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상식

백중 ,백종, 우란분절

갓바위 2008. 11. 14.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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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 ,백종, 우란분절

백중(百中)

음력 7월 15일을 우리말로 백중이라 하고 한자로는 百中, 百種, 百衆 또는 中元이라 한다.

신라 때에는 백중 다음날부터 가윗날까지 한달 동안 길쌈내기를 했다고 하는데 예로부터
남녀가 모여 온갖 음식을 갖추어 놓고 노래하며 춤추고 즐겁게 노는 날이었다.

또한 이날 달이 뜨는 밤이 되면 과일, 채소, 술, 밥 등을 차려 돌아가신 부모(亡親)의 혼(魂)을
불러들여 제사(祭祀)를 지낸다고 해서 백중을 망혼일(亡魂日)이라 하기도 한다.

도교(道敎)에서는 천상(天上)의 선관(仙官)이 일년에 세 번 인간의 선악을 살피는데
그 때를 원(元)이라 한다.

1월15일을 ‘상원(上元)’, 10월15일을 ‘하원(下元)’이라고 하며 7월15일의 ‘중원(中元)’과 함께
‘삼원’이라 해서 천신과 별자리에 제사를 지내는 초제(醮祭)의 세시풍속이 있다.

도교에서는 중원에 지내는 초제를 중원보도(中元普度)라 하는데 불교가 전래되면서
이 중원보도가 백중과 융합되었다고 한다.

불교(佛敎)에서는 부처님의 제자 중 효성 제 1 이라는 목련(目蓮)존자의 일화에서 유래된
조상의 혼을 천도하는 우란분공(盂蘭盆供 혹은 우란분재)이 행해지는 날이 바로 백중이다.

우란분재를 올릴 때는 온갖 과일을 바치기 때문에 이날을 백종(百種: 백 가지의 과일과
곡식)이라 한다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날은 3개월 간의 하안거가 끝나고 스님들의 자자가 행해지는 날이기도 하다.
이처럼 백중은 우리의 세시, 불교 그리고 도교의 행사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아주 이채로운 날이다.


우란분재(盂蘭盆齎)와 우란분재의 의미

백중을 불가에서는 우란분절 혹은 우란분재일이라고도 하는데 이 우란분재라는 말은
<목련경>과 <우란분경(盂蘭盆經)>에서 그 유래와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목련경>은 죽은 목련의 어머니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목련이
지옥을 순례하는 이야기이며, <우란분경>은 목련의 효성을 실천할 수 있도록 그의 소원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경전이다.

이들 두 경전은 똑같이 목련의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해내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나
<목련경>이 주로 지옥의 묘사에 많이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란분경>은 우란분재의
의미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어디까지나 우란분재의 신앙적 가치를 주로 다루고 있다.

이 때문에 <우란분경>은 우란분재의 신앙적 가치를 설하는 경전으로
오랫동안 권위를 인정받아 왔다.


우란분재의 발단

<목련경>과 <우란분경>에 의하면,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신통제일이었던
목련(目連)존자가 비록 육신통(六神通)을 얻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귀도(餓鬼道)에 빠진 그의 어머니를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부처님께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목련존자에게 스님들의 안거가 끝나는 음력 7월 15일에
승재(僧齎: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의식)를 베풀면 그 공덕으로 이미 돌아가신
부모를 구제할 수 있다고 일러주셨다.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청정한 계행을 갖춘 스님들의 도는 그 덕이 바다와 같이 넓고 깊은데
이날 자자(自恣)를 하신 스님들은 바로 그러한 스님들이므로 자자한 스님들께 공양하는
중생은 칠세의 부모와 육종친속(six kinds of relatives 六種親屬)들이 모두
삼도(three evil paths 三途)의 고통스러운 길에서 벗어나고 해탈을 얻으며
의식(衣食)이 저절로 갖추어지게 된다고 한다.

동시에 스님들은 대중들이 올리는 우란분의 공양을 받을 때에는 반드시 공양을 올린
사람과 그 가정, 그의 과거 칠세 부모를 위하여 축원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선정에 든 후에
공양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목련존자는 부처님이 일러주신 대로 안거가 끝나고 자자를 행한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림으로써
스님들의 넓은 공덕에 힘입어 그의 어머니를 구제하게 되는데 이것이 우란분재(盂蘭盆齎)의
시초이다.

즉, 우란분재가 행해지는 음력 칠월 보름은 하안거를 해제하는 날인 동시에 대중 앞에서
그동안의 수행을 점검하는 포살(布薩)을 행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백중을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이 기뻐하는 날’이라고 한다.

불교의 오대명절 중의 하나이기도 한 백중은 하루 내내 절에서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목탁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나오는 기도의 날이다.

우란분재는 우리가 여러 생을 윤회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선망부모와 친지들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들의 명복을 비는 바로 그런 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란분이란 무슨 의미일까? 그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우란분(盂蘭盆)의 의미

‘우란분’은 범어 ‘울람바나(Ullambana)’를 중국에서 ‘우란분(盂蘭盆)’ 또는
‘오람바나(烏藍婆拏)’라고 소리나는 대로 번역한 역어이다.

구도현(救倒懸)이라는 뜻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구도현이란 거꾸로 매달린 것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사실 ‘울람바나(Ullambana)’라는 단어는 범어사전에 없는 낱말이다.

울람바나는 형용사 람바나(lambana) 혹은 아와람바나(avalambana)가
변형된 말이기 때문이다.

울람바나(Ullambana)는 형용사 람바나에 ~위에를 뜻하는 접두사 U가 첨가된 단어다.

‘람바나’는 아래쪽으로 매달린 혹은 거꾸로 매달리게 하는 것이란 뜻이며, ‘아와람바나’는
매달린 또는 기댄의 뜻이다.

이 때문에 울람바나를 ‘거꾸로 매달린 것을 구제한다’는 의미의 구도현(救倒懸)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원어의 의미를 정확히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란분은 쉽게 말하자면 거꾸로 매달린 자의 고통을 뜻한다.

서서 사는 인간에게 거구로 매달린 자세는 가장 고통스럽고 부자유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에
육체의 부자유, 정신의 부자유가 바로 우란분인 것이다.

즉, 고통과 부자유를 특징으로 삼는 지옥의 의미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란분재의 의미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우란분의 재(齎) 즉, 우란분재는 생전에 지은
무거운 죄업으로 중생들이 지옥에서 거꾸로 매달려 심한 고통을 받을지라도,
자자를 행하는 음력 7월 보름 시방의 청정한 스님들과 부처님께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을
올림으로써 그 공덕으로 인해 그들을 극락 왕생케 하는 의식인 것이다.

즉, 우란분재는 사실 효를 강조하기 보다 스님에 대한 공경이 얼마나 큰 덕을 쌓는
행위인지를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선망 구제, 승공(僧供)을 목적으로 우란분재를 행하는 불교의 명절을
우리는 우란분절이라 부른다.


백중 또는 백종(우란분절)의 유래와 의미

우란분절을 맞이하여 공양을 올리는 불자들
우란분절(백중,백종) 의 유래와 의미

매년 음력 7월 보름은 스님들이
여름 안거(집중 수행 기간)를 끝내는 해제일이다.

세속에서는 백중(百中)이라 부르는데, 불교에서는
우란분절이나 우란분재라 하여 특별히 조상을
천도하는 행사를 봉행한다.

불교 5대 명절 중 하나인 우란분절의  유래는
<목련경>과 <우란분경>에 자세히 수록돼 있다.

이 우란분절법회는 안거수행 대중에게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제한
목련존자의 효행에서 비롯되었다.

목련존자가 신통력을 얻은 후 천안으로 어머니를 찾아보았더니 어머니가 무간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구제할 방법을 부처님께 여쭈었더니 그때에 부처님께서 지금 살아있는
부모나 7대의 선망부모를 위하여 하안거 해제일에 음식, 의복, 등촉, 평상등을 갖추어
시방의 고승대덕들에게 공양하던 그 공덕으로 지옥의 고통에서 구할 수 있다고 하며
그대로 행한데서 유래한다.

우란분절을 맞이하여 안거를 마치고 공양을
                받는 수행자 스님들
이를 요약하면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신통제일
목련존자가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가
악도(惡道)에 떨어져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고
부처님의 ‘방편’력으로 악도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방편’이란 7월 보름 하안거를
마친 스님들께 ‘대중공양’을 올리는 일이다.

‘대중공양’이란 음식과 의복, 약 등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물건들을 스님들께 보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 보시공덕으로 조상이 천도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백중 날 대중공양을
받는 대신 ‘조상 천도재’를 지내는 것으로 대신해 왔다.


세시로서의  백중,백종의 유래와 의미

백중(百中) 또는 백종(百種)이라 불리는 음력 7월 보름의 세시는 이 무렵에 여러 가지 과실과
채소가 많이 나와 백가지 곡식의 씨앗을 갖추어 놓았다고 하여 유래된 명칭이다.

이날 민가(民家)에서는 달이 뜨는 밤이 되면 과일, 채소, 술, 밥 등을 차려 돌아가신
부모(亡親)의 혼(魂)을 불러들여 제사(祭祀)를 지낸다 해서 백중을 망혼일(亡魂日)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도교의 영향이라 한다.

입하(立夏)로부터 시작되는 여름은 밭매기와 논매기 등 농사일이 한창인 계절이다.

그러나 ‘어정 7월, 동동 8월’ 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농촌의 7월은 바쁜 농번기를 보낸 뒤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가을 추수를 앞둔 달이어서 잠시 허리를 펼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절기상 농한기(農閑期)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에 들어 있는 백중은 농사일을 멈추고, 천신(薦新) 의례 및 잔치와 놀이판을 벌여
노동의 지루함을 달래고 더위로 인해 쇠약해진 건강을 회복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음력 4월 초파일과 백중을 일년중 가장 큰 행사로 여겼다.

민간에서는 이 날이 고된 농사를 끝내고 벌이는 칠월의 세시 명절이다.

세벌김 매기인 만두레를 끝낸 다음 벌이는 농민 및 머슴들의 대동굿으로서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최대 축제일이었다.

불자들은 한여름의 풍성한 과일이나 햇곡식을 들고 절을 찾아 스님들께 공양하거나
조상천도를 위한 재를 올린다.

칠석과 백중을 지내는 마음가짐




스님, 저는 불법에 인연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절에 다닐 생각을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출근 할 때 선원 앞을 지나다가 선원 벽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 ‘마음을
밝히는 칠석, 은혜를 갚는 백종’이라고 쓰인 문구를 보고 의문이 생겨 질문을 드립니다.

그것을 보면서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통 풍습인 칠석이나 백종이 그토록 큰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 한번 참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지요.




칠성이라는 거는 내 몸과 더불어 같이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칠성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산 사람들을 위한 거죠. 산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동시에 미래로
자꾸자꾸 가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를 둘로 보지 않는다면 칠석과 백종은 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백종은, 우리가 죽으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거니와 바뀌어서 짐승이 사람도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기도 하는데, 우리가 생시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칼산지옥 화탕지옥,
또 오무간지옥 독사지옥 등 이러한 이름들이 허다 많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독사로 태어났다면 그게 독사지옥입니다.

허물을 입었으면 다시는 벗기가 힘들다 이겁니다.

그 독사의 모습을 벗기가 힘들어서 사람 되기가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화탕지옥이다 하는 것도 우리가 또 얼마 안 있어서 끓는 물로 들어가고, 불 속으로 들어가고,
수십번 그냥 돌아가면서 들어가는데 그것이 어찌 화탕지옥이 아니겠습니까?

또 때로는 칼로 그냥 산 놈을 탁탁탁 쳐서 모두 먹죠?

그런 거를 볼 때 그게 어찌 칼산지옥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두 칼산지옥이니 화탕지옥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냉정하게
현실의 삶 그대로입니다.

현실 그대로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지옥도 하나하나, 화탕지옥이니 독사지옥이니
모두 보고 있습니다. 보면서 하고 있고 그럽니다.

나는 지금 현실을 얘기하는 겁니다.

무슨 옛날 얘기 하는 게 아니고 미래 얘기 하는 것도 아니고, 그대로 현실 얘기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이렇게 이렇게 되고, 또 사는 동안에도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하고,
이렇게 이렇게 산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이렇게 살면 다음 세상에 나올 때도 또 이렇게
살게 되니까 그거는 뭐 독 안에 들어도 면치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마음공부를 열심히 해서
독 안에서 벗어나라 이 소립니다.

내 몸 통이 독이니까요. 내 몸 통이 독 안과 같아요. 통과 같아요.

이 몸 통 안에서 벗어나야 지구에서도 벗어나고, 지구에서 벗어나야 우주 세상에서도 벗어나고,
우주 세상에서 벗어나야 자유인인 것입니다.

그러니 왜 백종을 지내는지 아시겠죠? 부모가 예를 들어서 닭으로 화해서
이 세상 지옥고에 떨어졌다,

물고기로 태어나고 또 소로 태어나고 뭐 독사로 태어나고, 가지각색으로 태어났다 하는
그런 틈에 끼었다 이런다면, 여러분이 천도재를 지극히 해서 그 몸을 벗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백종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나오죠? 그런 때 더러더러 나오죠.

그런 경우와 같이 백종 때는 남한테 모함 받아서 들어왔던 사람, 지극하게 다시 마음을
다잡은 사람,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백종날 다 내보내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천도재를 세 번 네 번 지내도 그거를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된 집도 있습니다.

그런 집들은 자꾸자꾸, 그저 되는 대로 해야죠.

그렇다고 빚지고 하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내가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으면
자연적으로 좀 나아지게 됩니다.

나아지면서 마음먹은 대로 다 하게 되죠. 그러니까는 그렇게 해 나가신다면 조상님들이
다시 모습이 변화돼서 인간으로 될 때에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또 변화가 돼도 또다시 그러한 문제를 짊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요다음에 또 그와 같은 문제들을 끌고 가야 하니까요.

하여튼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살아가는 게 말입니다.

그냥 죽으면 고만이지 그러지만 그게 아니죠. 내가 콩씨 얘기도 가끔 하고 무우씨 얘기도
가끔 합니다. 무우씨 싹이 말입니다,

싹이 없어지면 그만이지 이러지마는 그 종자가 있어서 심으면 또 나오거든요.

그러니 ‘그만’이라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영원토록 돌아가야죠.

그러나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콩씨가 팥씨가 될 수도 있고, 팥씨가 콩씨가 될 수도 있고,
또 아주 상승의 사람 종자가 될 수도 있고, 또 그냥 하(下)의 종자가 될 수도 있죠.

이런 자유자재권은 바로 여러분의 마음먹기에 달린 거죠.

그러니까 칠석이든 백종이든 그 의미를 가벼이 생각하지 마시고 정성을 기울이면서
열심히 노력하셔서 성취하십시오.

또 백종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는 그대로가 백종입니다.

우리 자체가 그대로 무심(無心)세계, 유심(有心)세계 둘이 아니게 지금 돌아가고 있습니다.

무심세계 유심세계가 둘 아니게 정신과 물질인 몸이 둘이 아니게 돌아가고 있으니 항상 하얀
백종이죠. 여러분이 다 그렇게만 하실 수 있다면 현실 과거 미래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 항상 영원하게 자유자재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생기도록 노력하십시오.




공부하면서 경계해야 할 문제

10년 만에 찾아온 무더위라고 합니다.

바깥 상황도 그렇고 경제적으로도 어렵다 보니 마음이 조금은 나태해지고
내면으로 들어가는 힘이 부족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차제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 계기를 마련하려 하오니 마음 도리를 공부해
나가면서 꼭 이것만은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경계의 말씀과 지침이 될 만한 가르침이 있다면
말씀하여 주세요.




공부를 하다 보면 공부라는 게 별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서 사는 게
공부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항상 얘기하지만 생명이 이 세상에 나오면 불(佛)이요, 나와서 세상 돌아가는 걸 배우는 것이
바로 교(敎)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살림살이를 빼놓고 불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간편하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어렵게 믿지 마시고 간편하게 믿으세요.

내가 움죽거리는 것이 다 공부니까요.

또 움직이면서도 흔들림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참선이고요.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히면 좌선이요,

누워서 하면 그대로 와선이 되고요. 앉든 서든 그대로입니다.

일을 하다가 생각을 하면 행선이 되니, 그대로만 실천을 한다면 일체 행이
그대로 참선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마음 안으로 들이대야 합니다.

바깥으로 믿는 게 아니라 안으로 들여서 믿고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다 거기다가 맡기고,
잘됐으면 ‘감사하구나!’ 하고, 또 잘 안됐으면 ‘안된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거기다 놓고, 이렇게 굴려 가면서 하다 보면 말이 자꾸 하고
싶어질 때가 옵니다.

거기서 감응이 되고 그 감응이 이제 좀 지나고 보면 말이 자꾸 하고 싶을 때가 와요.

말이 하고 싶을 때에, 어떠한 말을 해야 하느냐.

남이 물어보면 관(觀)하는 도리만 얘기해 주고 자기가 이만큼 배웠다고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또 그 다음에 이것이 옳은 거라고 내세우지 말고 어떤 것이 안됐다고
내세우지도 말라 이겁니다.

‘안됐다 잘됐다, 이게 옳다 그르다, 또 나는 이만큼 했으니까 이만큼 갔다.’ 이런 말은
안 해도 자기가 말하는 거 보면 자기를 내세운 게 되거든요.

여러분은 자기가 없는 도리를 지금 배우는 겁니다.

항상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죠.

만약에 바깥으로 끄달리고 자기를 내세우고, 잘됐다 못됐다 이거를 내세우다 보면
공부는 팡이라고요. 제자리를 갈 수가 없어요.

럭하다 보면 바깥으로 자꾸 끄달리게 되고, 쪼끔쪼끔 가다 보면 자기가 그만
빈집이 되고, 자기 선장은 간 곳이 없죠.

그럭하면 영계성으로 구차한 일들이 벌어지죠.

그래서 단전호흡을 한다고 하면서 바깥으로 몸으로 끄달리다 보니까, 몸도 바깥이거든요,
이게. 물질계거든요. 그래서 바깥으로 끄달리다 보니까 영계가 들려서 야단인 사람도 있고,
정수리로 뜨거운 게 김이 올라와서 귀로 들리고 야단인 사람도 있고, 몸이 떨려서 야단하는
사람도 있고, 몸을 부지를 못하고 그냥 뛰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가정이 파괴가 되고,
자식들은 이리저리 떠돌게 되고 모두 이렇게 되는 수가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기복으로 믿으면서 바깥으로 자꾸 끄달리고 무슨 무슨 부처님 부르고 이렇게 아주
지극 정성으로 하는 사람이 영계성에 걸리게 되는 겁니다.

이 집 저 집 떠다니고 기웃거리는 그런 영령들이 들어서게 돼 있거든요.

그러니 영령이 들어서는지도 모르고, 자기 몸에 있는 자체도 지금 모르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면 그냥 아주 간 사람이 되죠. 맛이 간 사람이 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참, 자기 혼자 그런 것도 뭐하지만 가정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한테 극히 조심하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 나쁘다 좋다, 밉다 곱다 또는 잘한다
못한다 이런 거를 염두에 두고서 항상 꼬집고 미워하고 ‘저런 거 없어지면 차라리 낫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말과 생각, 그것이 바로 모두 업이 됩니다.

그러니까 말을 하면 구업이 되고, 마음으로 하면 의업이 됩니다.

이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그럭하면 안 되죠. 왜냐하면 바깥에서 닥치는 거, 미운
거 고운 거 이러더라도 ‘밉다 곱다’ 하질 말고 안에다가 ‘저 사람이 저렇게 하는 것이,
저 사람이 미운 게 아니니깐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맡기고 부드럽게
말하고, 부드럽게 행동해 줘라 이런 말을 항상 하죠. 그래야만이 업이 녹는다는 얘기죠.

그러신 양반들도 많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술을 마시고 그러더니 자꾸 관(觀)하고 부드럽게 말해 주고 부드러운 행동을 해 주니까
어느 날 그냥 술도 먹는 게 없어지고 그렇게 가정이 화목하게 돌아가더라구요.

그 마음을 그렇게 밉게, 그냥 말을 악하게 하고 그렇게 되면 점점 더 악은 모아지는 겁니다,

없어지는 게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 극히 조심을 해야 합니다. 남을 미워하든가 또 자식들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더디고 좀 느리고 이런 거는 있을지언정 그게 없어지지 않는 건 아닙니다.

꼭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얘기해 드리듯이 녹음기에 자동 녹음이 됐는데 자동으로
또 거기다 입력을 하면 그 앞서 입력이 없어진다고 했죠. 그러니깐 잘라도 아니 되고 끊어도
아니 됩니다.

업을 끊을래야 칼로 물 베기죠. 그게 안 됩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그렇게 해서 녹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지금 말씀드리는 거 소홀히 듣지 마십시오.

첫째, 이 공부하는 데에 도로아미타불을 만드는 그런 이치가 있는 것은 잘됐다 못됐다, 또는
옳다 그르다 이런 말을 남한테 하고 자기를 내세우고 이러는 것이 제일 문제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내가 아무리 속이 상해도 내 안으로 놓고 부드럽게 얘기해 주고 부드럽게
행동을 해야만이 수없는 광년을 거치면서 나온 업식이 거기에서 녹게 되고, 관습과 업식이
다 녹아야 하늘에서 인정을 받고 해인(海印)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열쇠를 얻는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우리가 공부해 가면서 습을 떼어 가면서 모든 거를 같이 해야 됩니다.

이 세상에 이 모습을 가지고 얼마나 살겠습니까?

얼마 안 남았습니다.

한 철 사는 기간 동안에 그거를 다 다스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요다음에 또 나와서 고생을
또 해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요다음 생에 또 나와서 고생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지금 현실에서 자기 위로는 부모와
아래로는 자식들과의 연관성을 몰라라 할 수는 없죠. 항상 이렇게 염주알 꿰여 있듯이
그렇게 꿰여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네들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빨리 성취를 해야 빨리 그네들도 따라서 성취가 됩니다.




위대한 법이 생활 속에 있다는데 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아도
오고 감이 없이 전달이 되고 미국이다 할지라도 마음만 내면 서로 전달이 되고 돌하고도
전달이 된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우리 생활 속의 법이라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위대한 법이 우리 이 삶 속에 있는 것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일체 만물과 더불어 같이 말을 하고 들으면서 서로 공생하고 공체로서
돌아가며 조화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살이며 부처며 그것이 인간이며, 그것이 법신이며 보신이며 화신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뱃속에는 청룡 황룡이 없습니까?

여러분의 뱃속에도 바로 청룡 황룡이 지금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정맥 동맥이 꿈틀거리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하나 움죽거리는 게 용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삼각원형을 이루고 돌아가면서 우리는 지금 부처를 자기한테다 두고 자기 몸뚱이는
탑돌이를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변소에 들어가면 부처가 없습니까?

법당에 들어가야만 부처가 있습니까?

법당의 형상만 부처입니까?

자기 형상은 보지 못하고 이러고 살고들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형상이 자기 형상이요,

그 마음이 내 마음이요, 모두가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신다면 아마도 부처님이, 그 부처님 마음이 바로 자기 마음이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것을 부처가 알고 부처가 아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으니 껄껄 웃을 겁니다.

한번 하늘을 쳐다보고 웃고 한번 땅을 내려다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비로
이 만물을 다 법비로써 적셔 줄 것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살면서 부처가 돼야지, 내가 위대하게 돼야지, 이런 적이 없어요.

왜? 사람은 어디까지나 지옥을 거치지 않는다면 부처를 이룰 수가 없듯이 겪어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가 없어요.

자기가 경험 안 해 본 것은 아픈 줄도 몰라요. 아, 남이 그렇게 아팠다더라 이런 정도지
그렇게 실감나게 알지 못해요.

어디고 한 번씩은 다 들어가서 물 속에 빠져보기도 하고, 불 속에도 뛰어들어 보기도 하고,
떡그릇에도 엎드러져 보기도 하고…, 번연히 알면서도 엎드려져 보는 그러한 패기가
있어야 하고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이 공부는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비구 비구니가 따로 없고 여자 남자가 따로 없고, 애 어른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적부터 어른입니까?

어른 된 지 며칠이나 되십니까? 또 늙었으면 애 된 지가 며칠이나 됐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모습을 바꿔서 옮겨 갈 뿐이지 죽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생사윤회에 걸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본래 온 것이 없기 때문에 본래 갈 것도 없습니다,

이 모두가요. 이렇게 된 상황을 잘 아신다면 사량으로만 알고 이론으로만 알아서도
그 속의 근본을 몰라서 자비가 나오질 않아요.

스스로 자비가 나와야 할 텐데 스스로 자비가 나오질 않으니까 가상적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니 그게 되나요?

가다 가다가 그냥 그것은 어디로 가 버린 채 금방 자비를 냈건만도 그건 말뿐이고
이론뿐이었지 돌아서면 그냥 도둑놈이에요.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자면서 먹을 줄 알아야 하고, 먹으면서 쌀 줄 알아야 되고,
싸면서 잘 줄을 알아야 한다.

이건 끊임없는 길을 말하는 거죠. 자는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이 그 공한 한 점에서
나오는 거 한 점에다 다시 맡겨 놓는 작업을 하는데, 습이 다 떨어져서 녹아 버리니까 그만
푹 쉰 거를 말하는 겁니다.

그 푹 쉰 사람이, 빈 그릇이 된 그 사람이 만약에 이 모든 법을 굴린다면, 하나 깔축없이
걸림 없이 굴릴 거라 이겁니다.

담았다 꺼냈다 담았다 꺼냈다 해도 항상 그릇은 비워 있을 테니까.
그러니 그렇게 담았다 꺼냈다 담았다 꺼냈다 하는 게 아니라 담으면 싸 버려,
담으면 싸고 담으면 싸면서 또 자죠. 이 세 가지의 이 뜻이 우리 평생을 배워도 못다 배우는
이런 진리가 거기에, 근본이 거기 들었어요.

그래서 자고 먹고 싼다 하는 그 세 마디에 부처님 법이 다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여러분 생활의 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조상님의 분묘에 대해서 며칠 있으면 칠석과 백중이 다가옵니다.

제가 질문드리고 싶은 것은 행으로 옮길 내용으로 조상님들의 분묘에 관한 사항입니다.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물자가 풍부해져서 요즘은 농촌에서도 땔감을 나무로 하지 않고
프로판가스 등으로 대치를 하다 보니 산의 풀을 베지 않아 성묘길이 온통 덤불투성이로
변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벌초하기도 힘이 들고 해서 차제에 조상님들을 화장하여 영탑 공원에
모시고 싶은데 묘소를 잘못 손대면 큰 화를 당한다고 집안 어른들이 말리는 실정입니다.

그래도 실행을 해도 되는지 궁금하여 질문드립니다.




그런데 그것도 관습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잘 통해서 세상을 보고 세상이 돌아가는 거를 잘 파악해서
행하시도록 하셔야 될 겁니다.

예전에는 예전대로 그러한 시대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이름도 달라졌고 땅덩어리도 좁아졌고 시대가 시대니만큼 그러한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그럼 차에다 싣고 금방 갈 것을 마차에다 싣고 가시려고 고집하시겠습니까?
안 그럽니까? 그런 거와 같이 지금은 지금대로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아, 내가 하고 싶으면 그대로, 이게 우리가 지수화풍으로 뭉쳐진 거니까 물 한 그릇 떠 놓고
밝은 불, 향 켜 놓고 삼배 올리고 주인공에다 다 맡기고 다 소해서 물이나 산에 끼얹어 버리고,
그리고 위패를 만들어서 다라니에다가 싸서 탑에 모시되, 한 가정에서 탑 하나만 마련하면
항상 되들어가고 되들어가니, 그래서 돈도 안 드니 좋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인제는 자손들이 산으로 산으로 찾아다니기에는 어려운 시절입니다.

산으로 산으로 찾아다니면서 묘를 보살피고 성묘하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세상이 바삐 돌아가고,
또 젊은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오히려 부모들이 그런 요구를 한다면 염치없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자라날 자손들을 위해서는 시대에 따라서 사람이 사는 도리에 맞추어서 그대로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왕 영탑에 모시려고 마음을 냈고, 또 현실적으로도 성묘를 다니는 일이 어렵다고
하니까 집안 어른들께 잘 말씀드리고 상의들 해서 그런 관습에 얽매이지 마시고 마음먹은
그대로 돌아가는 대로 하십시오. 그게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이니까요.





성품을 본 후의 공부 과정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따로 이름을 부를 것도 없는 자기 자신인데, 다만 우리들이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까 그것이 본래 나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방편으로 붙여 둔
이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성품을 본 이후에는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요?





보림을 잘해야 합니다.

첫째도 보림이요
둘째도 보림이다 이겁니다.

첫째도 죽어야 하고 둘째도 죽어야 하고 셋째도 죽어야 합니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먹은 마음이 이후 회향할 때도 똑같아야 합니다.

세울 것이 없는 게 일체 처입니다. 세울 게 없다는 것은 프로펠러 돌아가듯 하는
만법의 작용이죠. 그 작용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성품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성품에서 나오는 작용을, 만법의 작용을 심봉이 있어야 프로펠러가 돌아가듯
내 한생각에 꿰어들 수 있다면 바로 그게 도, 바로 진여자리, 진(眞)입니다.

그래서 일체를 놔서 보림하고, 보림하는 사람조차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게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체험하면서 거기다 다시 보림하기가 상당히 어렵더라는 얘기죠.

모든 작용을 하나하나 듣고 봤다고 해서 꿰어 든다면 그것은 진짜 보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봤을 때 하나하나 체험하고 놓고, 보고 체험하고 또 놓고, 듣고 체험하고 또 놓고….
부처님께서 갈빗대가 몇 갠지, 숨쉬는 것까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알고 있는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금방 요리 변덕 조리 변덕 그러니 어떤 것을 생각했다고 지적하겠습니까.

자기도 지적을 못하는 반면에 여러분도 지적을 못합니다.

모든 것을 지적할 게 없음으로써 그대로 보림을 하는 것입니다. 바깥으로 난설을 하고
바깥으로 풍기고 바깥으로 안다는 소리를 하고, 밖으로 “너는 오늘 누굴 만났지”
“요런 생각을 했었지?” 하고 아는 소리를 한다면 마구니에 말려서 세세생생 끄달릴 겁니다.

그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자기 주장자를 봤어도 자기 주장자를 봤다는 착을 둔다면 고정된 관념 속에 착을 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품으로 하여금 작용하는 것이 다 한군데서 나오니 한군데다 놓게 된다면
일체 만법이 돌아가는 그 심봉을 바로 자기가 느낄 때 그 심봉은 자기가 일체 만법의 돌아가는
그 프로펠러를 꿰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거를 꿰들지 못하고는 생동력 있고 여여한 삶을 살 수가 없게 되는 거죠.

고정됨이 없어서 두루 걸림이 없이 본래 돌아가는 것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이거를
세세히 가르쳐 드리느라고 이렇게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말할 건덕지가 없어서
말을 해도 안 되고, 이것을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일체 만물이 없었더라면 내가 이 법을 어떻게 배웠을까? 어떻게 느꼈을까?

그렇다면 저분들이 바로 나인 것이고 바로 내가 저분들인 것을 어찌 내가 말할 게 없다고,
그 말할 것 없는 것마저도 놔야지 말할 게 없다고 해서 거기에 또 착을 둔다면 이것 또한
면목이 없지 않느냐.”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볼 면목이 없다면 역대에 내려오신 부처님 볼 면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계시는 한 부처님은 죽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이렇게 앉아서 설하셨고 지금도 이렇게 앉아서 설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모습을 보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습은 항상 변질돼 돌아갑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그 뜻을 알려면 바로 아까 얘기해 드린 그 성품의 작용을 바로
한군데에 놔야 된다는 얘깁니다.

공한 데서 나오는 것 공한 데다 놔야 그 보림이 완벽해서 그 보림마저도 토했을 때
바로 또 다시 찰나찰나 돌아가는 작용을 그대로 또 다시 체험하고 놓으면서
보림을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찰나찰나 나투면서 무의 법 유의 법이 그대로, 악과 선이 다 한데
합쳐져서 항하사 모래알같이 많아 세울 게 없으나,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그대로 역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나를 기준해서 착을 두고 내가 이렇게 깨쳤으니까, 이렇게 나를 봤으니
이렇게 해야겠다 이런 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는 것이지 말이 전달돼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니 우리 일생동안
살아가면서 이 몸을 받아 가지고 나와서 나의 성품의 작용인 줄 모르고 또 성품의
작용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성품이 작용하는 것에 착을 두지 말고 모든 걸 몰락 놔서
다시 보림을 다시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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