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 어둠속 등불

욱면비염불승(郁面婢念佛昇)

갓바위 2015. 5. 8. 11:32
 욱면비염불승(郁面婢念佛昇)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욱면비염불승
(郁面婢念佛昇)이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때는 신라 경덕왕 당시였다. 
지금의 영주(榮州)근방이라 할 수 있는 
강주(康州)에 있었던 일인데 귀진(貴珍)
이라고 하는 높은 벼슬아치 집에
"욱면(郁面)"이라고 이름하는 마음씨 아주 곱고 
착한 여자종 하나가 있었다. 
욱면은 불심이 강한 주인을 따라 절에 다니다가 
염불을 지성껏 외우면 극락왕생한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염불을 주인보다 십배 백배 더 외웠다 
이렇게 어디서고 잠시의 시간만 있어도
 염불을 외웠다. 어느날 그날도 주인을 따라
 절에 갔는데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욱면은 
자기몸이 갑자기 솟구쳐[現身]하늘로 
붕 떠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광경을 그 자리에서 보고 있던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며 합장을 했다고 한다. 
그때 욱면이 하늘로 올라가다가 신었던 
짚신을 한짝 떨어뜨렸는데 이 신이 떨어진 곳에 
보리사라고 하는 절을 지었고, 
그리고 욱면의 육신(肉身)을 버렸던 
그 자리에는 욱면비등천지전(욱면비등천지전)
이라고 하는 비석과 함께 절을 세웠다. 
그 절에는 욱면이 하늘로 올라갔던 
그 집 그대로 천장구멍이 
열아름이나 되게 뚫려 있다고 한다. 
그렇게 구멍이 나 있어도 그 빈 구멍에는 
어쩐 일인지 비한방울 새지 않는다고 한다. 
<욱면랑, 염불하여 서방(西方)에 오르다 >
8세기 신라 경덕왕때 진주(康州)에서의 일이다. 
선사수십인이 모여 극락정토의 대발심을 모으니 
혜숙법사(惠宿法師)가 고을 경내에다 미타사(彌陀寺)를 
세우고  1만일을 기약하고 법회를 열었다. 
그때 아간(阿干·신라 17관등중 제 6등관)귀진(貴珍)의 집에 
한 여자종이 있어 이름을 욱면(郁面)이라 하였다. 
그때는 그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불당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절 뜰어 서서 중이 하는대로 염불을 따라 했다. 
욱면의 주인 귀진은 그녀가 여자 종의 신분으로 
자기 직분에 충실치 않고 불사(佛事)를 돈독하게 
드리는 것이 못마땅하여 매일 벼 두섬을 주면서 
하루 저녁에 다 찧게 했다. 
그러노라면 욱면은 초저녁에 방아 찧는 일을 마치고는 
절에 와서 염불을 들이는 데 밤낮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절 뜰의 좌우에다 긴 말뚝을 세우고 
자기의 두 손바닥을 줄로 꿰어서는, 
그 줄을 양쪽의 말뚝에 매어, 합장한 채로 
좌우로 왔다 갔다하면서 스스로를 격려 정진했다. 
이렇게 하기를 9개 성상(星霜)이 되는 날, 을미년 
정월 스무 하루 하늘에서 한 외침이 있어 공중을 울렸다. 
"욱면랑은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을 드릴지어다." 
이 소리를 들은 뭇 사람들은 미천한 신분으로
 9년동안 불당에 한번도 들어가지 못하고 눈 비 바람 
이슬을 맞으며 지성껏 염불을 드리던 욱면을 권하여 
불당에 들어가 염불을 드리도록 했다. 
그러자 얼마 안있어 천악(天樂)이 서쪽으로부터 울려왔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욱면은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불당의 천장을 魰고 서쪽 하늘을 날아갔다. 
욱면은 서쪽으로 가서 형해(形骸)를 버리고 진신(眞身)으로 
변형하여 연대(蓮臺)에 앉더니 금빛 찬란한 대광명을 
내리비치면서 천천히 서쪽 하늘로 사라졌는데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천악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욱면은 날아가다가 소백산에 이르러 한짝의 신을 
떨어뜨렸으니 그 곳에는 보리사를 지었고, 
또 산아래에는 그 육신을 버렸는데, 그 자리는 
제2보리사를 지어 "郁面登天之殿" 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욱면이 하늘로 솟아오르며 魰어진 구멍은 열 아름 쯤되었으나 
폭우나 함박눈이 쏟아져도 그 구멍에는 새어 들지 않았다. 
어떤이가 나중에 금탑 1좌를 그 구멍에다 대고 만들어 
그 이적(異蹟)을 기록해 두었다. 
욱면이 간 뒤 그녀의 상전이었던 귀진 역시 그의 집을 
이인(里人)이 몸을 붙여 태어난 곳이라 하여 절로 희사하니 
법왕사(法王寺)라 이름하였다 . 
염불수행으로 극락왕생하옵소서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