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상식

염화두(念話頭)를 해서는 안 된다

갓바위 2023. 1. 18. 10:36

염화두(念話頭)를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의심을 일으킬 때는 반드시 먼저 분노심을 내어

조주는 어째서 없다고 했을까? 하고 의심을 해야 한다.

이 분노심은, 소리를 내거나 내지 않거나 하는 것은 학인들이 스스로 선택할 문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 하나의 조주는 어째서 없다고 했을까? 하는 의심을 의심해 가는 것이다.

조주의 무(無)를 간(看)하는 것이 아니다! 조주의 무(無)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기막힌 것이다.

 

―《선종결의집(禪宗決疑集)》―

 

화두를 드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앞서 대오지심(待悟之心)을 경계하여 알음알이를 짓지 말라 한 것도

그러한 알음알이가 의정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의정을 조금이라도 앞당겨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화두를 드는 요령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더러는 이러한 요령을 정확히 터득치 못함으로써

헛되이 공력을 낭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표적으로 조주의 무자(無字)를 간(看)할 때,

그저 무(無)! 무(無)!를 되풀이하여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야말로 잘못된 방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길을 갈 때도 무, 앉을 때도 무, 옷을 입거나 밥을 먹을 때도 무,

언제나 무라고 하며 혹은 천천히 하기도 하고, 혹은 호흡과 관련지어

급하게 하기도 하는 것 등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 무(無)라는 말에 달라붙어서 의정을 일으켜야지,

그저 무, 무하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화두는 처음부터 의심을 지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

 

분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따금씩 소리를 내어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라고 하면 혼침과 도거가 사라진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해서 공부를 짓되, 정신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혹은 염화두(念話頭)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부를 짓되 다만 공안을 염(念)하지 말지니,

염해 가고 염해 오면 무슨 교섭(交涉)이 있으리오?

 

염하여 미륵불이 나올 때까지 이를지라도 또한 교섭함이 없을 것이니

차라리 아미타불을 염한다면 공덕이나 있지 않겠는가?

다만 하여금 염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각기 화두를 들어 일으켜야 할지니,

 

무자(無字)를 간(看)한다면 문득 무자(無字)상(上)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키고,

백수자(柏樹)를 간(看)한다면 문득 수자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키고,

일귀하처(一歸何處)를 간한다면 문득 일귀하처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

 

―《몽산법어 蒙山法語》―

 

이처럼 단지 공안을 염해서는 안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미타불과 같은 불명호를 염하는 것이 이익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화두는 염하는 것이 아니고, 의심을 지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심을 지어 나가는 요령에서도 또한 우선은 화두 전체를 들어서 챙기고,

그리고 나서는 ‘도대체 일체 함령이 다 불성이 있다고 하셨거늘

조주는 무엇을 인(因)하여 무(無)라 일렀을까?’, ‘어째서 무라 했을까?’,

‘어째서?’, ‘왜?’, ‘?’ 하는 식으로 지어 나가는 것이다.

 

‘만법귀일 일귀하처 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를 들 때에도 요령은 마찬가지이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하여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에다가 의정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마치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리고 ‘도대체 어디에다 두었을까?’하고

의심하고 의심해 나가듯이 의심을 지어 나가는 것이다.

다만 염하는 것과 의심해 나가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하여 골똘히 의심하고 의심할 때, 혼침과 도거는 자연스레 사라지고

성성하고도 적적한 경지가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화두가 잘 들리지 않으면 다시 화두를 처음부터 끝 구절까지 들어서

수미일관하게 하고 다시 의심을 지어 나가되, 그래도 쉽사리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포단에서 내려와 한동안 거니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혹 화두를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거든, 연거푸 세 번 들면 즉시 힘을 얻을 것이요,

혹 심신이 피로하고 지쳐 마음이 불안하거든, 조용히 땅으로 내려와 한동안

거닐다가 다시 포단에 앉아 본참화두를 가지고 전과 같이 밀고 나가도록 하라.

 

―《선관책진(禪關策進)》―

 

즉 앉아서 공부에 장애를 느낄 시에는 서서 다니며 공부해도 무방한 것이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오로지 서서 다니며

화두를 참구해서 깨친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선요(禪要)》의 저자인 고봉화상의 경우가 그러했으며,

《선종결의집(禪宗決疑集)》의 저자인 원나라 단운지철(斷雲智徹, 1309-?) 선사도 그러하였다.

성상(聖像) 앞에 향을 사르고 3년을 죽기로 한정하고 이렇게 서원하였다.

 

제가 만약 나태하여 앉거나 눕고자 하여 몸을 자리나 평상에 붙인다면

무간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이곳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어 지이다.

이로부터 밤낮으로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배회하였다.

 

두 끼의 공양 때에만 자리에 앉았을 뿐, 그밖에 차를 마시는 경우에도 역시

발을 멈추지 않았으며, 도우(道友)나 시주가 방문했을 때에도 또한 맞이하는 법이 없었다.

말은 일체 절제하였다. 단지 ‘만법귀일 일귀하처’만을 들을 뿐이었다.

다만 이 한 마디를 향하여 간절히 의심을 지어갈 뿐이었다.

 

―《선종결의집(禪宗決疑集)》―

 

아침에 죽 먹을 때와 점심에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곤 일체 앉거나 기대지도 않고

화두를 참구하여 다만 의정만이 마음속에서 분명한 무심삼매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봉화상도 거의 3년이 되도록 두 끼니의 죽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에 앉지 않았고 피곤할 때에도 자리에 기대지 않고서 밤낮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다니며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했다고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외에 《선관책진(禪關策進)》의 독봉계선(毒峰季善) 선사도 육계(深溪)에서

정진할 때에 눕는 곳을 만들지 아니하고 다만 한 개의 걸상만을 놓고

정진하여 필경 깨침으로 법칙을 삼았다고 한다.

 

하루 저녁에는 졸다가 밤중이 된 것도 몰랐는데, 깨어서는

마침내 걸상마저 치우고 주야로 서서 다니며 참구하였다.

한번은 벽에 기대어 졸은 지라, 그후로는 ‘내 다시는 벽에도 기대지 않는다’

맹세하고 빈 땅 위를 홀로 걸으며 각고의 정진을 하여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한다.

 

한 마디로 수마(睡魔)와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걸어다니며 정진하는 것은 대체로 혼침이 심할 때에 주로 잠을 쫓고자 쓰는 방법이다.

물론 걸어다니면서 조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은 잠깐뿐이고,

 

앉아 수행하는 것보다는 훨씬 잠을 쫓기에 수월할 것이다.

따라서 비록 흔치 않은 예이지만, 이상과 같이 전적으로 서서 걸어다니며

수행해 깨친 예가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