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상식

소요대사 태능(逍遙大師 太能)

갓바위 2015. 6. 5. 09:17
소요대사 태능(逍遙大師 太能)  
(1562∼1649)
조선 중기의 고승. 성은 오씨. 호는 소요(逍遙). 
전라남도 담양출신. 어머니가 신승(神僧)으로
부터 대승경(大乘經)을 받는 태몽을 꾸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살갗이 선명하고 골격이 씩씩하였다. 
어려서부터 탐욕을 싫어하고 도훈(道訓) 을
 듣기를 즐겨하였으며, 베풀기를 좋아하고 
자비심이 많아 마을사람들이
 성 동(聖童)이라고 불렀다.
 13세에 백양산(白羊山)에 놀러갔다가 
뛰어난 경치를 보고 곧 세속을 떠나기로
 결심하여 진대사(眞大師)로부터 계(戒)를 받았다. 
그때 부휴대사(浮休大師)가 속리산과
 해인사로 다니면서 교화를 폈는데, 
그 밑에서 경률(經律)의 깊은 뜻을 익혔다. 
부휴의 문하에 수백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오직 소요와 충휘(沖徽)·응상(應祥)만이 
법문(法門)의 삼걸(三傑)이라 불렸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묘향산에서
 교화를 편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달마대사가 
천축국에서 중국으로 온 뜻이 
무엇인가 를 묻는 話頭)를 물었다. 
서산대사는 한번 보고 곧 건당(建幢)을 시켜 
의발 (衣鉢)을 전한 뒤 3년 동안 지도하였다. 
그뒤 얼마안되어 서산대사는 그에게,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와서, 
물 위의 거품에 모두 살라버린다. 
우스워라, 저 소를 탄 사람. 소를 타고서 
다시 소를 찾는구나"라는 법게(法偈)를 주었 다.
 30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산과 
유정(惟政)이 의병을 일으켜 전 장으로 나가자, 
그는 폐허가 된 빈 절을 지키며 
불전(佛殿)을 수리하고 전쟁 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올렸다. 
1624년(인조 2) 조정에서 남한산성
(南 漢山城)을 축조하려 할 때 그에게 서성
(西城)을 보완하게 하여 이를 완수하 였다. 
그뒤 지리산의 신흥사(神興寺)와
 연곡사(燕谷寺)를 중건하였는데, 
태능 의 도력에 감화된 사람들의 도움으로 
며칠만에 공사를 끝마쳤으며, 
그가 법 (法)을 설하면 짐승들과 이류
(異類)들까지도 감복하였다고 한다. 
그는 선(禪) 과 교(敎)를 일원이류
(一源異流)로 보는 전통적 견해를 취하였다. 
이러한 사 상과 경향은 서산대사와 
일맥상통하는 흐름이다. 그의 선사상을
 요약하면, (1)본래청정(本來淸淨)하고
 자재하며 완전한 일물(一物)이 있다는 것,
 (2)이 일물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얻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닌
 우 리의 자성(自性)이라는 것, 
(3)이 자성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 속에서 
모든 사물에 작용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초월적이라는 것, 
(4)이 자성이 나의 참된 주인공인 
동시에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
 (5)이 참 주인공을 철두철미하게 자각(自覺)
한 사람은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서 
아무 것에도 의존하거나 결점이 없는 
온전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즉, 상징적인 비유를 통하여 개념적인 
지식을 초월하여 바로 그 실상 (實相)을 
실감하도록 하는 선종의 방법으로 
제자들을 깨우치려 하였으며,
 철 두철미하게 불교를 주체적으로 
깨닫도록 하고자 노력하였다. 
1649년 11월 21 일 열반이 가까웠음을 
알고 제자들에게 설법하다가, 
임종 때에는 붓을 찾아 "해탈이 
해탈아니거늘 열반이 어찌 고향이겠는가! 
취모검(吹毛劒)의 빛이 빛 나고 빛나니 
입으로 말하면 그 칼날 맞으리
(解脫非解脫 涅槃豈故鄕吹毛光樂 
樂口舌犯鋒鎚)." 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나이 87세, 법랍 75세로 입적하였다. 
평소 태능의 도(道)를 흠모한 효종은 
1652년(효종 3) 혜감선사
(慧鑑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소요당집(逍遙堂集)> 1권이 있다. 

 

'卍 ~불교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   (0) 2015.06.07
상월(上月)스님  (0) 2015.06.06
승이동인(僧李東仁)   (0) 2015.06.04
연담대사 유일(蓮潭大師 有一)  (0) 2015.06.03
의통조사(義通祖師)  (0) 2015.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