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상식

깨달음의 첫 발자국

갓바위 2013. 12. 11. 20:10


깨달음의 첫 발자국


부처님의 고행과 깨달음



카필라의 험준한 성을 넘어서

히말라야로 덧없는 발길을 옮기게 된 싯다르타는

우선 자신의 비단옷을 사냥꾼의 누더기옷과 바꾸어 입었다.

 

 

그리고 사냥꾼의 칼을 빌려서 스스로 머리털과

수염을 깎고 평범한 수도자가 되었다.



29세 때 출가하여

설산 히말라야에서 행한 모진 고행과

당시의 다른 스승들에게 배운 것에 대해서는

현재 남아 있는 자료가 많지는 않으나 대체로

요가수행을 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요가학파는 인도 정통 철학의 6파 중 하나이며,

요가라는 수행방법은 거의 모든 종교에서 공통으로 쓰고 있었다.

요가학파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으로써

요가라는 독특한 방법을 개발하였다.

거기에는 8실수법(八實修法)이라는 실천적인 수행단계가 있다.


즉, 조식(調息), 조신(調身), 내외합일(內外合一)

등의 구체적인 수행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요가수행자들은 '육신 안에는 순수한 정신, 즉 영혼이 있다.

 

이러한 순수한 정신이 제 기능을 발휘하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순수한 정신은

육신의 결박으로 인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육신의 결박으로부터 영혼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육신을 괴롭혀서 감각적인 기능을 탐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해탈한다' 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고행이라는 독특한 수행방법이 도출된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도 수행을 할 때

새로 배부르지 않을 만큼 소식(小食)을 하고,

 

밤에도 잠들지 않고

위대한 대각을 위해

극심한 고행을 했던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파키스탄의 라호르 박물관에 소장중인 고행상은

 이러한 싯다르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움푹 패인 두 눈, 다 드러난 실핏줄 등이 섬세하게 표현된 실물

크기의 고행상은  간다라 예술의 걸작품이다.

이 고행상은 부처님같이 위대한 인격체일지라도

뼈를 깍는 수도의 단계가 없이는 대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 고행상에서 우리는 싯다르타의 모진 고행을 사실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목숨을 읽어버릴 뻔한 고행중에 싯다르타는

고행을 통해서는 끝내 대각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소박한

자기 반성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고행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결심이었다.



왜냐하면 출가 고행을 중시하던 그 당시

수행자들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부처님이 고행을 포기한 것은

수행자이기를 포기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난 모든 비난과 질시를 무릅쓰고,

싯다르타는 나이란자라 강둑으로 발을 옮긴다.

어린 소녀 수자타가 올린 우유죽 공양을 받고

 나아란자라 강에서 목욕을 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린다.

 

 

그는 보리수 밑에 풀방석을 깔고 앉은 채 굳은 맹세를 한다.

위대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그후 꼭 이레째 되는 날, 새벽 먼동이 틀 무렵이었다.

위대한 깨달음이 싯다르타의 뇌리를 스쳤다.


무엇이 이 삶을 고통으로 이끄는가?

어떻게 이 고통을 극복할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의 시작과 끝은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윤회의 사슬을 푸는 열쇠는 무엇인가?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없는 위대한

 깨달음이 열린 그 때의 광경을

불교경전은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천지가 진동하면서 하늘에서 꽃들이 뿌려졌다.

이 위대한 인류의 성인을 위해서 온 대지의 생명들이 춤을 췄다.



그 순간부터 싯다르타는 스스로를 붓다. 즉

'깨달음을 얻은 이'라고 불렀다.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이렇게 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된다.

그 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이 깨달음의 성지는 현재의 지명이 보드가야이며,

인도 중북부에 있는 상당히 큰 도시이다.

 

불멸 후 2백년경, 아쇼카 대왕이 이곳을 참배하고

석주를 세우고 큰 절을 일구었으나,

그후 몇 차례의 전란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11세기경(미얀마)스님들이 대각사를 세우고,

다시 증축을 계속하여 오늘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 를 보면

7세기 중반에 이미 보드가야의 불적지가 많이 훼손된 흔적들이 보인다.

또한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도 언급이 되어 있다.

 



지금도 보드가야에는

세계 각국의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들어 부처님의 깨달음을 찬탄하고,

위대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곳에는 스리랑카, 티베트, 미얀마, 중국, 일본 등
이 각기 자국의 절을 세위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고,

순례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부처님의 위대한 깨달음,

 

그 내용은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인연(十二因緣), 중도(中道), 윤회(輪廻) 등이다.

 

그 모든 것들은 삶의 진실을 일러주는 진리의 가르침이다.

 

대각의 성지 보드가야에는 2천 5백여 년 전,

부처님의 깨달음을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답습하려는

 많은 순례자들이 그곳을 배회하고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영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불교가 2천 5백여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변함없이 그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각사의 절터에는 굽타시대의 작품이라고

보여지는 불상들이 외벽에 조각되어 있다.

그중 대각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의 불상이 걸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미얀마와 스리랑카의 스님들이 번갈아 가면서

이 수행도량을 지키면서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다.




진리의 문을 여신 부처님

보리수 아래에서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후 부처님은

사르나트로 발길을 옮겼다.

 

 

사르나트, 즉 녹야원(사슴동산)에서 대각을 얻은

보드가야까지는 250km,약 600리가 넘는 길이다.

그런데 그곳을 최초의 설법지로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르나트가 있는 도읍을 바라나시라고 하는데,

예로부터 그곳은 종교인들의 중심적인 성지였다.

종교적인 성인들이 설산에서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 모여드는 장소였다.



이 바라나시는 카시 강과 갠지스 강이 굽이쳐

 돌아가는 힌두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부처님도 이곳을 그가 깨달은 진리를 설파하는 최초의 장소로

선택하였으며, 히말라야에서 함께 수도했던

다섯 비구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보드가야에서 이곳으로 오기 전에 있었던 일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악마 마라의 유혹의 대한 이야기이다.

악마 마라가 부처님의 위대한 깨달음을

질투하여 이렇게 유혹하였다고 한다.


부처님, 당신은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이제 열반에 드십시오.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 중생들은 당신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요.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수고로운 일을 하려고 합니까?


이 악마의 유혹에 관한 전설은 싯다르타의

내면적 번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그가 깨달은 진리의 내용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그 가르침이 얼마만큼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는

회의를 구상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결연히 일어선다.

무명(無明)의 중생들을 향해서

그 위대한 깨달음을 전파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녹야원에 도착한 후,

최초로 그 깨달음의 내용을 다섯 명의 비구들을 위해서 설법하였다.

몇 구절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삶은 고통이다.

태어나는 것[生苦],
늙는 것 [老苦], 병드는 것[病苦],
죽어야 하는 것[死苦]이 모두 고통일지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愛別離苦],

원한과 있는 사람과 만나는 것[怨憎會苦] 역시 고통이니라,

구하나 얻어지지 않는 것도 고통[求不得苦]이니,

요컨데 번뇌의 수풀 위에 뿌리박고 있는

이 몸이 존재하는 것이 고통[五陰盛苦]이다.



그러면 무엇이 이 고통의 근본인가?

탐내고[貪], 성내고[瞋], 어리석은 것[痴]

이 세가지가 모든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이니라.

그러한 고통의 소멸을 열반라 한다.

그것은 끊어오르는 듯한 애욕,

그 욕망을 벗어나 영원한 기쁨에 안주하는 것이니라.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경지를 얻을 수 있는가?


올바로 보고[正見],

올바로 생각하고[正思],

올바로 말하고[正語],

올바른 업을 지니고[正業],

올바른 생활 수단을 갖고[正命},

올바로 기억하고[正念],

올바로 노력하고[正精進],

올바로 마음을 닦는 일[正定] 이것이 열반을 얻는 방편이니라.


이것이 바로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불리는 초기 불교의 설법 이다

 

 

여러 종교의 전통들이

대부분 탄생지가 돌아가신 곳을 성지로 삼고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 최초의 설법지인

녹야원도 성지로꼽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불교에서는 말을 그다지 중시하지는 않는다.

선종의 불립문자도 같은 전통 위에 있다.

다만 진리의 말을 펴게 된 것[轉法輪]을 중시할 따름이다.



전법륜이라는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의미이다.

 

또 만(卍)자는 수레바퀴의 살을 구상화한 것이다.

거기에는 부처님의 위대한 진리의 설법이

영원히 펼쳐질 것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자료:동국대학교정병조교수님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