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교리 강좌

나를 없애니 지혜의 마음이 드러난다

갓바위 2024. 4. 7. 11:13

 

 

나를 없애니 지혜의 마음이 드러난다

​無 我

올여름 진행한 참사람의 향기에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비숫한 연배의 세 남자자 약속이라도 한 듯 참가했다.

이들은 서로 인연은 없었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한 직장을 오래 다니며 노력한 결과 지점장 자리까지 올랐는데,

오히려 이런저런 걱정이 앞서더란다. 열심히 일만 하며 살아왔기에 잠시 쉬고

싶지만 그사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 어떡하나,

5년만 지나면 퇴직인데 한창 일할 50대 후반에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까,

 

어떤 대비책을 세워야 할까. 온통 막막한 생각뿐이라고 했다.

하루하루 걱정만 쌓이고 혼자서 궁리를 하다가 땅끝 마을가지 내려온 것이다.

분명 은행지점장은 그동안 원하고 노력해서 이룬 자리이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오른 뒤에는 맡은 소임을 지혜롭게 해낼 것을

고민하기보다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현재의 시점을 잃어 버리니 온통 볼안과 걱정에 휩싸인 것이다.

우리가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도 원하고 원해서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사람으로 태어나겠는가.

여러 어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사람의 삶이 제일 좋다.

우리는 현재의 삶이나 자리를 연기적 관계로 보는 관점을 길러야 한다.

 

연기적 관점을 다른 말로 통찰이라 하고, 통찰은 지혜이고, 이 지혜의 실천이

자비행이고 보살행이다. 자신의 삶을 많은 관계 속에서 찾아가 감사와

행복한 마음이 생기며 지금 이 순간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귀하고 귀한 나의 삶을 온전하게 살기 위해서는 연기적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연기적 관계를 몸으로 체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라는 생각을 뛰어넘거나 내려놓아야 한다.

 

3년전 틱낫한 스님을 모시고 제자 40여 명과 함께 서울 국제선센터에

머물렀을 때였다. 이른 아침 강연을 위해 길을 나섰다.

출근길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도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출발을 앞두고 두 명의 외국인 스님이 보이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보니 횡단보도 중간에서 교통사고가 나 두 스님이 뒷수습을 하고있다.

캐나다 스님은 승합차에 충돌해 쓰러진 중년남자를 돌보고 있었고,

이탈리아 스님은 손짓을 하며 지나가는 차들을 통제했다.

출근길 사람들이 사고 현장을 흘깃흘깃 보면서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도 보였다.

 

두 스님은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 교통사고를 목격하자마자 현장으로 바로

뛰어갔다. 이럴 때 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가 작동을 하면 방관자가 된다.

흘깃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분명 그들도 돕고 싶은 마음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아침밥도 굶고 나선 길, 회사에는 할 일이 쌓여 있으니 어서 가야 한다.

거들고 나섰다가 자칫 복잡한 증언과 조사에 시간을 빼앗길 지 모른다.

 

이런 일에 얽히고 싶지 않은 '나'가 작동을 해 그자리를 지나쳐 가는

행인이 되고 만 것이다. 두 분 스님은 목숨처럼 받드는 스승이 한국이라는

낯선 곳에서 강연을 한다고 도우러 나선 길이었다.

 

게다가 스승과 도반들이 버스에서 기다리고 있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이었으므로, 사고를 목격하는 순간 '나'라는 생각이 작동했다면 방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생각이 작동했다면 방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생각이 작동하기 전 '지혜의 마음'이 보살행으로

나타나 자연스럽게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물흐르고 꽃은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