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슬픔 ~찡한글

된장찌개와 편지

갓바위 2025. 10. 21. 11:07

 

된장찌개와 편지

 

도시에서 자란 서현은 늘 시골 친정 같은 남편 집에 가는 것이 불편했다.

남편의 어머니, 김 할머니는 굳은 손으로 밭일을 하며 평생을 살아온

소박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이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 속에서도 언제나 당당했고, 감정 표현에 서툴렀다.

 

매번 서현이 시댁에 가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된장찌개를 끓였다.

시골 된장의 구수한 냄새가 부엌 가득 퍼졌다.

그러나 서현은 그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도시 음식에 길들여져, 발효된 향이 콧속을 파고들면 괜스레 거북스러웠다.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그냥 반찬만 먹을게요.”

서현은 매번 부드럽게 거절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국자를 내려놓았다.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그 순간마다 서현은 할머니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찾아갈 때면 다시 된장찌개 냄새가 풍겼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 남편의 직장과 아이들의 학교 문제로 시댁에

자주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 갑작스러운 소식이 전해졌다.

시어머니가 새벽에 쓰러져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서현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슬픔보다는 죄책감이 먼저 밀려왔다. “나는 왜 그토록 어머니를 멀리했을까.

그분이 해주는 음식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었던가….”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남편과 함께 시골집을 정리하게 되었다.

낡은 부엌 한구석, 오래된 냉장고 옆에 세워둔 작은 장을 옮기다,

서현은 뜻밖의 봉투 뭉치를 발견했다. 노란 고무줄로 묶인 편지들이었다.

겉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서현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첫 번째 봉투를 열자, 다소 삐져나간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현아. 네가 밥을 잘 안 먹는 게 늘 걱정이었다. 몸이 너무 말라 보여서,

된장찌개라도 먹이면 건강에 좋을까 싶었다. 혹시 내가 억지로

끓이는 것 같아 미안하다. 그래도 네가 웃으면 나는 마음이 놓인다.”

 

편지는 짧았지만, 그 속에는 수줍고 서툰 애정이 담겨 있었다.

다음 편지를 열었다.

“며느리라는 이름이 너한테는 짐이 되지 않았을까 걱정된다.

나는 말도 고르고 마음도 전하지 못하지만, 늘 너의 행복을 빌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봉투. 글씨는 더 흐릿했고, 종이는 손때로 구겨져 있었다.

“서현아. 미안하다. 나는 좋은 시어머니가 못 되었다.

너를 편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내 마음은 늘 말과 다르게 나왔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변변치 않아, 결국 된장찌개뿐이었다.

그것조차 네가 싫어했을 텐데…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마지막 문장은 삐뚤어진 채로 끝을 맺고 있었다.

“미안하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된장찌개뿐이었다….”

 

편지를 다 읽고 난 서현은 부엌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았다.

그동안 거절했던 그릇마다, 그 속에 담겨 있던 건 단순한 국물이 아니라,

할머니의 걱정과 사랑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서현은 눈물로 얼굴이 젖은 채, 남편을 바라보았다.

“여보… 나, 된장찌개 배우고 싶어. 어머니처럼.”

남편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해보자. 어머니가 쓰시던 된장이 아직 남아 있어.”

 

다음 날 아침, 낡은 부엌에서 남편과 함께 냄비를 올렸다.

된장을 푼 국물이 끓어오르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냄새가 피어올랐다.

서현은 국자를 들고 눈을 감았다. 한 숟가락을 떠 올리자 눈물이 또 흘러내렸다.

“어머니… 이제야 알겠어요. 이 맛이… 당신의 사랑이었군요.”

 

그녀는 흐느끼며 국을 저었다. 끓어오르는 된장찌개 속에서,

자신이 그동안 거절해 온 사랑이 서서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부엌 가득 퍼지는 냄새가 이제는 더 이상 거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향은, 따뜻한 품처럼 서현을 감싸 안았다.

 

그날 저녁, 온 가족이 모여 된장찌개를 먹었다. 민서와 지우, 두 아이가

젓가락으로 건더기를 집어먹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은 조용히 아내를 바라보다 말했다.

“어머니가 보셨다면… 정말 기뻐하셨을 거야.”

 

서현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라도…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 식구 지킬게요.”

그녀의 앞에 놓인 된장찌개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뒤늦게

깨달은 사랑의 편지였고, 사라진 시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리고 서현은 그 뜨거운 국물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천천히 삼켰다.

 

펴냄/노자규의 골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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