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 어둠속 등불

증심사 창건설화

갓바위 2024. 4. 14. 22:07

 

 

증심사 창건설화

 

증심사는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독특한 연기설화를 지니고 있다.

아득한 옛날 무주 땅에 한만동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야기는 한씨가 태어나기이전, 그의 할아버지가 태수벼슬을 할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할아버지인 한태수가 며느리를 보기 위해 날짜를 잡아놓은 어느 날이었다.

그 집에는 기운은 장사지만 술을 좋아하고 싸움을 잘하여 매번 말썽을

일으키곤 하는 ‘득’이라는 하인이 있었는데, 한태수는 그에게 심부름을 보냈다.

 

그런데 몇 시간이면 넉넉히 다녀올 곳을 온종일이 지난 뒤에야 엉망으로

취한 채 비틀걸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태수는 화가 치솟아 불호령을 내렸다.

“네 이놈! 명을 받아 일보러 간 놈이,

감히 어디 가서 술에 취해 이제야 오는거냐!” “이 노릇도 못해먹겠다.”

 

득이는 허리춤에서 심부름으로 받아온 편지를 꺼내들고 비틀거리다가,

불경스럽기 그지없는 한마디를 중얼거린 채 그 자리에서 픽 고꾸라지고 말았다.

“저런 죽일 놈을 보았나, 감히….” 한태수는 분노로 부르르 떨며

마루청이 떠나가도록 발을 굴렀으나 득이는 엎어진 채 코를 골고 있었다.

 

“원, 이런 변괴가 있나! 술 취한 미친놈이 상전을 몰라보고….

내일 아침 깨어나면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오너라!”

방으로 업혀 들어온 득이는 한참 후에 깨어나 물을 찾아 들이키더니,

다시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임신 7개월인 득이의 아내는 내일 아침

떨어질 불호령에 발을 동동 구르며 가슴만 조이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남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득이가 달아났다!” 이 소식은 어젯밤 일을 주목하고 있던 하인들에게

삽시간에 퍼졌고, 한태수는 득이의 처를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캐물었으나 그녀 역시 아는 바가 없는 터였다.

 

“네 이년! 서방을 도망가게 하고서 잡아떼는 게 분명하다.

여봐라! 이년을 당장 광에다 가두거라. 오늘 당장 죄를 물을 것이로되

경사스러운 일이 얼마 안 남았으니 차후에 죄를 다스리도록 하겠다.”

 

별 수 없이 득이 처는 뒷채의 광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집안재산에 속하는 하인이 도주하는 것은 남아있는 이들에게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도 중죄 처리하는 것이 관례인 시절이라,

득이 처는 주인에게 죽음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 에이그, 불쌍해라! 득이란 놈이 죽일 놈이야!”

“새아씨 혼인잔치를 그리도 보고 싶어 기다렸는데 구경도 못하고….

아기까지 가졌는데 꼼짝없이 죽게 생겼네.”

 

사람들은 득이 처가 불쌍하여 저마다 애틋해 하였다. 날짜가 지나

혼인날이 지나고, 이어 우례날(신부가 처음 시댁으로 들어오는 날)이 왔다.

 

때는 팔월 보름이라 갓 시집온 신부는 밝은 달빛에 이끌려 잠시 뒤뜰을

거닐고 있었는데, 어디서 여인의 흐느껴 우는 듯한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니 그 소리는 광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거기 누구 있어요?”

 

신부가 다가가서 물으니 갑자기 울음소리가 멎고 말았는데, 달빛이 비치는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초췌한 한 여인이 구부리고 앉아 울고 있는 것이다.

 

신부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연유를 물었고, 자신을 찾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 득이 처는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딱하고 애처롭기 그지없어, 신부는 광의 문을 열어주면서 말하였다.

 

“이 길로 얼른 이곳에서 멀리멀리 달아나세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요.”

다음날 한태수는 대청에 자리잡고 앉아 득이 처를 잡아들이라고 하인들에게

명령했으나, 텅 빈 광을 보고 혼비백산한 하인들이 이를 보고하였다.

한태수는 금새 얼굴빛이 변하며 하인들을 모두 불러놓고 문초하였다.

 

“네 이놈들! 너희들 중 누군가가 문을 열어준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이제 너희들을 모두 광에 가둘 차례구나!” “저희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옵니다.”

하인들은 벌벌 떨며 입을 모았다.

이때 안채에서 나타난 신부가 침착하고 차분하게 말하였다.

 

“아버님, 그 여종은 제가 놓아주었사옵니다.

듣고 보니 남편의 잘못으로 죄없이 갇힌 데다 만삭의 몸이라,

만일 좋지 않을 일을 당하게 되면 그누가 아버님께 미칠 듯하여 그리하였습니다.”

 

한태수는 갓 시집온 새 며느리를 꾸짖기도 곤란하거니와, 단순히 자신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미칠 누를 생각하여 그리했다는 말에 마음도 누그러지고,

다른 하인들 보기에 명분도 서는 일이라 없던 일로 덮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웬일인지 집안의 재산이 점차 줄어들면서 한태수도 세상을 떠

나고 말았다. 신부는 그간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맏아들이 바로 한만동이었다.

 

다시 몇 십 년이 흘러 만동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날,

초상을 치르느라 분주한 집안에 한 스님이 찾아와 곡을 하며

슬피 우는 것이었다. 이에 만동이 곡을 마치기를 기다린 후 물었다.

 

“어느 절의 스님인데 양반집안 초상에 와서 감히 곡을 하시오?”

“저는 옛날 이 댁 하인으로 있던 득이의 자식이올시다.

제 어미 생전에 돌아가신 마님의 은혜로 생명을 건졌다는 말을 들고 은인으로

여기며 살아왔는데, 그 마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그러한가? 그 일은 어머니께 들어서 나도 잘 아는 일이라오.

그런데 어떻게 머리를 깎게 되셨구려.”

“사실은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마님의 은혜를 갚을까 궁리하던 끝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20년간 오로지 풍수의 비법만을 배웠습니다.

 

후일 마님을 좋은 자리에 모셔 드림으로써 이 댁이 오랫동안 복을 누리시도록

하는 길만이 마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해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만동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사실 선산의 명당은 벌써 한 자리도 쓸 수 없이 들어차 있는 데다

집안이 기울어 지관에게 의뢰할 처지도 못되었던 터라,

돌아가신 어머니를 어디에 모셔야 할지 고민이었던 것이다.

 

성복을 치른 뒤 만동은 득이 아들이 봐놓았다는 자리를 함께 찾았다.

산지는 봉루가 지고 쑥이 우거진 무등산 골짜기로서, 이미 무덤이 봉긋하게 솟아

있는 곳이었다. “이곳이 가장 좋습니다.”

 

“아니, 여보게. 이곳은 이미 다른 산소가 있지 않은가?”

“아니올시다. 이곳은 천하의 명당이라 옛날에 누가 묘처럼 보이도록 표를 해

놓은 것뿐이고, 무슨 연유인지 그 뒤에 묘를 쓰지 않은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파보시면 무덤이 아닌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곳을 파보니 과연 무덤을 쓴 것이 아니라 표시만 해놓은 것이 분명하였다.

만동은 매우 기뻐하며 그곳에 모친을 모시게 되었고,

소임을 마친 득이 아들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집안이 차차 피어나기 시작하여 가산도 넉넉해지고,

10년 후에는 만동이 벼슬을 하여 승주고을로 부임하기에 이르렀다.

어느날 만동은 어머니가 묻히신 곳이 어떠한 명당인지 궁금하여,

인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지관과 함께 묘를 찾았다.

 

“이 자리는 초기에는 좋으나 나중에는 분명 화가 미칠 자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제가 참으로 자손만대까지 좋은 자리를 잡아 드리리다.”

 

만동은 고민하다가 지관의 말대로 이장을 결심하게 되었고,

날을 잡아 하인들을 데리고 묘를 파기 시작하였다.

그때 산에서 한 노승이 황급히 내려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여보시오! 누가 묘를 파시오? 잠깐만 기다리시오.”

일손을 멈춘 만동 일행이 살펴보니, 그 노인은 바로 수십 년 전의 득이 아들이었다.

만동은 반가워하며 어머니 묘를 이장하게 된 연유를 설명하였다.

 

“아뿔싸! 그것은 참으로 옳지 않은 일이옵니다.

제가 어찌 먼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묏자리를 정하였겠습니까.

이 자리는 참으로 자손만대까지 발복하실 명당입니다.”

 

“의논을 하고 싶어도 어디 계신지 몰라 고민 끝에 결정한 일이라오.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소?” “이제라도 과히 늦지 않았으니 그대로 메우는 것이

좋습니다. 그냥 두셨더라면 참으로 아무 탈없이 좋은 자리였을 텐데….

 

이곳을 파신 결과로 십여 년 후에는 나리마님께서 눈이 머실 것이나, 후대

자손들에게는 그지없이 좋으니 그대로 메우십시오. 자, 이곳을 한번 만져 보십시오.”

노승의 말대로 관 밑에 손을 넣어보니 과연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만동은 놀라며 말하였다.

 

“여보게, 그러면 다시 메우겠네만, 내가 눈이 먼다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절터를 잡아 드릴 테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불공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나리마님도 눈이 멀지 않고

명당자리를 파헤친 액땜이 될 것이옵니다.”

 

“반드시 그 말을 따를 것이니, 절터를 잡아 주시오.”

그때 노승이 만동에게 잡아준 절터가 바로 지금의 증심사 자리이며,

만동이 세운 절이 바로 증심사라는 것이다.

 

절을 지은 뒤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만동은 자기 어머니가 묻힐

자리를 잡아주기 위해 일생을 바친 스님의 명복을 매일 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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