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상식

간화선은 대오선(待悟禪)이 아니다

갓바위 2023. 1. 19. 11:10

간화선은 대오선(待悟禪)이 아니다

극한 이치를 궁구 함에는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음이라.

그러나 첫째로 마음을 두어 깨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일 마음을 두어 깨닫고자 기다리면,

 

기다리는 바의 마음이 도의 안목(道眼)을 장애하여 급할수록 더욱 더디어집니다.

단지 화두를 잡아가다가 문득 잡아가는 곳을 향해서 생사심(生死心)이 끊어지면,

이것이 곧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앉은 곳이다.

 

―《서장(書狀)》―

 

간화선에서는 본래 부처라는 것을 철저히 확인하기 위해서 깨침을 법칙으로 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깨침을 기다려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절인연이 무르익어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는 저 과실열매처럼 충분히 익을 때를

기다려야지, 생짜로 나뭇가지를 흔들어 떨어뜨리거나 미리부터 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익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즉 간절하기는 하되, 속효심(速效心)을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은 조급한 심정으로 알음알이를 내게 하며,

이러한 사량 계교야 말로 공부를 제대로 되지 못하게 하고 의정을 일으킬 수도 없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점은 깨침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깨닫겠다는 일념은 중요하다. 그러나 깨침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단지 화두에 몰두해서 생사심이 파하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깨침을 얻고자 기다리다 보면 그로 인하여

장애가 되어 깨침은 더더욱 더디어질 따름입니다.

 

간화선은 결코 대오선(待悟禪)이 아니다. 오히려 그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까지도 화두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녹여버려야 한다.

경산대혜 선사도 ‘평소에 지견이 너무 많아 증오(證悟)를 구하는 마음이 앞에서

장애를 짓기 때문에 자기의 정지견(正知見)이 현전치 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장애라는 것 또한 밖에서 온 것이 아니요,

또 별다른 일도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분간할 것이 있겠는가?

이른바 십종병(十種病)이란 증오(證悟)를 구하는 마음이 근본이 되는 것이다.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여기서 말하는 십종병이란 ‘조주무자’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가장 주의하여야 할 병통 열 가지를 말한다.

조주무자 화두는 모든 화두의 대표격이므로, 결국 이것은 일반적으로 화두참구에

있어서의 열 가지 병통을 말해 준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내용은 전적에 따라 약간의 출입이 있지만 대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가 있다.

 

① 유(有)와 무(無)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不得作有無會)

② 진무(眞無)의 무(無)로 생각지도 말고(不得作眞無之無卜度)

③ 도리(道理)로써 이해하려고 하지 말며(不得作道理會)

 

④ 의근하(意根下)를 향해서 사량하고 계교하지도 말며(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⑤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박이는 데서 캐내려고 하지도 말며(不得向揚眉瞬目處睵根)

⑥ 어로상(語路上)에서 활계(活計)를 짓지도 말며(不得向語路上作活計)

 

⑦ 일 없는 갑옷 속에 드날려 있지도 말며(不得揚在無事甲)

⑧ 화두를 들어 일으킨 곳을 향하여 알려 하지 말며(不得向擧起處承當)

⑨ 문자로써 이끌어 증명하지 말며(不得文字中引證)

⑩ 어리석음을 가져다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라(不得將迷待悟)

 

―《간화결의론》―

 

이러한 열 가지 병이란 것도 알고 보면

증오(證悟)를 구하는 마음으로써 근본을 삼고 있다는 것이다.

대오지심(待悟之心)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 스스로를 못 깨친

 

중생으로 묶어 놓는 것이며, 나아가 깨침을 얻기 위해서 갖가지 계교나

사량분별 및 허망한 노력을 하게 만드는 근원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한 개 무자만을 간(看)할지언정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과

 

뚫고 뚫지 못한 것을 관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간화선을 닦는 입장에서 우선적으로 기피하여야 할 점은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