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끼
우 초시네 데릴사위로 들어간 봉태 3년 일했지만 혼례 얘기는 없고…
나이 지긋한 옥졸이 감옥 안을 들여다보며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사람이 이 추운 감방에 갇혀…. 쯧쯧쯧” 한다.
목에 칼을 차고 얼굴을 묻은 채 흐느껴 울던 봉태가
“오늘 밤이 선친의 제삿날인데 절도 올릴 수 없으니…. 흑흑” 했다.
밤은 깊어 삼경이 됐다. 만물이 잠든 적막한 밤에 옥에 갇힌 젊은이 봉태의
오장육부를 쥐어짜는 울음소리만 옥창살로 빠져나왔다. 봉태가 살인미수라는
어마어마한 죄를 뒤집어쓴 건 말도 안된다는 걸 옥졸도 익히 알고 있었다.
봉태가 창살 사이로 옥졸에게 엽전 한닢을 내밀며 “나으리, 술 한잔만 놓고
절 한번만 올리게 해주시면 이 은혜 죽도록 잊지 않겠습니다.”
한참 천장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옥졸이 옥문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봉태의 목에 찬 무거운 칼을 풀어주며 “닭이 울기 전에 돌아오게.”
봉태는 감격에 겨워 옥졸의 두손을 잡았다. 축지법을 쓰듯이 단숨에 형님댁으로
달려간 봉태는 가까스로 제사를 올리고 대성통곡을 한 후 후다닥 문을 박차고
나가 처마 밑에서 시퍼런 낫을 빼들고 번개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봉태는 주인 나리 우 초시와 그의 새색시가 간통한다는 소문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시아버지 제사에도 오지 않은 걸 보고 그게 사실임을 확신하게 됐다.
봉태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팔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열세살 때
우 초시네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봉태는 또래보다 덩치도 컸고 영리했다.
우 초시의 외동딸 춘조는 봉태보다 한살 아래인 열두살로 나이가
차면 봉태의 색시가 될 참이었다. 봉태는 뼈가 부서져라 일했다.
세월은 어찌 그리도 굼벵이 걸음인가. 삼년이 지나 봉태가 열여섯이 되었을 때,
경칩이 지난 어느 날 우 초시가 불렀다. 은근히 우 초시 입에서
혼례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심부름을 시켰다.
한양으로 올라가 서촌에 사는 우 판관에게 서찰을 전해주라는 것이다.
우 판관은 우 초시의 동생이다. 생전 처음 한양을 가는 봉태는
조금 모아뒀던 돈과 노자를 아껴 춘조의 선물을 살 생각에 가슴이 설??다.
봉태는 열이틀 만에 한양에 다다라 지번을 찾아 서촌 우 판관댁으로 가
서찰을 전했다. 그리 높지 않은 무관, 우 판관이 형의 서찰을 읽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 한양은 처음이지? 사흘 동안 장안을
돌아다녀보게. 날이 저물면 우리 집에 들어와 건넛방에서 자고.”
봉태는 입이 찢어졌다. 이튿날부터 봉태는 한강을 구경하고 종로에 가서 춘조
선물로 눈을 질끈 감고 비싼 노리개를 샀다. 꿈 같은 사흘간의 한양 구경을
끝내고 우판관이 형님에게 전해주라는 서찰과 주머니를 받아들고 밀양으로향했다.
거의 한달 만에 집에 다다랐을 때는 밤이 늦었다. 사랑방에 들어가
우 초시에게 우 판관이 전해주라는 서찰과 주머니를 내밀었다.
서찰을 읽어보더니 “짠돌이! 쯧쯧쯧.” 우 초시가 혀를 찼다.
봉태는 날이 새면 춘조에게 줄 노리개를 안고 달콤한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이튿날 아침, 봉태는 제 방문을 잠그고 구곡간장이 찢어지는듯 짐승처럼 울었다.
봉태가 한양에 갔다 온 사이 우 초시의 외동딸 춘조가 시집을 가버린 것이다.
그때 우 초시가 문을 두드리며 “야, 이놈아! 내 얘기를 들어보고 울든가 해라.”
술상을 놓고 둘이서 마주 앉았다.
술 한잔을 단숨에 마신 우 초시가 “네놈이 지난해 여름밤에 토란밭에 숨어서
뒤뜰 우물가에서 멱 감던 우리 춘조를 훔쳐보다가 춘조 어미한테 들켜서
난리가 났지.” 또 한잔 마시더니 “그 이후로 네놈이 짐승처럼 보인다나.
네놈과 혼례를 올리느니 목을 매겠다 하니 … .”
봉태는 목구멍으로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술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너무 낙담하지 마라. 외가 쪽으로 질녀 되는 아이와
짝을 지어줄 터이다. 미모는 춘조가 반도 못 따라간다.”
봉태는 동구 밖 주막으로 가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다 주먹으로 상을
내리치며 “가시버시 될 색시 멱 감는 거 훔쳐보는 게 무슨 큰 흠이 된다고!”
주막에서 쓰러져 자고 그 이튿날도 술로 끼니를 때우는데 우 초시가 찾아왔다.
“야 이놈아, 네 색싯감 인물이나 한번 보고 술독에 빠지든지 통시에 빠지든지
해라.” “다 필요 없어~.” 냅다 지른 봉태의 고함에 처마 밑에서
자던 누렁이가 펄쩍 뛰어내렸다.
사흘 후, 주모 재촉에 봉태가 제 방에 숨겨놓은 돈주머니를 가지러
비틀비틀 집으로 갔다가 깜짝 놀라 발이 얼어붙었다.
대문을 열고 마당에 첫발을 딛던 봉태는 발이 땅바닥에 붙어버렸다.
이게 도대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가, 바다에서 솟구친 용왕님의 외동딸인가!
술을 퍼마시려던 봉태는 얼른 통시 옆 마당에 가 겨우내 쌓아놓은
산더미 같은 거름 옆에 바소쿠리 지게를 괘놓고 거름을 고봉으로 퍼 담았다.
거름더미를 지고 부리나케 대문을 나서는 봉태를 보고
우 초시는 사랑방 창문을 닫으며 빙긋이 웃음을 흘렸다.
한양 갔다 오랴, 주막에서 화풀이 술독에 빠져 있으랴, 천금 같은 봄날을
그냥 흘려버려 봉태는 별을 보고 밭에 나와 별을 보고 집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색시가 될 그 처녀가 새참으로 탁배기 호리병을 들고 왔다.
봉태 가슴이 쿵닥쿵닥 절구질을 했다. “한잔 받으세요”라며 손수 술을 따라주는
게 아닌가! 색싯감이 돌아가고 난 후 봉태는 뭔가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급한 농사일을 꺼놓고 혼례식을 올렸다.
딱히 꼬집을 수는 없는데 뭔가 찜찜했다.
어느날 안방마님이 친정어머니 병문안하러 친정에 갔는데,
이틀 후 저녁나절에 우 초시가 봉태를 불러 약 세첩을 처가에 갖다주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삼십리 길을 달려가 약을 내놓자 안방마님이 감격에 겨워
밥과 술상을 차려 봉태를 앉혔다. 밥상을 물리고 나니 삼경이 됐고
밖에는 추적추적 밤비가 내렸다. 술상을 머슴방으로 옮겨 이 집 머슴과
탁배기 몇잔을 마시고 자리에 누웠는데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봉태는 이 집 머슴의 코 고는 소리를 뒤로하고 살며시 방을 나와 장독을 딛고
담을 넘었다. 집까지 왔을 때 닭이 울었다.
봉태가 담을 넘어온 감나무 가지를 잡고 일지매처럼
안마당에 사뿐히 내려앉아 문간채 제 방문을 열자 빈방이었다.
밤비 속에 삼십리를 달려와 비 맞은 수탉 꼴이 된 봉태가 눈에 불을 켜고 사랑
방으로 가 문앞에서 “나으리~” 불렀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낙수 소리에
묻혀버렸다. 문고리를 두드리며 고함을 지르자 불이 켜지고 문이 열렸다.
우 초시가 졸린 눈을 비비며 “처가에서 자고 오지, 비를 맞고 이 밤중에…” 한다.
방 안을 들여다보니 아랫목에 우 초시,
윗목에는 색시가 이불을 덮어쓴 채 자고 있었다.
봉태는 툇마루에 낫을 내려놓고 색시를 깨워 문간채 제방으로 데려갔다.
“비가 쏟아지자 문밖에서 발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고양이 울음소리도….
겁이 나서 삼촌 방으로 갔지요.”
뭔가 미심쩍었지만 봉태는 쓰러져 곯아떨어졌다. 이튿날, 밭에서
쟁기질하고 있는데 포졸 둘이 와서 포승줄로 봉태를 묶어 관아로 끌고 갔다.
그 길로 살인미수란 죄를 덮어쓰고 옥에 갇혀 목에 칼을 차고 있었던 것이다.
옥에 갇힌 지 엿새, 선친의 제사 기일에 울고 있는 봉태를 늙은 옥졸이
제사만 지내고 닭이 울기 전에 돌아오라 하며 풀어줬던 것이다.
봉태가 낫을 빼들고 곧바로 우 초시 사랑방으로 달려가 끓어오르는 분노로
문을 당기자 문고리가 경첩을 물고 빠지며 사랑방 문이 활짝 열렸다.
이불을 낚아채니 우 초시와 새색시가 발가벗은 채 꼭 껴안고 있었다.
시퍼런 낫이 우 초시의 울대를 누르자 사시나무 떨듯이
온몸을 와들거리며 “모, 모, 목숨만 사, 사, 사, 살려주시게” 한다.
동창이 밝았다. 발가벗은 채 포박당한 두사람을 봉태가 끌고 동구 밖으로
나가자 구경꾼들이 길을 메웠다.
둘이 동헌 마당에 꿇어앉자 사또가 크게 꾸짖었다. “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다른 모든 죄를 제쳐놓고 질녀와 통정을 하다니!”
어물거리는 우 초시를 형틀에 묶자 곤장을 치기도 전에 이실직고했다.
봉태의 새색시는 우 초시의 질녀가 아니라 삼랑진 나루터 주막의 주모 딸이었다.
시집갔다가 쫓겨나 친정인 주막에서 일을 거들며 밤이면 제 어미 몰래
손님방에 들어가 몸을 팔아 음욕도 채우고 해웃값도 챙겼다.
가끔 황포돛배를 타고 삼랑진 포구에 내려 나루터 주막에 묵으며 주모 딸을
품고 자던 우 초시. 묵직한 주머니를 그녀에게 안겨주고 질녀라며 제 집에
데려와 봉태와 혼례를 치러주고 한달쯤 살다가 도망치도록 일을 꾸민 것이다.
사또의 판결이 내려졌다.
하나, 우 초시는 봉태에게 상머슴 새경으로 나락 스무섬을 지급한다.
둘, 우 초시는 봉태의 가시버시가 될 딸을 빼돌린 위약금으로 일금 삼천냥을
봉태에게 지급한다. 셋, 주모 딸은 사기에 가담해 순진한 총각을
속였으므로 우 초시로부터 받은 돈 오백냥을 봉태에게 지급한다.
봉태는 거금을 챙겨 늙은 옥졸에게 천냥을 건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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