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상식

깨침으로 법칙을 삼다(以悟爲則)다

갓바위 2023. 1. 16. 10:14

깨침으로 법칙을 삼다(以悟爲則)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는 간화선이라고 하는 수행방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요가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의 심신수행 방식과 삼매는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오로지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인위적인 의심의 응결과,

이의 타파를 통한 견성체험이라고 하는 방식의 수행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화두참구 방식의 참선을 하다가 벽에 부딪히는 경우,

자칫하면 회의감을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다.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화두를 가지고 끊임없이 씨름해 나간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도 않으며 진전도 쉽지 않은 터이므로,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염불선이나 위빠싸나 같이 얼핏 수긍이 가는 방식을

택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심지어는 지금 이 주인공 자리를 믿고 다 놓아 버리면 몽땅 해결되어

지금 그대로 삼매이고 그대로 참선이고, 전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놈이 뭔고?’

하고 앉아 있으면 몇천 년 전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반규선사(盤珪禪師)같은 이도 의단(疑團)을 권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안(公案)은 의단이 없는 사람에게 의단을 짐지워서

불심을 의단으로 변하게 한다고 나무랐다.

말하자면 공안의 공부는 불필요하게 어려운 것을 사람들에게 떠맡기는 격이라는 주장이다.

 

이상과 같은 주장들은 중국 선종에서의

조사선(祖師禪)적 입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조사선에서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본각적 신심(本覺的 信心)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부처인 것이다.

육조 혜능의 ‘마음땅에 그릇됨만 없다면 자성의 계(戒)요,

마음땅에 혼란 없으면 자성의 정(定)이요,

 

마음땅에 어리석음 없으면 자성의 혜(慧)’라는 말이나, 마조(馬祖)의

‘도(道)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그저 헐떡이는 마음을 쉬고,

더 이상 삿된 생각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본래 부처인 것이다.

즉 고요함만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냥 그렇게 믿고 앉아 있는 다 해서

곧바로 도(道)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번뇌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절대로 체험이 필요하다.

또한 정말로 그 경지에 이르렀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검증 절차도 요구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방법적인 진전을 더한 것이 바로 간화선이라 할 수 있다.

상기의 본각적 신심에 입각처를 두고 있으되,

화두참구라는 시각적 의심(始覺的 疑心)을 내는 구체적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방법은 대혜종고(大慧宗嗋, 1089~1163)가 특히 묵조사선(默照邪禪)을

공격하면서 그 폐단을 벗어나고자 제시한 것이다.

 

근년 이래로 일종의 삿된 스승이 있어 묵조선을 설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열두시간 가운데에 이 일을 관여치 말고 쉬어가고 쉬어가되 소리를 짓지 말라,

금시(今時)에 떨어질까 두렵다” 하니,

왕왕에 사대부가 총명이근에 부린 바 되어 대부분이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다가,

 

자못 삿된 스승들의 고요히 앉아 있으라는 지령을 입고는

도리어 힘 덜음을 보고는 문득 이로써 족함을 삼아 다시 묘한 깨달음[妙悟]을

구하지 않고 다만 묵연함으로써 극칙을 삼나니,

 

내가 구업을 아끼지 아니하고 힘써 이 폐단을 구하니

지금 조금씩 허물을 아는 이가 있음이라. 원컨대 공은 다만 의정이 부수어지지

아니한 곳을 향하여 참구하되 행주좌와에 놓아버리지 말지어다.

 

어떤 승(僧)이 조주화상에게 묻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화상이 답하되 “없다(無)” 하였으니 이 한 글자는

문득 이 생사의 의심을 깨뜨리는 칼인 것이다.

 

―《서장(書狀)》―

 

깨침은 묵조의 삿된 스승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미친 소리가 아니며,

제이두(第二頭)가 아니고, 방편의 말도 아니고, 접인의 말도 아닌 것이다.

다만 쉬어가고 쉬어가서 고요함에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묘한 깨달음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정이 파하기 전까지는 절대적으로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의

《무문관(無門關)》에서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

 

그 제1칙인 조주무자(趙州無字)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떤 승(僧)이 조주화상에게 묻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화상이 답하되 없다(無) 하였다.

 

무문(無門)이 가로되, 참선은 꼭 조사관을 뚫는 것이요,

묘한 깨달음은 요컨대 마음의 길을 끊어 다하는 것이라.

조사관을 뚫지 못하고 마음의 길을 끊지 못하면 이 모두 풀을 의지하고

나무에 붙어 있는 유령과 같은 것이니, 또한 일러라 어떠한 것이 이 조사관인가?

 

다만 이 한 개 무자(無字)가 이 종문의 한 관문이라,

드디어 지목하여 가로되 선종의 무문관이라 한다.

 

―《무문관》―

 

더 이상 닦을 것도 깨칠 것도 없이 본래 그대로가 부처라는 것이 조사선의 입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사선의 경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관문을 통과하지도 않고서 본래 부처라느니,

제할 망상도 없고 진리를 구할 것도 없다느니 하는 것은 고목사선(枯木邪禪)에 불과하다.

 

따라서 참선을 통해 조사관(祖師觀)을 뚫어야 하며,

묘한 깨침을 통해 마음길이 끊어져 다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사관(祖師觀)이란 다름 아닌 무자공안(無字公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