭은 부처의 글도 말도 아닌 마음을 받아 선종의 역사에서 한 꼭지점을 이뤘다

길도 없이 산정에 오르는 스승과 주소도 없이 집을 찾는 제자의 일치였다

 

부처와 가섭

 

동무와 스승을 대담하게 일치시킨 인물로 흔히 이탁오(李卓吾)를 들곤 한다.

“스승과 벗할 수 없으면 곧 참된 제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니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승보다 못한 제자는 참된 제자가 아니”라는 발상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식의 뒤집기가 이미 통속적으로 여겨진 지 오래다.

물론 우리 시대는 이미 몇 걸음 더 나아가면서

‘스승은 없다!’는 사정을 돌이킬 수 없이 증명하고 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전통적 관계는 ‘지음(知音)’이라는 박물관적 어휘 속에

온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소리(音)’가 사라진 역사사회적, 인간관계론적, 혹은

매체론적 과정과 연유를 헤아려보면, 거꾸로 스승이 불필요해진 현대의 사정과

그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한때 유행했던 말을 차용하자면, 전래의 ‘음성중심주

의(phonocentrism)’에 대한 문화지식산업적 비판, 혹은 대체가 일상화된 것이다.

 

과거의 학인들에게 공부는 곧 소리내기, 혹은 소리듣기의 문제와 별개일 수

없었다. 연암 박지원은 글의 ‘소리’를 중시했고, 제자인 초정 박제가는

자신의 급진주의적 북학론을 펼치는 중에 ‘소리’를 잊은 글자만의

공부를 부모를 떠난 자식에 빗대면서 비판한 바가 있다.

 

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불교 선사들의 공부길은 흔히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소리’를 매개로 완결되곤 한다: 영운지근(靈雲志勤)은 청소하다가 던진

기와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대오(大悟)하고,

 

청허휴정(淸虛休靜)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우치고

고봉원묘(高峰原妙)는 목침이 침상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대오각성하고, 초석범기(楚石梵埼)는 성루의 북 ‘소리’를 듣고 대오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대의 공부는 소리, 혹은 육성과 무관한 일종의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자본과 관료에 의해 포획되어 있다.

요컨대, 그 미세현묘한 소리 속에서 스승과 제자를 이어주던 지음의 관계는 이미

고물상의 폐품이나 박물관의 박제 속에 속절없이 떠밀려가고 만 것이다.

 

그것은 비단 스승과 제자 사이의 형편만이 아니다.

근대적 교육과 교양이 관념적-문자적 계몽주의의 1차원적 형식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데다, 현대인의 존재를 일상적으로 전유하고 있는 갖은 신매체들의

전포괄적 영향력은 육성의 인문적 대면관계를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가령 ‘나는 그 사람을 안다(만난다)’는 말의 뜻은 각 시대나 세대 사이에

메울 수 없는 단절의 심연을 품고 있다. 그래서 ‘듣다가 죽어버려라!’는

경구를 대면 관계의 지침으로 삼는 나같은 사람과, 눈 앞의 상대를

두고도 쉼없이 핸드폰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앎과 사귐에 대한 동일한 이해와 태도로 살아가는 게 아니다.

 

이를테면, 이미 우리는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태연하게

수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지 못한 것이다. 독특한 앎과 사귐의

배타적 이치에 근거한 그 관계는 이미 시효를 넘긴 주화와 같다.

 

사제라는 그 낡고 오연한 관계의 퇴화는 오랜 대면과 깊은 육성이 폐기된

현대적 세속의 중요한 증상인 셈이다. 이 글은 일견 ‘소리’의 상실을 안타까워

하는 듯 읽히겠지만, 우리가 잃은 것은 단지 소리만이 아니다.

소리 이전의 단계에서 이미 확철(確徹)해지는 그 유심(幽深)한 이치의 교류 말이다.

 

아는 대로 가섭은 부처님의 글도 말(소리)도 아닌 마음을 받은 제자로 선종의

역사에서 한 꼭지점을 이룬다. 물론 부처님과 가섭의 관계야말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이를 수 있는 한 지극한 경지의 정화가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염화미소로 대변되는 전심(傳心)의 이치다. 그러나 ‘마음에 집착하지

말라’거나 아예 ‘마음이 없다’는 식의 부정법(via negativa)에 익숙한 불가적

공부의 전통이, 스승과 제자 사이의 말할 수 없는 전심의 이치에서 발원한다는

아이러니 역시 몹시 흥미롭다. 그 역설적 흥미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통칭되는

사조는 물론이거니와 20세기의 철학 일반이 특별히 마음과 의식의 탈중심화나

해체에 주력했다는 사실에서도 거울상의 모습을 한 채 반복된다.

 

인간은 그 매체적 여건 속에 관계의 닻을 내리면서 쉼없이 변해간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맺은 관계, 대면과 육성으로 맺은 관계, 글쓰기로 맺은 관계,

핸드폰으로 맺은 관계, 혹은 살이나 화폐로 맺은 관계 사이의 차이는 이미

인간 존재 그 자체의 문제가 된다. 이미 오래 전에 ‘인간은 자신의 바깥에

존재한다’(헤겔)고 했거니와, 현대의 인간은 자신들의 관계를 형식적으로

규정하는 갖은 매체들 속으로(그러므로, 바깥으로) 들어가(그러므로, 나와)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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