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 어둠속 등불

비구의 왕생집(往生集)

갓바위 2015. 7. 12. 11:56
비구의 왕생집(往生集) 
연지대사 왕생집 1권 
항주 운서사 사문 주굉 모음 (古杭雲棲寺沙門袾宏 輯) 
서(序) 

세존(世尊)이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었을 때에는 
모든 중생을 위하여 불승(佛乘)을 널리 말씀하셨다. 
그후 근기가 모두 투합하기 어렵게 되자, 
일승(一乘) 중에서 삼승법(三乘法)을 보이셨고,
 다시 삼승 중에서 정토(淨土)의 
한 문(門)을 드러내었다. 
오늘날은 부처님이 가신 지도 오래되었고, 
중생의 번뇌도 날로 더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것(三乘)에 의지해서는 신묘한 견해를 
개발하여 성인의 지위를 초월하기 어렵고,
 이것(淨土)을 버리고서는
 허둥지둥 타락할 위험이 있다. 
그러니 이 문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재빨리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위대하다! 참으로 말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신효(神效)한 영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효험이 많았으나 
지금은 드문 것은 그 허물이 어디에 있는가? 
입으로는 정토를 부르면서 마음은 사바를 
떠나지 못하여, 굳게 깨달음을 구하는 
선배들의 열정에 미치지 못할 따름이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예전에는 왕생했다고
 전해오는 자가 있었다고 하나, 세월이 오래되어 
이젠 없어져 다시는 볼 수 없고, 간간이 
내외백가(內外百家)의 문장의 
일부분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다. 
내가 본 것 중에서 그 인과가 분명한 것만을 
발췌하고 보니, 어느듯 11년 동안에 천여 가지의 
이야기를 모우게 되었다. 
금년 갑신(甲申), 삼가 중봉(中峯) 화상의 
우거(寓居)를 본받아, 산자락에 한 칸 초옥을 
얽고 문을 닫아 걸고 왕래를 끊었다. 
그리하여 이것들을 가지고 같은 부류대로 
앞 뒤를 나누고, 또한 모든 성인들이 한 곳으로 
돌아갔음을 증명하였고, 살아서 감응을 얻은 
사실에도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이리하여 모두 166 가지의
 사실을 정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간간이 숨은 뜻을 밝히고자 하여
 찬(贊)을 붙이고는 제목을 왕생집이라 하였다. 
그리고서 스님네와 신도들에게 이 책을 보이면서, 
아무개는 이렇게 해탈하여 왕생하였고,
 아무개는 이렇게 순일(純一)함으로 해서 
왕생했으며, 아무개는 이렇게 지극한 정성으로 
왕생했고, 아무개는 이러한 대자대비로 왕생했고, 
아무개는 이렇게 잘못을 뉘우치고는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업(業)을 바꾸어 왕생하였다. 
그리고 아무개는 이렇게 상생(上生)했고, 
아무개는 이렇게 중생(中生), 혹은 하생(下生)하였다. 
이렇게 옛적의 일을 고증하여 오늘에 증거해 보면 
정업(淨業)을 닦는 자를 위한 확실한 증명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일일이 지적해 가면서 일러 주었다.
어떤, 내 곁을 지나가던 객이 몇 가지의 이야기를 
읽어보지도 않고 발끈 화를 내면서 ‘정토(淨土)는
 마음일 뿐, 마음 밖에는 국토가 업소. 정토에 
왕생한다는 말은 우언(寓言 어리석은 말)일 따름이오. 
그대는 진정 왕생한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는 것이오? 
어찌 태어남이 없다[無生]는 뜻에
 어긋나는 말이 아니겠소.’ 하였다. 
나는 그의 얼굴빛이 안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태어남이 없는 것이라고 못 박는다면 
모든 것이 단멸(斷滅)이어서 오히려 
마음뿐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못합니다. 
과연 태어남이 없는 이치를 깨달았다면
 태어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태어남이 이미 본래 없는 것이므로 
늘 태어나되 태어난 적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대는 이미 번뇌를 다했습니까?” 
“그러지 못했소.” 
“아! 번뇌를 아직 없애지 못했다면 다시 
태어나는 인연도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다시 태어나는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몸을 의탁해야 할 곳이 반드시 있어서 삼계(三界)의
 넓은 고해(苦海) 속에서 헤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진대 정토에 태어나지 않고 어느 곳에 태어나겠습니까? 
육도(六道)에서 헤매는 것과 구품(九品)에서
 노니는 것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로움과 해로움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입니다.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까? 
부질없는 이론으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짓은
 나도 하려면 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않는 까닭은 함부로 진리를 
천착하는 우를 범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가십시오. 그대가 진정으로 나의 말을 그르게 여기지
 않는다면 정토에 태어나 불승(佛乘)에 오를 것입니다.
 털 끝 만큼의 의심도 갖지 않았으면서 
그렇게 되지 못할 리는 없습니다.” 
객이 공손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잃은 듯 
어리둥절해 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슬피 울었다. 
그러다 다시 옷깃을 가다듬고 남은 부분을 
마저 읽고는 절을 하며 이 책을
 출판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제 출판에 즈음하여 이와같이 
시말의 경위를 적어두는 바이다. 
만력(萬曆) 12년[1584] 여름, 항주 사문 주굉 적다. 

* 주굉(袾宏 1535-1615). 명나라 때 스님으로, 
자백진가(紫栢眞可), 감산덕청(憨山德淸),
 우익지욱(藕益智旭)과 함께 명나라 4대 고승의
 한 분이다. 항주인화(杭州仁和 : 절강성 항현) 
사람으로 자(字)를 불혜(佛慧), 호(號)를
 연지(蓮池)라 했으며, 17세 때부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학행(學行)으로 명성이 있었다. 
이웃집에 할머니가 계셨는데, 날마다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먼저 간 남편이 
부처님 명호를 수지하여 임종시에 병없이 죽었다.
 때문에 염불의 공덕이 불가사의함을 안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 말에 감화를 받은 이래 마음을 정토에 
의지하고 생사대사(生死大事)란 네 글자를 
책상머리에 써 놓고 스스로 경책하였다. 
27세에 부친상을, 32세에는 모친상을 당하였기에 
그해(1566년), 마침내 결심하여 출가하였다. 
북쪽으로 유람하다가 편융스님을 만났는데, 
편융은 그에게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말고 
오직 일심으로 도를 찾고 지계염불(持戒念佛)
하라고 깨우쳐 주었다. 이에 감격을 깊이 받았으며, 
고봉원묘(高峰原妙) 계열의 소암덕보(笑巖德寶)의
 법을 받아 크게 깨달은 뒤 선종(禪宗)의 조사가 
되었으며, 변융(徧融)의 뒤를 이어 화엄(華嚴)의 
종사로써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융경5년(1571) 항주 운서산에 들어가 산수가 
그윽하고 절묘함을 보고 이를 좋아하여 
거처를 산속에다 정하고 염불삼매를 수행하기 
시작하였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사람들을 
교화했기 때문에 승려와 재가신자가 
운집하여 일대총림을 이루게 되었다.  
만력12년(1584)에는 [왕생집]을 편찬하여 
옛날부터 지금까지 왕생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전하였다. 20년 동안 항주 정자사에서 
법회를 열었고, 그때 또 계단을 만들어 자서수계
(自誓受戒)의 법을 행하였으며, 산중 및 성의
 안팎에 방생하는 연못을 만들었고,
 [계살방생문 戒殺放生文]을 지어 중생의 
생명을 해치는 것을 경계하였다. 
또 항상 정토를 주장하여 [아미타경소]를 
저슬하였고, 참선하는 무리들의 자만심을 
통렬히 꾸짖었다. 만력 44년(1615) 7월에
 병이 깊어 제자들에게 성실하게 염불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81세로 입적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운서대사(雲棲大師) 또는 
연지대사(蓮池大師)라 부르며 존중하였고, 
그를 연사(蓮社: 정토종) 제8조로 추앙한다. 
저서에는 아미타경소초 4권, 왕생집 3권, 
정토의변 1권, 선관책진 2권, 죽창수필 2권,
 치문숭행록 1권 등이 전한다.  
왕생집 목록(往生集目錄) 제1권 
비구의 왕생(沙門往生類) 
제2권
왕과 신하의 왕생(王臣往生類) 
처사의 왕생(處士往生類) 
비구니의 왕생(尼僧往生類) 
부녀의 왕생(婦女往生類) 
악인의 왕생(惡人往生類) 
축생의 왕생(畜生往生類) 
제3권 
모든 성인이 한 곳으로 돌아가심(諸聖同歸類) 
살아서 감응을 얻음(生存感應類) 
부록(附錄)  왕생집 제1권 
비구의 왕생(沙門往生類) 
원조사(遠祖師) 

진(晋) 혜원(慧遠)은
 안문(雁門) 누번(樓煩) 사람이다. 
육경(六經)에 통달했으나,
 그 중 노장(老莊)에 더욱 밝았다. 
안 법사(安法師 ; 道安)에게서 <반야경> 강의를 
듣고 활연히 대오하여, 이로 인하여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 그를 섬겼다. 
 태원(太元) 6년[381], 심양(潯陽)을 지나다가, 
여산(廬山)이 유적하여 마음을 깃들여 살만한 
곳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산신(山神)의 현몽(現夢)을 받고, 어느날 밤
 번개와 비바람이 몰아 치더니 재목을 
힘들이지 않고 구할 수 있었다. 
자사(刺史) 환이(桓伊)가 집을 짓고 
신운(神運)이라고 불렀다. 
혜영(慧永)이 먼저 서림(西林)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혜원이 사는 곳은 동림(東林)이라 하였다. 
혜원은 동림에 머문 지 30년 동안 발길을 
세속에 들여놓은 적이 없이 지극히 서방(西方)에만
 뜻을 두어, 고승과 거유(鉅儒) 140인과
 함께 정사(淨社)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연루(蓮漏 : 혜원의 제자 혜요慧要가
 만든 시계. 샘 안에 연 12잎을 세우고 물결따라 
하루 12시를 정하도록 만들었다) 6시 동안
 선송(禪誦)을 그치지 않았고, 생각과 마음을 
정토에 쏟아 세 번이나 성상(聖相)을 보았으나 
침묵하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훗날 19년[394] 7월 저녁, 반야대(般若臺)에서 
정(定)에서 막 일어나려 하다, 아미타불의 몸이 
허공에 가득한데, 원광(圓光) 속에서 화불(化佛)이
 몸을 나투시고, 관음⋅세지 두 보살이 
좌우에서 모시고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또한 물이 흐르듯 광명이 열네 줄기로 분산하면서 
아래 위를 선회하는 속에서 미묘한 법을 연설하시고,
 부처님께서 ‘내가 본원력(本願力 : 부처님이 보살 때 
세운 원력)을 지키기 위하여 와서 너를 안위하노라. 
너는 7일 후에 반드시 나의 국토에 태어나리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또 보니, 불타야사(佛陀耶舍)⋅혜지(慧持)⋅혜영(慧永)⋅
유유민(劉遺民) 등이 부처님 곁에서 읍하며 ‘
스님께서는 저희들보다 뜻을 세운 지가 오래였습니다. 
어찌 오시는 것이 이다지 늦습니까?’하는 것이었다. 
이미 때가 이른 것을 알고는 문인(門人)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처음 이곳에 머물 때 세 번 
성상을 보았고 오늘 다시 두 번이나 보았다. 
정토에 태어날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는, 때가 이르자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때는 의희(義熙) 12년[416] 8월 6일이었다. 
찬(贊) 

진(晋)나라 이전에도 정토의 법이 비록 중국에 
전해지긴 했으나, 널리 전하고 힘써 행하여
 거리나 집집마다 정토의 법을 깨우치게 
된 것은 원 법사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래서 만대 이후에 정업을 닦는 제자들이 
스님을 추존하여 시조로 삼게 된 것이다.
 참으로 석가가 다시 서방(西方)을 연설한 것이며, 
미타가 동토(東土)에 현신한 것이라 할 만하였다. 
그 공이 위대하지 않은가. 

 내가 예전에 여산을 여행하다 호계(虎溪)의 
샘을 마셔보고, 삼소(三笑)의 집을 바라보면서
 18현(賢)의 유적을 배회한 적이 있었다. 
그 규모가 홍원(弘遠)한 것을 보니 족히 만 명의 
스님들이 살만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전각(殿閣)은 먼지가 쌓였고 
종과 북은 적막에 묻혔으며, 문은 뒤틀리고 
부엌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철인(哲人)이 가시자 
아름다운 자취도 끊어지고 만 것이다. 
애달픈 일이었다. 
혜영(慧永) 

진(晋) 혜영(慧永)은 하내(河內)사람이다. 
열두 살에 출가하였고, 그 후 원(遠) 공과 
함께 안 법사를 의지하였다. 
태원(太元) 초(初)에 여산에 주석하고 있노라니
, 자사(刺史)인 도범(陶範)이 지신의 집을
 희사하여 서림(西林)이라 하고 그를 살게 하니, 
이곳에서 철저히 세속을 끊고
 안양(安養: 극락)을 간구하였다. 
 그 후 의희(義熙) 10년[414]에 병든 
모습을 보이더니, 문득 옷을 걷고 신발을
 찾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대중이 놀라 물으니 “부처님이 와서 
나를 맞이하신다.”하고 대답하고는, 
말을 마치자 죽었다. 
기이한 향기가 7일 만에야 사라졌다. 
당(唐) 현종(玄宗)이 시호(諡號)를 
추서하여 각적대사(覺寂大師)라 하였다. 
찬(贊) 

혜영이 처음 입도(入道)하여 원 법사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정사(淨社)를 세워만세의 
법을 세웠다. 그러므로 혜원이 조사(祖師)
라고 한다면, 혜영은 종사(宗師)라고 할 것이다. 
여산의 18대현(大賢)과 132위의 모든 
왕생했던 이들을 여기서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우선 아래와 같이 한 두 분을 소개한다. 
담순(曇順) 

 진(晋) 담순은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나집(羅什: 구마라집) 법사를 따라 
여러 가지 경전을 강석하였다. 나집은 ‘이 사람은 
기특한 그릇이다.’하고 찬탄하곤 하였다. 
 그 후 여산에 들어가 정업을 닦았다. 
그 때 영만교위(寧蠻校尉) 유준효(劉遵孝)가
 강릉에 절을 짓고 담순을 맞이한 이후로
 염불삼매가 성행하게 되었다. 
송(宋) 원가(元嘉) 2년[425], 대중에게 
작별을 고별하고 앉아서 죽었다.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승예(僧叡) 

진(晋) 승예1)는 기주(冀州) 사람이다. 제방에 
유학하여 멀리 천축(天竺)에까지 다녀왔다. 
관중(關中)에 돌아와서는 나집 법사로부터 
경전을 배웠으나, 나중에는 여산의 
연사(蓮社)에 참예하였다. 
송(宋) 원가(元嘉) 13년[436], 홀연히 대중에게 
“나는 가야겠다.”하고 고별하고는, 
서쪽을 향하여 합장한 채 죽었다. 
대중이 보니, 승예 책상 앞의 한 송이
 금연화(金蓮花)가 갑자기 시들었고, 
오색 향연이 그의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담항(曇恒) 

진(晋) 담항은 하동(河東) 사람이다. 
어려서 원 공을 의지해 출가하여 내외의 전적
(典籍)에 관통하지 못한 것이 없었으나, 
여산에 들어간 후에는 염불에만 전념하였다. 
의희(義熙) 14년[418], 단정히 앉아 
합장한 채 큰 소리로 염불하며 죽었다. 
도병(道昞) 

진(晋) 도병은 영천(潁川)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원 공을 스승하여 경 율(經律)에
 통달했으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염불삼매를 극진히 궁구하였다. 
의희(義熙) 14년[418], 예장(豫章) 태수 
왕건(王虔)이 산에 들어와 알현하고,
 원 공의 법석을 계승해 줄 것을 간청하니,
 대중들이 모두 숭앙하게 되었다. 
 원가(元嘉) 12년[435], 대중을 모아 
염불한 후 자리에 앉아서 죽었다. 
찬(贊) 

말과 행동이 일치하다는 것은, 이른바 마음과 
입, 두 가지로 동시에 염불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럴 듯하지만,
 행동거지를 살펴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왕생을 바라면서 누구를 속일 수 있으랴. 
담선(曇詵) 

진(晋) 담선은 광릉(光陵)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원 공을 스승하여 부지런히 
정업을 닦았고, 겸하여 강설에 능하여
 <유마경>을 주석하여 세상에 남겼다. 
원가(元嘉) 17년[440], 
가부좌한 채 염불하며 갔다.  
도경(道敬) 

진(晋) 도경은 낭야(瑯瑘) 사람이다. 
할아버지인 응지(凝之)가 강주(江州) 
자사가 되었으므로, 그러한 
인연으로 원 공을 따라 출가하였다.
나이 열일곱에 경론에 박통하여 하루에 
만언(萬言)을 기억하였으며, 독실히 염불에
 뜻을 두어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송(宋) 영초(永初) 원년[420], 대중에게 
말하기를 “선사(先師)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이후, 나는 그대로 실행하였다.”하고는, 
단정히 앉아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죽었다. 
대중이 보니, 광명이 방에 가득하더니 
잠시 후에야 사라졌다.
찬(贊)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를 갖춘 이로서 
스스로 뽐내지 않는 자가 드물다. 그러면서도 
독실히 염불에 뜻을 두었으니 숙세에 
정인(淨因)을 심은 자가 아니겠는가. 
요즘 사미로서 약간의 경론이라도 익힌
 자면 아만과 게으름으로 머리가 희도록 
돌아갈 줄 모른다. 그러다 부득이 서방을 
말하고는 있으나, 그 때는 이미 늦다.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진(晋) 불타발타라는 우리말로는 
각현(覺賢)이라는 뜻이다. 
가유위국(迦維衛國. 가비라국,
 곧 석가세존의 탄생국) 사람으로 
감로반왕(甘露飯王. 석가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의 아우. 곧 석존의 숙부)의 후예였다.
 나이 열여섯에 모든 경전에 박학했으며, 
깊이 선 율(禪律)에도 능통하였다. 
요진(姚秦) 사문 지엄(智嚴)이 서역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스님을 모셔 장안으로 왔다. 
동궁(東宮)에서 법을 연설할 적에 나집 법사와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논의하기도 하였다. 
후에 관중(關中)의 중인 도항(道恒) 등에게 
빈척을 사, 이로 인하여 여산에 들어가 
원 공의 연사(蓮社)에 원공의 참예하여 
관불삼매(觀佛三昧) 등 경을 번역하였다. 
 송(宋) 원가(元嘉) 
6년[429], 염불하며 죽었다. 
승제(僧濟) 

진(晋) 승제가 여산에 들어가 원 공에게서
 배울 적에, 원 공이 ‘큰 법을 계승할 자는 
바로 너다.’하고 찬탄하였다. 
나중에 혹독한 병이 들어 정성을 다해 
정토를 바라게 되었는데, 원 공이 촛불 
하나를 주면서 ‘너에게 마음을 안양에 
두게 할 것이다.’하였다. 
제(濟)는 촛불을 잡고 탁자에 기대어 
생각을 집중하여 흩어지지 않게 한는 한편, 
대중을 모아 <정토경>을 읽게 하였다. 
오경(五更)에 제(濟)가 제자 원필(元弼)에게 
촛불을 주면서 대중을 따라 행도(行道: 
여러 스님네가 경을 읽으면서 부처님의
 주위를 도는 의식)하게 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에 자신이 촛불을 잡고 
허공에 올라 어딘가로 가는데, 아미타불이 
손바닥에 받아들고 두루 시방(十方)에 
이르는 것을 보고 문득 깨어났다. 슬프기도
 한 한편 기쁘기도 하면서, 사대(四大)는
 본래 전혀 병고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저녁 문득 일어나 허공을 살펴보니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도로 자리에 누우며 유쾌한 
얼굴로 곁의 사람에게 “나는 가네.”하고는,
오른쪽으로 누워 죽었다. 
그 때는 폭염이 내려쬐는 한더위였으나,
 3일 동안 몸이 변하지 않았고, 
기이한 향기가 자욱하였다. 
찬(贊) 

제(濟)는 성사(聖師)의 지시로 정토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임종의 조념(助念)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폭서에 시신을 관에 담아 두었으나 
몸에서 기이한 향기가 뿜어나왔다고 하니, 
청정한 범행(梵行)의 결과로 얻어진 영험이었다. 
혜공(慧恭) 

진(晋) 혜공은 예장(豫章) 풍성(酆城) 사람이다.
 혜란(慧蘭), 승광(僧光), 등과 함께 동학으로서,
 난(蘭)과 광(光)도 정토를 간구하여
 임종에 모두 기이한 영험이 있었다. 
5년 후에 공이 혹독한 병이 들었는데, 
비 오듯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부딪치면서
 마음에 안양을 서원하여
 염불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아미타불이 금대(金臺) 
앞으로 맞이해 가는데, 공이 그 위로 오르는 
것을 보았으며, 또 보니, 난(蘭) 등이 
금대 위의 광명 속에서 ‘장노께서 이미 
상품(上品)에 태어나셨으니, 저희들의 
기쁨은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오탁(五濁)에 머물러 서로 만남이 
더딘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공은 기꺼이 몸을 버리고 갔다. 

혜건(慧虔) 

진(晋) 혜건은 어려서 출가하여 
계행이 엄정하였다. 의희(義熙) 중에
 산음(山陰)의 가상사(嘉詳寺)로 가서
 갖은 고생을 무릅쓰면서 대중을 이끌다, 
나중에 병이 들어 안양에 태어나기를 
간구하며 관음보살께 기도하였다. 
북사(北寺)에 정엄(淨嚴)이란 비구니가 
있었는데 도덕과 행실이 장한 이였다. 
꿈에 관음보살이 서곽문(西郭門)으로 
들어오는데, 아름다운 자태는 일월이 
비치 듯하며, 깃발과 양산은 칠보로 
장엄하였다. 정엄이 놀라 예(禮)하며 ‘
대사(大士)께서는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으니, ‘가상(嘉祥)에 가서 
건 공을 맞이하려 하네.’하였다. 
건(虔)은 병은 비록 완쾌하지 않았으나
 안색은 평소와 다름없이, 시자들이 모두
 기이한 향기를 맡는 가운데 조용히 죽었다. 
찬(贊) 

 임종에 부처님을 친견한 사실을, 
어떤 이는 순전히 자신의 관념에서
 일어난 일일 것이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지금 다른 사람도 역시 보았다면 
어찌하려 하는가? 감응의 교류는 불가사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된다. 
승현(僧顯) 

진(晋) 승현은 천축(天竺) 사람이다. 
남으로 강좌(江左: 양자강의 동쪽지방. 
지금의 강소성江蘇省)를 여행하다가 
병이 들어 서방을 간구하게 되었다.
 병고 속에서도 잠시도 쉬지 않더니, 
아미타불의 광명이 자신의 몸에 비취는
 것을 보고는 아픈 곳이 모두 나았다. 
그리고는 일어나 목욕을 하고, 
곁에 사람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면서 아울러 인과를 경계할 것을 
말하는 뜻이 매우 간절하였다. 
다음날 새벽 단정히 앉아 죽었다. 
찬(贊) 

 게으른 비구는 어쩌다 병이 들면 ‘내 몸이 피곤하다. 
회복한 이후에나 염불하리라.’하고 말한다. 
그러나 염불은 늙고 병든 이를 제도하기 위한 법문으로,
 이때야말로 더욱 염불해야 할 때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현(顯)은 염불의 힘으로 이미 병이 나았고 
또한 왕생까지 할 수 있었다. 훌륭한 일이다. 
혜통(慧通) 

진(晋) 혜통은 양주(涼州)의 혜소(慧紹) 선사로부터 
선법(禪法)을 전해 받았으면서도 마음으로 
안양을 기원하였다. 병이 들자 선정 중에서, 
형색이 매우 단엄한 어떤 사람이 통(通)에게 ‘좋은 때가 
이르렀노라.’하고 말하는 것을 보았는데, 얼마 후에 
아미타불의 광명이 찬연한 것을 보았다. 
정(定)에서 일어나 동학(同學)에게 고별하고는 편안히 
죽었다. 기이한 향기가 3일 만에야 흩어졌다. 
법림(法琳) 

진(晋) 법림은 임공(臨邛: 지금의 사천성 공협) 사람이다. 
계행이 청정하였고, 성도(成都) 영건사(靈建寺)에 
머물며서 정업을 닦았다. 
늘 미타, 관음 두 경을 지니고 있었는데, 
독송을 할 때는 어떤 건정한 사문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건무(建武) 2년[318], 병이 들어 누웠으나 
일심으로 서방을 생각하면서 예참을 쉬지 않더니, 
모든 현성(賢聖)이 모두 공중에
 모이는 것을 보고 합장한 채 죽었다. 
찬(贊) 

임(琳)은 경을 외울 적에 사문이 앞에 
나타나곤 하였다 한다.
 대개 지극한 정성으로 감득한 것으로서
 괴이쩍게 여길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서방에 왕생한 것이 이것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업을 
닦는 자는 모양을 취하여 바라지 말라. 
담감(曇鑒) 

송(宋) 담감은 평소 조그마한 선행이라도
 짓게 되면 서방에 회향하면서 부처님을 
뵙기를 서원하였다. 하루는 정(定) 중에서, 
아미타불이 그의 얼굴에 물을 뿌리면서 
‘너의 때를 씻어 주노라. 너의 마음과 너의 몸과
 입을 씻어 모두 깨끗이 해 주리라.’하시고, 
병 속에서 연꽃 한 가지를 꺼내 주는 것을 보았다. 
정에서 일어나자 스님들과 고별하고 밤이 깊어서 
혼자 낭하를 거닐며 염불하더니, 오고(五鼓:
 오경{새벽3-5시}을 알리는 북)에 이르러서는 
그 소리가 더욱 우렁찼다. 
다음날 날이 밝자 제자가 관례대로 문안을
 여쭈었더니, 가부좌하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가서 보니 이미 죽어 있었다. 
승유(僧柔) 

제(齊) 승유는 방등(方等)의 여러 경전을 
공부했으나, 오직 정업만을 가까이 하였다. 
죽는 날 천여 명의 화불(化佛)을 보았고
, 방의 안 밖에서 기이한 향기가 풍겨오는 
가운데 서쪽을 향하여 경례하고 죽었다. 
혜광(慧光)

제(齊) 혜광은 낙양(洛陽)에 살았다. 
화엄, 열반, 십지 등의 소(疏)를 저술하여 
깊이 권교(權敎)와 실교(實敎)의 뜻을 밝혔다. 
하루는 병이 들었는데, 하늘의 대중들이 와서
 맞이하는 것을 보고는 “내가 원하는 것은 
안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였다. 
얼마 후 정토의 화불(化佛)이 허공에 가득하자
 “원하옵느니 우리 부처님께서 저를 섭수하사
 저의 본원을 이루게 하소서.” 하고, 잠시 기침
(여기서는 부처님을 찾아뵙기 전에 
내는 언성을 말한다. 지금의 ‘노크’ 같은 것)을
 하더니 말고 기운이 모두 쇠진하였다. 
찬(贊) 

천상에는 욕락도 많고 여인도 
있으므로 해탈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예전에는 ‘설사 수행하여 비비상천(非非想天)에 
이를지라도 서방으로 돌아가는 것만 못하다.
’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정토를 찬탄하는 자는, ‘상품(上品)은
 열반의 언덕에 오른 것이요, 하생(下生)이라도
 천궁(天宮)보다는 낫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지금 광(光)이 목숨이 다할 즈음에 살핌이
 정확하고 소원이 분명했으니, 명쾌하고 
용기있는 자라 할 것이다. 

* 혜광(慧光)은 남북조(南北朝 420-581) 때의
 승려로, 여산 백련사에 참예한 불타야사
 삼장에게서 출가하여 계율(사분률)을 배워 
중국 율종(律宗)의 시조가 되었다. 
또한 인도의 세친보살이 지은 <십지론>을 
주석하여 중국 지론종(地論宗)의 기초를 열었다.
 세상에서는 광통율사(光統律師)라 부른다. 
혜진(慧進) 

제(齊) 혜진은 고좌사(高座寺)에 살았다.
 <법화경>을 읽고 백부(百部)의 경을 찍어내더니,
 이러한 선업을 회향하여
 안양에 왕생하기를 서원하였다. 
후에 공중에서 
‘너의 소원이 이미 이루어졌다. 
반드시 왕생할 것이다.’ 하는
 말을 듣고, 병없이 죽었다. 
도진(道珍) 

양(梁) 도진은 여산에 머물면서 정업을 닦았다. 
꿈에 어떤 사람이 바다 가운데로 배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물으니,
 미타불국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진(珍)이 함께 가고자 하니, 배에 타고 있던 자가
 말하기를 ‘그대는 아직 욕실(浴室)도 짓지 않았고 
<미타경>도 외우지 않았소. 
같이 갈 수 없소.’ 하였다. 
꿈을 깨고 나서는 스님들을 목욕시키고 경을
 외우는 일을 매년 거르지 않았더니, 
홀연히 욕탕의 표면으로 백은대(白銀臺)가 내려왔다.
 그래서 그 사실을 가만히 기록하여 
경함(經函) 속에 넣어 두었다. 
목숨이 다하는 날 저녁, 온 산의 중간 이상은
 불이 난 듯 광명이 찬연하였다.
 읍인(邑人)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제왕(諸王)의 
예근(禮覲: 제후가 천자에게 알현하는 의식)일 
것이라고 여겼으나, 날이 새자 진(珍)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중에 경함을 열어보고 진이 상서로운
 감응으로 의당 정토에 태어났으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게 되었다. 
찬(贊) 

 원(遠: 혜원) 공은 세 번이나 성상(聖相)을 
보았으나 남에게 말하지 않았고, 진(珍) 공은 
욕탕으로 은대가 내려왔으나
 그냥 기록만 해 둘 뿐이었다. 
고덕(高德)의  신중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저 못난 장부는 조그마한 기이한 일이라도
 있으면 까불까불 입을 참지 못한다. 
작게는 그 일을 잃어버리게 되고 크게는 마군의 
덫에 걸리게 된다.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란(神鸞) 

후위(後魏)의 담란(曇鸞)은 젊어서 오대산을 여행
하다가 영이(靈異)한 일을 경험하고는 출가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장생(長生)을 좋아하여 
도은군(陶隱君: 남북조 시대의 본초가本草家인
 도홍경陶弘景의 호)에게서 선경(仙經)
 10권을 전해 받았다. 
 나중에 보리유지(菩提流支) 삼장을 만나 “불교에도 
장생불사의 술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지(支)는 웃으며 “장생불사하는 것이
 바로 우리 불도입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십육관경(十六觀經)>을 주면서
 “이것을 배우면 삼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육도에도 다시는 가지 않게 됩니다. 
그 수명은 하사겁(河沙劫)의 바위라도 
이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부처님의 장생입니다.” 하였다. 
난(鸞)은 매우 기뻐하며 마침내 
선경(仙經)을 불태우고 정업을 닦았다. 
추위와 더위, 질병이나 고통속에서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으므로 위나라 왕이
 신란(神鸞)이라고 호(號)하였다. 
 어느날 저녁, 방 안에서 어떤 범승(梵僧)이 
‘나는 용수(龍樹)다. 오랫동안 정토에 살고 있었으나, 
너와는 동지이므로 일부러 와서 만나게 된 것이다
.’하는 것을 보았다. 
난은 때가 이른 줄을 알고는 대중을 모우고 
“괴로운 인생은 끝내 끝날 날이 없다. 
지옥의 고통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고,
 구품(九品)의 정업은 닦지 않아서는 안된다
.”하고 가르치고는, 제자들에게 큰 소리로 
염불하게 하고 서쪽을 향하여 예하고 죽었다. 
대중이 들으니, 하늘 음악이 서쪽으로부터 
들려오더니 얼마 후에 사라졌다. 
찬(贊) 

선도(仙道)를 닦는 자들은 ‘부처는 죽음이
 있지만 신선은 장생한다.’하고 말한다. 
지금 지(支) 공은 ‘부처님은 장생이 있으나 
신선은 장생이 없다.’ 하였다. 이 말씀은 
통쾌하고 솔직하기가 천고에 빼어났다. 
난(鸞) 법사는 그른 것을 버리고 올바른 곳으로
 돌아가기를 마치 헌 신을 버리듯 하였으니, 
어찌 숙세에 정인(正因)을 심은 자가 아니겠는가. 

* 담란(曇鸞. 476-542) 대사는 중국 정토종의
 초조로 추앙받는 분으로, 세친보살이
 ‘오념문’을 설하신 <왕생론>에 주를 달아 
후세 정토교에 큰 영향을 끼친 분이라 합니다. 
보리유지(菩提流支) 삼장은 <왕생론>을 
번역하신 분입니다. 연화세계 까페 ‘
스님법문보기’ 30번에 담란대사에 대한 
백련스님 법문이 있고, ‘염불삼매’ 44번에도 
세친보살의 ‘오념문’에 대한 스님의 법문이 
있습니다. 담란대사 <왕생론주>
 한글 역 - 이태원, 
<왕생론주 강설>, 운주사. 2003. 

* 하사겁(河沙劫)의 바위 : 
흔히 겁석(劫石)이라 한다. 
둘레 사방 40리나 되는 바위를 백년마다 
한번씩 천녀(天女)가 내려와 천의(天衣)의
 엷은 옷으로 스쳐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무한한 시간. 
지자대사(智者大師) 

수(隋) 지의(智顗)는 호를 지자대사라고 
하며, 영천(穎川)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성상을 보면 예를 하고,
 스님을 만나면 반드시 절을 하더니, 
18세에 과원사(果願寺)에 출가하고 나중에는 
남악 사(南岳思: 혜사慧思) 대사를 섬겼다. 
홍법의 인연이 다할 즈음에는 섬동(剡東) 
석성사(石城寺)에 머물고 있었는데,
 입멸할 무렵에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나의 목숨이 여기에 있고 다시는
 더 나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 
오늘 도끼질은 그치고 거문고 줄은 끊어졌다.
” 하더니,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
의 제목을 읽고 나서 다시 “48원으로 장엄한 정토는 
꽃이 피어있는 못과 보배의 나무가 있는 곳으로
, 지옥 중생도 잠깐 회개하는 자는 오히려 왕생할 수 
있거든, 하물며 계, 정(戒定)을 닦는 자랴. 성도(聖道)
 수행의 힘은 그 공이 헛되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지랑(智朗)이 “대사께서는 어떤 지위에
증입했으며 여기서 죽어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궁금합니다.” 하고 물었다. 
 “내가 대중을 거느리지 아니했던들 반드시 
육근(六根)을 청정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는 손해가 되어가면서 남을 
이롭게 했으므로 단지 오품(五品)밖에 오르지 못했다. 
네가 또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물었느냐? 
나의 모든 벗들이 관음보살을 모시고 모두 와서
 나를 맞이한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 삼보(三寶)
의 이름을 부르고 마치 삼매에 들 듯 갔다. 
찬(贊) 

 대사는 도덕이 훌륭했고, 일가의 
교관(敎觀)은 만대에 숭앙할 만 하였다. 
그러나 목숨을 버릴 때 오직 서방에만 돌아가려 
했고, 내지 관경(觀經)에 소(疏)를 내고 십의론
(十疑論)을 저술하여, 늘 여기에만 정성을
 쏟은 것을 보면 그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의 소(疏)에, 마음을 관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한 것을 보면, 
정토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하고 말한다. 
아!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마음으로 부처를 관하면 
부처가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만약 부처가 없다면
 마음을 관해 무얼 하겠는가. 정보(正報)가 기왕 
그렇다면 의보(依報)도 마찬가지다.’ 하였다. 
  천태교를 배우는 자는 이 점을 살펴보라. 

* 교관(敎觀) : 교상(敎相)과 관심(觀心)을 말한다. 
교상은 석가 일대의 교설을 자기네 종파의 입장에서
 분류한 교판(敎判) 곧 이론적인 교리조직이고,
 관심은 자기네 종파가 내세운 진리를 관념하는
 것으로 그 진리에 따라 실천 수행하는 것을 말함. 
* 정보(正報), 의보(依報) : 과거세의 업인(業因)에 
의해 얻어진 중생의 몸을 정보라 하고, 
그 몸이 의지하고 있는 환경을 의보라 한다
(극락정토에 있어 정보는 아미타부처님과 보살님
들이고, 의보는 극락정토의 장엄한 환경을 말함).
* 십의론(十疑論) : 천태종의 개조(開祖) 
지자대사(538-597)께서 정토왕생에 대한 의심을 
열 가지로 나누어 대답한 <정토십의론>을 말함. 
- 연화세계 까페에 자광님께서 “의심끊고 
염불하세”란 글을 올리고 계시는데, 
거기에 ‘십의론’의 모든 내용이 있습니다. 
법희(法喜) 

수(隋) 법희는 항상 방등참법(方等懺法)을 
행하던 이였다.  하루는 꿩 한 마리가 목숨을 
변상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어떤 신인(神人)이 
꾸짖으며 ‘법사는 정토에 왕생하실 분이다. 
어떻게 너의 목숨을 보상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나중에 병 중에서 일생의 행업(行業)을 모두 서방에 
회향할 것을 발원하고 지심으로 염불하더니, 불보살이 
와서 맞이해 가는 것을 보고 단정히 앉아 죽었다. 
찬(贊) 

경에 ‘가령 백천 겁 동안이라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는다. 
인연이 만나는 날, 과보를 도로 자신이 받아야 한다.’ 
하였으니, 희(喜)인들 어찌 어찌 정토에 태어났다고
 하여 꿩의 목숨을 보상하지 않을 수 있으랴만, 
다만 한 번 정토에 태어나면 영원히 윤회가 끊어질 
것이니, 인연을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는가. 
  만약 무생(無生)을 깨닫는다면 중생계에 들어가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이니, 그 때 비록 보상이 있다 
하더라도 이른바 ‘머리가 하얀 칼 날 위에 닿더라도
 마치 봄바람을 치는 것과 같으리.’
 한 경우가 될 것이다. 
어찌 범부의 육도와 같을 수 있겠는가. 

*방등참법 : 지자대사께서 세운 방등삼매
(方等三昧=반행반좌삼매)를 행하면서, 
육근(六根)의 죄장(罪障)을 참회하는 것. 
장안(章安) 

수(隋) 관정(灌頂)은 장안 사람으로, 지자대사의 제자다.
 날마다 염불로 일을 삼더니, 
임종에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감돌더니, 
제자에게 유계(遺誡)를 마치고서는 
홀연히 일어나 합장한 채  아미타불과 
두 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문득 숨을 거두었다. 
혜성(慧成) 

수(隋) 혜성은 지강(枝江)에 살았다.
 <미타경>을 독송하고 서방관(西方觀)을
 닦으면서 30년 동안 자리에 눕지 않았다. 
정에 들 때마다 정토의 연화로 된 대좌와 
보배로 된 나무를 보곤 하였다. 
임종하는 날 저녁, 사람들이 성(成)이 연화에 앉아 
가물가물 서쪽을 향하여 가는 꿈을 꾸었다. 
도유(道喩) 

수(隋) 도유는 개각사(開覺寺)에 살았다. 
아미타불을 염하되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성상을 겨우 세 치 정도의 크기로 만들었는데, 
후에 정 중에서 부처님이 ‘네가 어찌하여 나의 상을 
작게 만들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마음이 크면
 크고, 마음이 작으면 작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말을 마치자 성상의 몸이 허공에 가득하더니,
 ‘너는 목욕하고 몸을 깨끗이 하라.
 내일 별이 뜰 때 내가 와서 너를 맞이하리라.
’ 하시었다. 
 그 때가 되자 과연 부처님이 오시고 광명이
 방에 가득한 가운데 마침내 앉아서 죽었다. 
찬(贊) 

 마음이 크면 크고, 마음이 작으면 작다 하였다. 
그렇다면 마음이 더러우면 더럽고, 마음이
 깨끗하면 깨끗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유(喩)는 한 부처님이 허공에 가득한 것을
 보았고, 앞의 승유나 혜광은 많은 부처님이
 허공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이것은 하나가 바로 많은 것이요, 많은 것이 바로 
하나인 이치로서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순(智舜)

수(隋) 지순은 여산에 들어가 원 법사의 본받았다. 
대업(大業) 초에 관경(觀經)을 강의하고는 병이 들었다. 
그런데 앵무와 공작이 불, 법, 승을 염하며 미묘한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는, 제자들에게 “
내가 오늘 왕생한다.” 하고는 편안히 갔다. 
혜해(慧海) 

수(隋) 혜해는 강도(江都) 안락사(安樂寺)에 살았다. 
경론에 밝고 일심으로 염불하였다. 
 어느날 도전(道銓)이라는 스님이 제주(濟州)에서 
오면서 아미타불 상을 가지고 왔다.
 미묘하고 아름다워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물으니, “이것은 천축 계두마사(鷄頭摩寺)의 
오통(五通)보살이 허공에 올라가 저 안락세계에서 
직접 그려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였다. 
 해(海)는 기쁘고 감격하여 정성을 다해 예경하노라니, 
신묘한 광명이 찬연히 빛나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정성을 다해 모사(模寫)하고,
 저 국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였다. 
후에 대수롭지 않은 병이 들더니, 밤에 문득 일어나 
늘상 하듯이 서쪽을 향하여 예하고는 
가부좌하여 새벽에 이르러서 죽었다. 
단엄한 것이 나치 생시와 같았다. 
찬(贊) 

극락세계는 여기서 10만억 불토를 지나야 한다고 하니, 
역시 허공에 올라가서 이를 수 있는 곳이 아닐 것이요, 
혜해의 정성이 부처님을 감동시킨 것이리라. 
저 도전이라는 분도 어쩌면 정토의 현성(賢聖)일지도 모른다. 
법지(法智) 

수(隋) 법지는 어려서 출가하였다. 
늙어서 빠르고 곧은 길은 염불만한 것이 없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내가 들으니, 경에 하나의 길라(吉羅)를
 범하더라도 일중겁(一中劫)을 지나도록 지옥에
 떨어진다 하니, 그 말씀은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열 번만 아미타불을 부르면 80억 겁의 
생사중죄를 면할 수 있다 하신 말씀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하였다. 
그 자리에 어떤 자가 “스님은 큰 사견(邪見)입니다.
 모두 부처님의 말씀인데 어찌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 하고 반박하였다. 
그리하여 국청사(國淸寺)의 도솔대(兜率臺)에서
 밤낮으로 염불을 정근하더니, 하루는 문득 스님과 
신도들에게 “내가 서방에 왕생해 간다.” 하고는,
 밤중에 병 없이 죽었다. 
그 때 금색 광명이 수백 리나 뻗쳤으므로 강가의
 어부들은 누구나 새벽이 온 줄로 여겼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야 다시 밝아졌으므로
 지(智)가 왕생한 줄을 알게 되었다. 
찬(贊)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말은 꿀과 같아서 중간이나 
가장자리가 모두 달다. 모두 반드시 믿어 가지라.’ 하셨다. 
그러므로 악인이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은 믿으면서, 
한 생각에 서방에 태어난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사견이다. 
근래 주문을 지니는 자가, 다라니에서 말하는 
공덕이 능히 산과 바다를 바꾸고 귀신을 부릴 수 있으며 
갖가지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뛸 듯이 
기뻐하며 믿으면서, 정토에서 말하는 공덕은 바로 
성인의 지위에 오를 수 있고 삼계를 초월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못마땅해 하며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도 사견이기는 마찬가지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 길라(吉羅) : 돌길라(突吉羅)의 줄임말. 악작(惡作), 
악설(惡說)이라고 번역한다. 비구 250계 중 
109 가지가 여기에 포함된다. 
선도화상(善導和尙) 

 당(唐) 선도는 정관(貞觀) 중에 서하(西河)
 작(綽: 도작) 선사의 구품도량(九品道場)을 보고 
기뻐하며 “이것은 참으로 부처의 경계에 들어갈 수
 있는 나루터다. 다른 행업을 닦는 것은 굽고 
치우친 길이어서 성취하기 어렵다. 오직 이 법문만이 
재빨리 생사를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고는 
밤낮없이 예송정진(禮誦精進)하고 
사중(四衆)을 격발하였다. 
방에 들어와서는 호궤(胡跪)한 채 염불하며 
힘이 다하지 않으면 쉬지 않았으며, 
밖에 나가서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정토를 연설하여
 30여 년 동안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은 부엌으로 돌려보냈고, 
거친 음식은 자신이 먹었다. 시주가 있으면
 <미탸경> 10만 권을 유포하는데 사용했으며, 
정토변상(淨土變相) 삼백벽(三百壁)을 그렸고
 떨어지고 파손된 것은 그때마다 보수하였다. 
끊이지 않고 등불을 밝혔으며, 삼의(三衣)와 
물병과 발우를 소지하지 못하게 했고,
 길을 갈 때는 여러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게 했다. 
부질없이 세상의 일을 담론할까 걱정하신 것이다.
그의 교화를 따르는 작 매우 많았다. 
<미타경>을 10만에서 50만 번까지 독송한 자도 있었고, 
염불을 하루에 만 번에서 10만 번까지 하는 자도 있었다. 
염불삼매에 들어 정토에 왕생한 자는 
이루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이가 “염불한다고 하여 정토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스님께서는 이렇게 대밥하였다. 
  “네가 생각한 만큼 너의 소원이 이루어진다. 
한 번 생각하면 한 광명이 입에서 나오고, 열 번이나 
혹은 백 번이면 광명도 마찬가지다.”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정토를 권한 게(偈)에 이런 것이 있다.
점점 닭 같은 피부 학 같은 머리칼 
갈수록 걸음걸이는 뒤뚱뒤뚱 
비록 금옥이 방에 가득한들 
어찌 늙고 병듦 면하랴. 
그대 갖가지 쾌락 마음대로 누리게만 
무상은 끝내 찾아오고 말리 
여기 손쉬운 수행법이 있네 
단지 ‘나무아미타불’ 
점점계피학발  漸漸雞皮鶴髮 
간간행보용종  看看行步龍鍾 
가사금옥만당  假使金玉滿堂 
기면애잔병고   豈免哀殘病苦 
임여천반쾌락  任汝千般快樂 
무상종시도래  無常終是到來 
유유경로수행  惟有徑路修行 
단념아미타불  但念阿彌陀佛 
어느날 문득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몸이 싫구나.
 나는 서방으로 돌아가야겠어!” 하고는, 
버드나무에 올라가 서쪽을 향하여 축원하기를 
“부처님께서 저를 받아주시고 보살님께서 저를 도와주시사, 
저로 (하여금) 정념을 잃지 않고 정토에 왕생케 하소서
.” 하고는, 말을 마치자 몸을 던져 죽었다. 
고종(高宗) 황제가 그 사실을 알고는 절에 
광명(光明)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찬(贊) 

선도화상을 세상에서는 흔히 미타의 화신이라고 하였다. 
그의 정엄한 수행이나 널리 중생을 이익케 한 것을 보면, 
미타가 아니면 필시 관음이나 보현의 무리일 것이다. 
아! 거룩하구나. 
지흠(智欽) 

당(唐) 지흠은 선업(禪業)을 익혔던 분이기도 하지만, 
만오천 부처님의 명호를 백 번이나 예념(禮念)했던 
분이기도 하다.  나중에 유주(柳州) 아육왕탑 앞에서 
팔 하나를 태우면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였다. 
제자 승호(僧護)가 한밤중에 뜰 앞에 기이한 광명이 
비치는 것을 보고, '누가 횃불을 들고 있는가?'
 하고 물으니, 공중에서 '흠 선사를 맞이해 
가는 길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護)가 급히 창문을 열고 보니, 부처님 몸의 
광명과 꽃으로 장식한 깃발과 보배의 일산이 
허공에 가득한 가운데,
 흠이 부처님을 따라 천천히 가고 있었다. 
찬(贊) 

몸을 태우거나 팔을 태우는 일은 대승경전 
가운데서도 종종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욕보살의 일이지
 초심자의 경계는 아니다. 
서방을 찾는 자는 반드시 흠 공의 선을 익히고 
부처님께 예한 일을 배울 일이지, 굳이 그의 팔을 태운 
일을 본받을 것은 아니다. 
만약 팔을 태우는 정성이나 용기로 다생의 
악습을 다스린다면 태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옛말에 '유하혜(柳下惠)나 잘 배워라!' 
한 말이 그럴 듯 하지 않은가. 
오회법사(五會法師) 

당(唐) 법조(法照)는 대력(大曆) 2년[767]부터 
형주(衡州) 운봉사(雲峯寺)에 살았다.
 그 때 숭상했던 일은 자비와 인욕과 계행과 선정이었다. 
일찍이 발우 속에서, 오색구름이 서려있는 곳에 
대성죽림사(大聖竹林寺)라는 편액이 걸린 범찰(梵刹)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오대산에 가서 기이한 광명이 서려있는 
것을 보았고 과연 죽림사도 그 곳에 있었다. 
강당에 들어가니 많은 대중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문수는 서편에, 보현은 오른쪽에서 법을 설하고 있었다. 
조(照)는 예하고 “말세의 범부가
 어떤 법을 닦아야 하리까?” 하고 물었다
  문수가 말씀하시기를 
  “모든 수행문 가운데 염불만한 것이 없다.
 나도 염불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었다.” 하였다. 
  또 물었다.   “어떻게 염(念)하리까?” 
  “이 세계의 서쪽에 아미타불이 계시는데,
 저 부처님의 원력은 불가사의하다.
 너의 생각(念)을 영속하여 끊이지 않게 하라.
 반드시 왕생할 것이다.” 
  나중 섣달 초 하루에 화엄원(華嚴院)의 
정업도량(淨業道場)에서 두 보살의 왕생할 것이라는
 수기를 기억하고 일심으로 염불하고 있노라니,
 홀연히 범승(梵僧)인 불타파리(佛陀波利)가 
나타나서 ‘너의 화대(花臺)가 이미 마련되었다. 
3년 후에 꽃이 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때가 되자 대중에게 “나는 간다.” 하고
 고별하고, 단정히 앉아 갔다. 
  스님은 일찍이 호동사(湖東寺)에서 다섯 차례의 
염불법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상서로운 
구름과 보배로 꾸며진 누각을 감응했으며, 아미타불과 
두 보살의 몸이 허공에 가득한 것을 보기도 하였다. 
또한 병주(幷州)에서 다섯 차례의 염불법회를 열었는데, 
대종황제(代宗皇帝)의 궁중에 염불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감응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신하를 보내 찾아보고 
스님의 교화가 성대한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조칙으로 서울에 들어가 궁인(宮人)들에게 
염불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역시 다섯 차례였다. 
  그래서 오회법사(五會法師)라고 부르게 되었다. 
찬(贊) 

 감응을 먼저 꿈꾸고 경계를 나중에 보았으니, 
참으로 분명히 믿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모든 수행문 가운데 염불만한 것이 
없다고 한 문수의 가르침을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3년 전에 화대(花臺)가 미리 마련되었다는 것은, 
소위 신심을 일으키자 말자 연꽃의 꽃술에 이름이 새겨지고, 
그 부지런하고 게으른 정도에 따라 활짝 피기도 하고 
시들기도 하는 것이니, 역시 믿을 만하지 않은가. 
아! 그윽히 신령한 자취를 나타냈고 미리 성인의 
수기를 받았으며, 다섯 차례의 교화를 행하여
 그 음성이 궁중에까지 사무쳤으니, 어찌 
자비의 원력을 타고 태어난 분이 아니겠는가. 

* 오회법사 법조스님(?-772)은 무량수경에 
근거하여 오회염불을 창시하여 오회법사찬
(오회법사찬)이란 저술을 남긴 분입니다. 
* 일체종지(一切種智) : 부처님이 지니고 있는 지혜.
 모든 존재에 대하여 평등의 처지에서
 다시 차별의 상(相)을 세밀히 아는  지혜.
대암(臺岩) 강법사(康法師) 

당(唐) 소장(小康)은 진운(縉雲) 선도(仙都)사람으로, 
나이 열다섯에 법화와 능엄에 통달하였다. 
정원(貞元) 때 낙양(洛陽) 백마사(白馬寺)에 간 적이
 있었는데, 전각 속의 글자가 방광하는 것을 보고 찾아보니, 
선도화상의 서방화도문(西方化導文)이었다. 
스님이 ‘만약 정토와 인연이 있으면 
다시 방강하소서.’ 하고 축원했더니,
 말을 마치자 광명이 다시 찬연하였다. 
스님은 ‘겁석(劫石)은 갈아 없앨 수 있을망정
 나의 원력은 바꾸지 못한다.’ 하고는, 마침내 
장안(長安) 광명사(光明寺)로 가서 선도화상 영당(影堂)에 
예배하노라니, 홀연히 영상(影像)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면서 ‘
너는 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널리 중생들을 교화하라.
 후일 일을 마친 후에는 반드시 안양에 왕생할 것이다.’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신정(新定)으로 가서 돈을 구걸하여 
어린애들을 달래어 염불하게 하였다. 
염불 한 번 부르는데 일문(一文)씩의 돈을 나눠주었다. 
1년 남짓되자 어린이 어른, 귀한 이, 빈천한 자를 
막론하고 스님을 만나는 자는 누구나 아미타불을
 불렀다. 염불하는 소리가 거리마다 울려퍼졌다. 
  또한 오룡산(烏龍山)에 정토도량을 세우고 
자리에 올라 큰소리로 부처님을 부르니, 
한 번 부르면 한 부처님이 입에서 나왔고, 
열 번 부르면 열 부처님이 나왔다. 
대중들이 모두 목격한 사실이었다. 
그리고는 “너희들 중에 부처님을 본 자는 반드시 
왕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때 대중이 수천 명이었으나 보지 못한 자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책망하고
 마음 아파하며 더욱 정진에 힘썼다. 
나중 21년 10월 3일, 스님들과 신도들에게 
부촉하기를 “반드시 정토에는 기쁜 마음을 일으키고, 
염부제에 대해서는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라. 
너희들이 나의 광명을 본다면 진정한 나의 제자다
.” 하고는, 몇 줄기의 기이한 광명을 내고는 죽었다. 
  대자암(臺子岩)에 탑을 세웠으므로 
대암법사(臺岩法師)라고 불렀다. 
찬(贊) 

어떤 이는 부처님이 입에서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요괴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것이다. 
아! 세존께서는 술 취한 코끼리를 만났을 때, 다섯 
손가락 끝에서 금빛 찬란한 사자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내가 어찌 코끼리를 막을 
생각을 내었겠느냐. 나의 한없는 기간동안 자비와 
인욕을 수행한 힘으로 자연히 사자가 나타난 것이다. 
나도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하였다. 
지금 강(康) 공의 부처님이 출현하신 것도 역시
 한없는 기간동안 부처님께 귀경한 소치일 뿐이다.
 어찌 괴이쩍게 생각할 일이랴. 
세상에는 요술장이들이 캄캄한 밤에 가만히 
앉아 향 연기 위로 부처님이 나타나는 것을 
관하면 감응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것과 삿되고 올바른 것을 비교해 보라.
 실로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일 것이다. 
정업을 닦는 자를 위하여 불가불 밝혀두는 바이다. 
자각(自覺) 

 당(唐) 자각은 진주(鎭州)에 살았다. 
항상 발원하기를 ‘원하옵건대 관음을 인해 
아미타불을 친견케 하소서.’ 하였다.  그리고는
 관음상을 주성(鑄成)하였는데, 높이가 49자 였다. 
완성되는 날 축원을 하고 있노라니,
 삼경(三更)에 홀연히 금색 광명 두 줄기가 
뻗치더니, 아미타불이 광명 속에서 내려오시고 
두 보살이 좌우에서 따르고 있었다. 
부처님이 손을 드리워 각(覺)의 머리를 어루만지시며 ‘
나의 발원을 지켜 결코 어기지 않노니, 
우선 중생을 이익케 하노라. 태어날 보배의 못은 
어떤 것도 발원만한 것이 없나니라.’ 하였다. 
  나중 11년 7월 보름 저녁에 차림새가 천주(天主)와 
같은 어떤 사람이 구름 사이에서 몸을 나타내어 
각(覺)에게 말하기를 ‘안양의 시기가 이르렀다.’ 하자, 
즉시 관음상 앞에서 가부하고 앉아 죽었다. 
선주(善冑) 

당(唐) 선주는 영주(瀛州) 사람이다. 
무덕(武德) 3년[621]에 병이 위독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자,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
나는 일생 올바른 믿음을 가졌으므로 정토에
 태어나지 못할까 걱정하지는 않는다.” 하고는
 방을 치우고 향을 피우게 하였다. 
그러다 병이 깊어 다시 쓰러졌다가 갑자기 
일어나 앉아 합장한 채 시자에게 “세존을 맞이해 
자리에 앉게 해 드려라.” 하고는, 
스스로 잘못을 말씀드리더니, 얼마 후
 “세존께서는 가셨다.” 하며 
몸을 굽혀 전송하듯 하는 몸짓을 하였다. 
그리고는 자리에 누워 “조금 전에 
아미타불께서 오셨다. 너희들도 보았느냐? 
오래지 않아 나도 갈 것이다.
” 하더니, 잠시 후에 죽었다. 
신소(神素) 

당(唐) 신소는 안읍(安邑) 명조(鳴條) 사람이다
처음에는 강연으로 업을 삼았으나, 
도걸(道傑), 제명(齊名)과 함께 일생 서방을 
생각하는 것으로 행업을 삼게 되었다. 
정관(貞觀) 2년[628]에 대중이 누암(樓岩)을 
주관해 줄 것을 간청하여 그곳에 살았다. 
17년 2월 23일에 대중을 불러 고별하고, 
얼굴빛을 엄정히 하고 가부좌하고 앉아 
관음보문품(觀音普門品)을 두 번 외게 한 후, 
자신이 아미타불을 부르고 대중이 
따라하게 하더니, 한밤중이
 되어서 단정히 앉아 편안히 갔다. 
살갗은 비록 변하였으나 앉아있는 
모습은 처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혜선(慧璿) 

당(唐) 혜선은 양천(襄川)에서 출가하고, 
일찍이 삼론(三論)과 대경(大經: 화엄경)을
 널리 공부한 적도 있었다. 
정관(貞觀) 23년[649] 4월 8일 밤에 산신이 ‘
법사께서는 오래지 않아 서방에 왕생하실 것입니다.
’ 하더니, 7월 14일, <우란분경(盂蘭盆經)>을 
강설하여 끝마치고는 손을 털면서 “살아서는
 시주의 은혜를 입었으나, 오늘은 모두 보시해야겠다.
 조그마한 물건 하나라도 쓸만한 것들은 모두 
시방의 가난한 걸인이나 수도자들에게 주어라.
” 하고는, 말을 마치자 법좌에서 죽었다. 
찬(贊) 

옛날 생(生) 공이 숨을 거두려할 때 대중들이
 보니, 불자(拂子)가 땅에 떨어지면서
 탁자에 기댄 채 마치 선정에 든 듯 죽었다 
하더니, 선(璿)의 일도 역시 이와 유사하다. 
아! 평생의 도력이 아니었다면
 임종에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회옥(懷玉) 

당(唐) 회옥은 태주(台州) 사람이다. 
 남루한 옷과 한 끼의 밥으로 항상 앉아 
있기만 하고 눕지 않은 채 <미타경> 
30만 번을 독송했고,
 하루에 부처님 명호 5만 번을 불렀다. 
천보(天寶) 원년[742], 불보살이 허공에 가득한데, 
한 사람이 은대(銀臺)를 가지고 와서 맞이하는 
것을 보고, 옥이 “내가 일생 염불했던 것은
 금대(金臺)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어찌하여 그렇지 않습니까?” 하니, 
성중(聖衆)이 마침내 사라졌다. 
 옥(玉)은 더욱 정진을 배가하였다. 
  21일 후에 전에 대좌(臺座)를 가져왔던 자가
 다시 와서 “스님께서는 정진의 힘으로 
상품(上品)에 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부하여 앉아 기다리십시오.” 하였다. 
3일 후에 기이한 광명이 방에 가득하더니
, 제자들에게 “나는 정토에 왕생한다.
” 하고는, 미소를 머금고 죽었다. 
  군(郡)의 태수 단(段) 공이 
이렇게 게(偈)를 지어 찬탄한 것이 있다. 
우리 스님 한 생각에 초지(初地)에 오르사 
불국음악 두 번이나 들려왔네 
오직 문 앞의 늙은 홰나무 
가지를 늘어뜨려 금대를 막네. 
아사일념등초지  我師一念登初地 
불국생가량도래  佛國笙歌兩度來 
유유문전고괴수  惟有門前古槐樹 
지저지위괘금대  枝低只爲罣金臺 
찬(贊) 

 어떤 이가 ‘은대가 왔다가 사라지고,
 금대를 원하자 다시 왔다 하니,
 어찌 과보가 일정함이 없이 사람이 
선택하는 대로 될 수 있는가?’ 하였다. 
이것이 바로 ‘만법은 마음을 따라 
감응한다(萬法由心隨感而應).’는 이치이다. 
화거(火車: 중생을 지옥으로 데려간다는 불 수레)
가 이미 나타났더라도 열 번의 염불로 왕생한 
일도 있고, 천상의 대중들이 와서 맞이했으나
 마음을 맹서하고 정토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이렇게 선악과 범성(善惡聖凡)은 서로 
막혀 있는 것이지만, 잠깐동안에
 업(業)을 바꿀 수 있었다.
 더욱이 금과 은 같은 미세한 차이랴. 
도앙(道昂) 

당(唐) 도앙은 위군(魏郡) 사람이다.
영유법사(靈裕法師)를 따라 늘 한능산사
(寒陵山寺)에서 화엄 지론(華嚴地論)을 
강의하여, 고찰이 신중하고 넓었다. 
마음에 서방을 결심하고 안양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더니, 나중에 스스로 목숨이 다한 것을 
알고 미리 8월로 기한을 잡았으나,
 다른 사람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8월 초하룻날이 되었으나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재(齋) 때가 되었는가를 묻고는,
 법상에 올라가 앉았다. 몸에서는 위엄이 
감돌고 향로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솟았다. 
사중(四衆)을 이끌어 보살계(菩薩戒)를 
설하니, 말씀이 간절하여 듣는 자들은 
마음이 섬뜩한 지경이었다. 
 앙(昂)이 눈울 들어 바라보니, 천상의 대중이
 어지럽고 음악이 요란한 것을 보고, 
대중에게 “도솔천(兜率天)이 나를 맞이한다. 
그러나 천도(天道)는 생사의 근본일 뿐, 
본래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늘 마음에 정토를 기원하였으나,
 어찌하여 나의 정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하니, 말을 마치자 하늘의 음악이 사라지고 
서방의 향기로운 꽃과 음악이 구름처럼 
울려퍼지더니, 날아 내려와 
머리 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것은 온 대중이 모두 목격한 사실이었다. 
그러자 앙(昂)이 “지금 서방의 영상(靈相)이
 와서 나를 맞이한다. 
원하는 바는 왕생일 뿐이다.” 하더니, 
향로를 잡은 손이 미끄러지면서 법상에
앉은 채 죽었다. 온 천하가 경탄해 마지않았다. 
찬(贊) 

천궁(天宮)을 물리치고 정토를 찾은 이는
, 앞에는 광(光) 공이 있고, 뒤에는 홍(洪) 
공과 앙(昂), 세 사람이 있다. 
그러나 때가 눈 앞에 다가왔는데도 능히 
사중을 계율로 인도하다 법상에 기댄 채 죽을 수
 있었고, 영상(靈相)이 찬란하여 사람의 
눈을 놀라게 했던 일은, 아! 기이한 일이다.
도작(道綽) 

당(唐) 도작은 병주(幷州) 문수(汶水) 사람이다.
열네 살에 출가하여 경론을 익히다, 
만년에는 찬(瓚) 선사를 섬기며 선을 
배우기도 했고, 또한 신란(神鸞: 담란)의 
정토업을 독실히 닦기도 하였다.
  어떤 스님이 정(定) 중에서 작(綽)의 염주가
 칠보대산(七寶大山) 만한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평소에 대중을 위해 <무량수관경(無量壽觀經)>
을 이백여 번 설했으므로, 사람들이 제각기 염주를 
돌리며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게 되었다. 
  어떤 때 법석을 흩으면 임곡(林谷)에 애원하는 
소리가 가득했고, 육시예경(六時禮敬)을 
처음부터 거른 적이 없었으며, 염불은
 하루에 7만 번으로 한정을 정하였다. 
  정관(貞觀) 2년[628] 4월 8일에 죽었다. 
  부음을 듣고 달려온 자들이 산사를 가득 
메웠는데, 화불(化佛)이 공중에 머물고 있고 
하늘꽃이 내려와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실상(實相) 

당(唐) 실상은 옹주(雍州) 
장안(長安) 사람이다.
19세에 출가하여 두타행각과 
육시예참을 40 년이 가깝도록 행하였다. 
밤에는 <미타경> 일곱 번을 
독송하고 6만 번의 염불을 하였다. 
병이 깊어 일어날 수 없게 된 지경이
 되었으나 독송과 염불을 버리지 않더니, 
스님들과 신도들에게 부촉하기를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염불이다. 
헛되이 세상을 보내지 말라. 
서방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또 “
나의 시신은 불태워 흩어버리고 탑을 세우거나 
비석을 새기려 애쓰지 말라.” 하고는 죽었다. 
찬(贊) 

옥(玉)은 하루 5만 번의 염불을, 작(綽)은 
7만, 상(相)은 지금 6만 번의 염불을 하였다. 
세 늙은이가 모두 고승이었으나 날마다 
일정한 수의 염불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것은 어리석은 
아낙네들이나 할 짓이다.’ 하고는 비웃는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안(惟岸) 

당(唐) 유안은 병주(幷州) 사람이다. 
 정토를 참으로 돌아가야 할 곳으로
 여기고 방등참(方等懺)을 행하며 
고행정진하여 쉬지 않았다. 
 약간의 병이 들자 관음, 세지 두 보살이 
공중에 나타난 것을 보고, 안(岸)은 화공 (畵工)을 
불렀으나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두 사람이 나타나 스스로 
그림을 그릴 줄 안다고 말하고, 
다 그리고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안(岸)이 제자들에게 고별하기를 
“나는 지금 왕생하려 한다. 
누가 같이 갈 자가 없느냐?” 하자, 
어떤 동자가 같이 가기를 원하였다. 
안(岸)이 부모에게 고별하게 하니, 부모는
 장난인줄로 여기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서는 
도량에 들어가 염불하고 죽었다. 
안(岸)은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얘야 
어찌하여 나보다 먼저 간단 말이냐?” 하였다. 
 그리고서 붓을 들어 이렇게 
두 보살을 찬탄하고는 영원히 갔다. 
원하옵노니 자비의 손으로 
이끌어 서행(西行)을 함께 하소서 
원이자비수  願以慈悲手 
제장공서행  提獎共西行 
찬(贊) 

안(岸)의 일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거니와, 
저 동자는 오랫동안 정업을 닦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신이(神異)하게 갈 수 있을까? 
 아! 그는 열 번의 염불로도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 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숙세에 깊은 선근을 심은 자이리라. 
정업을 닦는 자가 혹시 금생의 몸으로는 
왕생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을 보면 스스로
 위안이 되지 않겠는가. 

방등참(方等懺) : 천태 지자대사께서 세우신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를 말함. 
참회하여 죄업을 소멸하기 위한 수행법. 
일정 기간은 행도염불하면서 수행하고, 
일정 기간은 가부좌하고 앉아서 수행함. 
승연(僧衍) 

당(唐) 승연은 병주(幷州) 사람이다. 
처음에는 미륵보살을 염(念)하면서 
내원(內院)에 상생(上生)할 것을 발원했으나, 
나이 90에 가서야 도작(道綽)선사를 만나
 정토를 듣고 비로소 염불로 마음을 돌렸다. 
그리하여 날마다 천 배의 절을 하며 
일심으로 염불하였다. 나중에 병이 들어 
제자들에게 고별하기를 “아미타불이
 나에게 향기로운 옷을 주시고, 관음,
 세지가 나에게 보배의 손을 보여 주셨다.
 나는 이제 간다.” 하고는 죽었다. 
그 때 개방(啓芳), 원과(圓果) 두 법사가 
이 사실을 목격하고, 오진사(悟眞寺)에서 
관음보살의 손에 들고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꺽으며 “만약 정토와 인연이 있으면 7일
 동안 시들지 마소서.” 하고 발원하였더니
그 때가 지나도록 더욱 무성하였다. 
  방(芳)과 과(果)는 뛸 듯이 기뻐하며
 밤낮으로 관념(觀念)을 쉬지 않았다. 
  어느날 홀연히 칠보로 된 못에 이르러
 대보(大寶)의 장막 속으로 들어갔더니, 
부처님과 두 보살이 보화(寶華)의 자리에
 앉아 계시는데, 광명이 휘황하였다. 
   방과 과가 예했더니 부처님이 ‘나의 
이름을 생각하는 자는 누구나 나의 국토에 
왕생하리라.’ 하시는 것을 보았고, 
또한 석가세존과 문수보살이 하늘음성으로 
정토를 찬탄하시는 말씀도 들었다. 
또 보니, 세 길의 보배로 된 계단이 있는데, 
하나는 세속인이 있었고, 두 번째는 스님과
 세속인이 반반씩 섞여 있었으며, 
세 번째의 것에는 스님들만 있었다. 
부처님이 ‘이들은 모두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했던 
이들로서 이 국토에 왕생하였다.’ 하였다. 
  5일 후에 홀연히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는 
“종소리는 우리들을 위해서다.” 하고, 함께 죽었다. 
찬(贊) 

나이 90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업을 
닦아서도 오히려 왕생할 수 있었다. 
젊은이는 어떨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저 방(芳)과 과(果)도 소문만 듣고 마음을
 내어 마침내 신비한 감응을 얻었다. 
 어진 이를 보고 같이 될 것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회감(懷感) 

당(唐) 회감은
 장안 천복사(千福寺)에 살았다.
염불도량에 들어갔으나 3. 7일 동안 
상서를 보지 못하자, 스스로 업장이 
두터운 것을 한탄하며 음식을 끊고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이 때 선도(善導)대사가 허락하지 않고 
3년 동안 더욱 정성을 다해 염불하게 하여,
 가르친 대로 하여 감응을 얻었다. 
나중에 부처님의 금색옥호(金色玉毫)를 보고 
염불삼매를 얻어 <결의론(決疑論): 
석정토군의론(釋淨土群疑論)을 말함> 
7권을 지었다.  임종에 합장한 채 “
부처님이 나를 맞이하신다.” 하고는 죽었다. 
찬(贊) 

속담에 ‘정성을 기울이면 절구공으로도 
바늘을 만들 수 있다.’ 하더니,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다. 한계를 느끼고 자신을 
원망하는 자는 생각해 볼 일이다. 
덕미(德美)

당(唐) 덕미 법사는 회창사(會昌寺)에서 
서원(西院)에 참회하는 집을 짓고 
반주삼매(般舟三昧)를 행하여
 여름내 앉거나 눕지 않았다. 
어떤 때는 입의 허물을 막기 위해 3년 동안
 말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고, 
어떤 때는 불경(不輕: 남을 업신여기지 않음)
을 행하여 아무에게나 절하고 예하였다. 
남루한 옷과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세속의 생각을 끊었으며, 
서방을 전념하여 입으로 미타를
 부르며 죽을 때까지 쉬지 않았다. 
  나중에 잠깐 방에 들어가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서 편안히 죽었다. 
찬(贊) 

 세속의 생각을 끊으면 더러운 인연이
 다할 것이요, 서방을 전념하면 깨끗한
 인연이 이루어질 것이다. 
옛 성인의 말씀에 ‘애욕이 깊지 않으면 
사바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요, 
생각이 전일하지 않으면 정토에
 태어나지 못한다.’ 하였다. 
  진실하다, 이 말씀이여! 

* 반주삼매(般舟三昧): 반주는 
불립(佛立)이라고 번역한다. 
부처님이 공중에 서 있는 것을 
관하여 성취한 삼매. 
변재(辯才) 

당(唐) 변재는 양양(襄陽) 사람이었다. 
남몰래 정토를 닦으면서도 20년 동안 
그런 사실을 말한 적이 없었다. 
다만 호융(護戎)인 임(任) 공이 이 일을 
알고는 ‘재(才)가 반드시 10년 후에 
정토에 태어날 것이다.’ 하였다. 
  하루는 제자를 임 공에게 보내어
 ‘전에 정한 기한이 이미 되었습니다.’
 하였더니, 임 공이 오자 “나는 갑니다
.” 하고는 가부좌한 채 죽었다. 
  선악(仙樂)이 서쪽에서 들려오고 
기이한 향기가 흩어지는 것을 대중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수홍(壽洪) 

당(唐) 수홍은 분양(汾陽) 사람이다. 
 항상 염불하며 정토를 간구하더니,
 죽을 때에 이르러 도솔천의 동자가 와서
 맞이하는 것을 보고 
“나는 서방에 왕생하려 한다. 
천상에 태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는, 
대중에게 염불하게 하더니, 문득 “부처님이 
서쪽에서 오신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 죽었다.
법상(法祥) 

당(唐) 법상은 양도(楊都) 대흫국사
(大興國寺)에 살면서 30년 동안 
안양의 업을 닦으며 모든 
선행은 반드시 서방에 회향하였다. 
  병이 들었을 때 제자들이 상(祥)의 
염불 소리가 더욱 우렁찬 것을 들었고, 
또한 방의 서쪽 벽에 거울을 매단 듯한 
광명이 비치면서 정토의 광경이 나타났으며,
 빈가(頻伽: 극락조. 가릉빈가)가 나래짓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편안히 죽었다. 
찬(贊) 

상(祥)은 빈가를 보았고, 앞의 
지순(智舜)은 앵무와 공작을 보았다. 
부처님을 친견하지 않고 
새들을 본 것은 무엇 때문일까? 
경(아미타경)에 ‘이 모든 새들은 아미타불이 
변화하여 만든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정보(正報)와 의보(依報)가
 모두 정토의 모양인 것이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대행(大行) 

당(唐) 대행은 태산(泰山)에 살면서
 3년 동안 보현참법(普賢懺法)을 닦아
 보살이 현신하는 것을 감응하였다.
늙어서 대장각(大藏閣)에 들어가 발원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골라 <미타경>을 
얻어 밤낮으로 독송하였다. 
3. 7일이 되는 날, 유리의 땅 위에 부처님과 
두 보살이 현신하는 것을 보았다. 
희종황제(僖宗皇帝)가 그 사실을 듣고
 궐내에 불러 상정진보살(常精進菩薩)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1년 후 유리의 땅이 다시 나타나더니, 
그날 죽었다. 기이한 향기가 보름동안 
흩어지지 않았고 육신도 썩지 않았다. 
찬(贊) 

유리의 땅은 위와 아래가 내비치는 곳으로, 
청정한 덕으로 감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혜영(慧永)과 승연(僧衍)은 
기이한 향기가 7일 동안 흩어지지 않았고, 
혜통(慧通)은 3일, 행(行)은 지금 
보름동안 감돌았다고 하였다. 
범행(梵行)이 더욱 청정했던 
소치가 아니겠는가. 
명첨(明瞻) 

당(唐) 명첨은 늙어서야 
안양에 뜻을 둔 이다. 
어떤 이가 이미 늦었다고 놀리자 “열 번의
 염불만으로도 공을 이루어 부처님을 
친견한 일도 있다. 내가 무엇을 염려하랴.
” 하고 대꾸하였다. 
나중에 병이 들자, 흥교사(興敎寺)에서 
재를 베풀어 스님과 신도들과 고별하게 되었는데, 
그 때 복야(僕射: 당나라 때 재상벼슬을 이름)
인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해(杜如海)도
 그 자리에 있었다. 
  오후가 되자 위의를 단정히 하고 
일심으로 염불하다, 문득 “부처님이 오셨다. 
두 보살임도 함께 오셨다.” 하고는, 
몸을 발돋음하여 합장한 채 죽었다. 
영명 수(永明壽) 선사 

전씨오월(錢氏吳越: 북송[北宋]을 말함)의
 연수(延壽)는 항주 여항(餘杭) 사람이다. 
사명취암(四明翠岩) 선사에게서
 출가하였고, 천태 소(天台韶) 국사에게 
참예하여 심요(心要)를 발명하였다. 
  일찍이 법화참(法華懺)을 행하다가 
밤중에 보현의 연꽃이 홀연히 손에 있는 
것을 보고, 숙세의 원력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을 생각하고 지자암(智者岩)에 
올라가 두 개의 제비를 만들어 하루는 일심으로 
선정을 익히고 하루는 만행으로 정토를 
닦으면서 지심으로 기도하여 일곱 번을 
뽑아 모두 정토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결같이 정토를 닦게 된 것이다. 
나중에 영명(永明)에 살면서 하루에 108 가지의 
일을 정해놓고 실행했으며, 밤에는 별봉(別峯)에
 올라가 길을 걸으면서 염불하니, 곁에 
사람들이 때때로 하늘 음악을 듣곤 하였다. 
충의왕(忠懿王)이 찬탄하기를 ‘자고로 
서방을 구하는 자들 중에 이와같이 간절한 
자는 아직 없었다.’ 하고, 서방향엄전
(西方香嚴殿)을 세워 그의 뜻을 이루어 주었다. 
영명에 있은 지 15년 동안 제자 천칠백 명이
 한상 대중과 함께 보살계를 받았고, 
귀신에게 시식(施食)을 베풀었으며 
모든 생명을 방생하면서 이런 일들을 
모두 정토를 장엄하는데 회향하였다. 
그 때 모두 미륵의 하생(下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개보(開寶) 8년[975] 
2월 26일, 새벽에 일어나 향을 피워 
대중에게 고별하고 가부좌하고 죽었다. 
후에 어떤 스님이 임천(臨川)에서 와서 
몇 해가 되도록 그의 탑을 돌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내가 병이 들어 명부에 들어갔습니다.
 전각 왼편에 어떤 스님의 상(像)을 모셔놓고
 왕이 공손히 예경하고 공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가만히 물어보니
 ‘이 분은 항주의 영명 수 선사입니다.
 대체로 죽은 자는 모두 명부를 거치게 
마련입니다만 이 스님은 이미 바로 
서방의 상상품(上上品)에 태어났으므로 
왕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예경하게
 된 것입니다.’하였습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찬(贊) 

영명은 선법(禪法)을 얻었으면서 마음에 
정토를 새겨 두었으니, 자신을 위하고 
남을 위하는 넓고 큰 행원은
 그 광명이 만세에까지 비칠 것이다.
그 분은 하생한 미륵이실까?
 다시 태어난 선도(善導)이실까? 
지통(志通) 

석진(石晋: 후진後晋을 말함)의 
지통은 봉상(鳳翔) 사람이다. 
지자대사의 <정토의식(淨土儀式)>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며, 이로부터 서쪽을 
향하여서는 침도 뱉지 않고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으면서 전심으로 염불하였다. 
나중에 백학과 공작이 무리를 지어
 서쪽에서 날아오고, 또한 연꽃이 눈앞에서
 피었다 지는 것을 보고는 “백학과 공작은 
정토의 경계요, 연꽃의 빛나는 모양은 
태어날 곳이다. 정토가 나타났다.” 하고는, 
일어나 부처님께 예하고 죽었다. 
다비를 할 적에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불더미 위에 감돌았고, 
사리가 온 몸에 비늘처럼 얽혀있었다. 
찬(贊) 

 반드시 서쪽을 피하여 침을 뱉았고, 
앉아있을 때는 반드시 서쪽을 
행하였다 하니, 정성이 이와 
같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랴. 
요즘은 경솔하고 천박한 마음으로 
왕생을 바라고 있으나, 어려운 일이다. 
어떤 이는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한다. 아! 낙일(落日)을 관하게 
하신 분명한 경문도 있고, 지자대사는
나면서부터 서쪽을 향하여 가부하고 앉았으며, 
내지 정업을 닦았던 제현들도 서쪽을 향하여
앉아서 죽었다. 집착하지 않고 그럴 수 있었겠는가? 
 마음을 탐착해 경계를 혼탁하게 하면서 
일생을 그렁저렁 보내거나, 
겨우 정토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집착할까를 
걱정하고 있으니, 슬프고 애석한 일이다. 
오은(唔恩) 

송(宋) 오은은 고소(姑蘇) 상숙(常熟) 사람이다. 
나이 열셋에 <미타경>을 외우는 소리를 듣고
 마침내 부모님에게 출가할 것을 간청하였다. 
  종일 한 끼의 음식만을 먹고 항상 의발(衣鉢)을 
몸에 지녔으며, 재물을 모우지 않았고,
 누울 적에는 반드시 우협(右脅)으로 하고
 앉을 적에는 반드시 가부좌를 하였다. 
포살(布薩)할 적마다 슬피 울기를 마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널리 서방의 정업과 일승
(一乘)의 원지(圓旨)를 가르쳤다. 
누가 심기가 투합하지 않은데 대해 의심하는
 자가 있으면, 함께 독고(毒鼓)의 인연을 
지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옹희(雍熙) 2년[985] 8월 초하루, 밤에
 백광(白光)이 우물 속에서 비치는 것을 보고 
문인에게 “나는 가야겠다.” 하고는, 음식을 
끊고 말을 금하며 일심으로 염불하였다.
꿈에 한 사문이 금화로에 향을 사루어 들고는 
그의 방을 세 번 돌면서 스스로 ‘관정(灌頂)이
 여기와서 맞이한다.’ 하였다. 
꿈에서 깨어 문인을 불러, 가보니 
그때까지 기이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25일, <지관지귀<止觀指歸)>와 <관심의(觀心義)>
를 설해 마치고는 단정히 앉아 죽었다. 
사람들이 하늘음악이 공중에서 쟁쟁하게 울리면서 
점점 서쪽을 향하여 사라지는 것을 들었다. 
찬(贊) 

재물과 음식을 탐하지 않는 것은 청렴하고 
결백한 마음이요, 앉고 눕는 것을 구차하게 
하지 않은 것은 신중한 마음이며, 의발을 
항상 몸에 지닌 것은 지중한 마음이며, 
포살할 적마다 눈물을 흘린 것은 
성실한 마음이다
이 네 가지의 마음은 모두 정토의 인(因)으로서, 
그가 왕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사람들을 가르칠 적마다 서방의 
정업과 일승의 원교를 동시에 베푼 것은, 
깊이 염불문에 들어가는 은혜를 베푼 것이다. 

* 포살(布薩): 장정(長淨) 
또는 설계(說戒)라고 번역한다. 
동일지역 내의 비구들이 보름마다 
모여서 지나간 반 달간의 행위를 반성하고 
죄가 있으면 고백 참회하는 의식. 
* 독고(毒鼓): 독을 바른 북이라는 뜻. 
이 북소리는 사람을 죽일 수 있으므로
 <열반경>에서 말한 불성(佛性)이나 
상주(常住)의 소리는 중생의 오역(五逆)이나 
십악(十惡)을 죽여 불법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비유함. 
* 관정(灌頂) : 천태 지자대사의 수제자. 
염불 왕생하신 분. 
원정 상(圓淨常) 법사 

송(宋) 성상(省常)은 전당(錢塘) 
사람으로 일곱 살에 출가하였다. 
순화(湻化) 중에 남소경(南昭慶)에 살 적에 
여산의 가풍을 사모하여, 피를 내어 <화엄경> 
정행품(淨行品)을 쓰고, 연사(蓮社)라는 
이름을 바꾸어 정행(淨行)이라 하고,
 사대부로서 그 외에 참예한 자를 
정행제자(淨行弟子)라고 불렀다. 
그 중, 왕 문정공(王文正公) 단(旦)이 
수석으로, 한 때는 공경(公卿)과 
백목(佰牧)이 120 명, 비구가
 천여 명이나 될 때도 있었다. 
한림(翰林)인 소 역간(蘇易簡)이 정행품 
서(序)를 지어 ‘나도 마땅히 머리카락을 펴
 그의 발을 받들고, 살을 베어 그의 법을 
간청해도 오히려 부족할 것인데, 
하물며 변변찮은 문장과 천박한 학문으로
 이를 아까워 하랴.’ 하기도 하였다. 
천희(天禧) 4년[1020] 정월 12일,
 단정히 앉아 염불하더니, 큰 소리로
 “부처님이 오셨다.” 하고는, 
조용히 죽었다. 
찬(贊) 

원 공을 위시하여 선도(善導), 남악(南嶽), 
오회(五會), 영명(永明), 대암(臺岩)과 
끝에 가서 법사(성상)를 연사(蓮社)의 
칠조(七祖)라 부르며, 교화의 흥성함은
 옛이나 지금까지도 빛나고 있다. 
  그런데 그들 자신의 수행을 살펴보면, 
애쓰고 노력하기를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과 같이 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남에게 권할 
줄만 알았지 자신이 실행할 줄은 모른다. 
선배들에게 부합하기에 
아득히 먼일이 아니겠는가. 
정관(淨觀) 

송(宋) 정관은 가화(嘉禾) 적광암(寂光庵)에 
살면서 정토참법(淨土懺法)을 10여 년이나 닦았다. 
 어느날 제자에게 “나는 27일 후에 갈 것이다.
” 하더니, 그 때가 되자 2일 전에 붉은 연꽃을
 보았고, 다음날 또 노란 연화가 땅에 
가득한데, 꽃마다 화생(化生)의 
어린애가 꽃잎 속에 앉아 있는데 
선대(仙帶)를 매고 있는 것을 보았다. 
 3일째 되는 날 감실(龕室)에 들어가 단정히 
앉아 대중에게 염불하라 하고 잠시 후에 죽었다. 
찬(贊) 

염불하는 사람은 미리 때가 된 것을 안다.
 이것은 사바의 인연은 다하고 정토의
 인연이 성숙되어 자연히 성경(聖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원 공은 7일 전에, 지금 관(觀)은
 27일 전과 같은 따위다.
세상 사람들은 살아서는 실덕(實德)이
 없었으면서 죽을 때에 다달아 이를 
흉내내어 갖은 수단으로 꾸며 
식자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심지어 산채 불에 뛰어들어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귀신이나 사마(邪魔)에 붙거나 
악도에 떨어질 줄을 알지 못한다. 
참으로 연민스런 일이다. 
만약 아무 안목도 없는 무리들에게 이를 
부러워하여 본받게 한다면 그 피해는 더욱 
막대하다. 내가 왕생한 사례들을 모아보니, 
한 사람도 산채 그 몸을 불태운 자는 없었다. 
지혜로운 자는 이것을 보고 널리 세상에 
고하여 모든 어리석은 자를 구해주기 바란다. 
자운 참주(慈雲懺主) 

송(宋) 준식(遵式)은 태주(台州) 
임해현(臨海縣) 사람이다. 
학행이 고상하여 이름이
 양절(兩浙)에 자자하였다. 
안양에만 뜻을 두어 일찍이 반주삼매를 
행하여 90일 동안 피를 쏟도록 애썼으며,
 도량에 들어가서는 두 발의 살갗이
 터졌으나 죽음으로 스스로 맹서했다. 
  꿈에 관음보살이 손가락을 그의 입 속에 
넣어 몇 마리의 벌레를 끄집어 냈으며,
 또한 손가락 끝에서 감로를 꺼내 
그의 입에 부어 넣었다. 
꿈을 깨자 몸과 마음이 
가뿐한 가운데 병이 다 나아있었다. 
<정토결의행원(淨土決疑行願)>과 
<정토참법(淨土懺法)>을 지어 세상에 남겼다. 
천성(天聖) 때, 죽는 날 향을 사루어 
부처님께 예하고 ‘제불께서 증명하사 
안양에 왕생케 하소서.’ 하고 발원하고,
 밤이 되어 앉아서 죽었다. 
사람들이 큰 별이 영축봉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당시에 자운참주라 불렀다. 
찬(贊) 

극진히 참법(懺法)을 애쓰고 자신이 
행하면서 만세에까지 법을 남긴 이는 
고금에 한 사람일 따름이다. 심지어 보배의 
손으로 벌레를 끄집어내고 감로를 입에
 부어넣은 일은, 지극한 정성이 아니었다면 
누가 능히 그런 감응을 얻을 수 있겠는가. 

* 양절(兩浙): 절동(浙東)과 절서(浙西). 
절동은 전단강 이남. 절서는 전단강 이북. 
* 준식(遵式. 964-1032): 자운 준식 스님의 
스승은 고려 전기의 스님으로 천태종 16대
 조사이신 보운 의통(寶雲義通. 927-988)
이십니다. 의통스님은 항상 사람들을 부를 때 ‘
고향 사람(鄕人)’이라 했는데, 그 까닭을 물으면, 
‘나는 극락정토를 고향으로 삼는다. 
모든 사람이 다 왕생해야 할 것이므로 모두가 
다 고향사람이다’라고 대답하셨답니다. 
종탄 소주(宗坦疏主) 

송(宋) 종탄은
 노주(潞州) 여성(黎城) 사람이다. 
  50년 동안 명성이 강림(講林)에 
자자하더니, 늙어서 당주(唐州)의 청대진
(靑臺鎭)에서 정토만을 구하여 삼업(三業. 
몸과 입과 마음)과 사의(四儀.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네 가지 행동거지)에
 잠시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정화(政和) 4년[1114] 4월 27일, 꿈에 아미타불이 
‘너의 설법도 이젠 6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후에는 정토에 태어날 것이다.’ 하니,
 꿈을 깨어서 그 사실을 대중에게 알렸다. 
  5월 4일, 대중을 모우고는 “인연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당연히 때가 있게 마련이다.
 정토의 수승한 인연은 반드시 때를 
의지해야만 한다. 대중들은 염불하여 
나의 왕생을 도와다오.” 하고는,
 앉아서 죽었다. 
그 때 온 하늘에 뇌성이 치고 흰 구름이 
땅을 덮더니, 3일 만에야 그쳤다. 
소지하고 있던 마노 염주가 그 때까지 
손에서 구르고 있어서 대중이 가지려 
했으나 끝내 그러지 못했다. 
감응한 사실은 여기서 자세히 적지 못한다. 
따로 적으려 한다. 
자조 종주(慈照宗主) 

송(宋) 자원(子元)은 호가 만사휴(萬事休)로서,
 평강(平江) 곤산(昆山) 사람이다. 
 어렸을 적부터 지관(止觀)을 익히다, 
정 중에서 까마귀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고는 
이십여 년 동안 종이 속에서 찾았으나 
찾고 찾아도 더욱 막막할 뿐이었네 
홀연히 까마귀 울음을 듣고 
비로소 이제까지 그릇 용심한 줄 알았네. 
이십여년지상심 二十餘年紙上尋 
심래심거전침음 尋來尋去轉沈吟 
홀연청득자아규 忽然聽得慈鴉叫 
시신종전착용심 始信從前錯用心 
하고 송(頌)하였다. 
그리하여 남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널리 염불을 권장하고, 
법계 중생을 대신하여 예불 참회하며 
안양에 왕생하기를 기도하였다. 
백련참당(白蓮懺堂)을 짓고 
<사토삼관선불도(四土三觀選佛圖)>를 
저술하여 염불종의 안목을 열어보였다. 
역순의 경계 속에서도 마음을 움직인 적이 
없었으므로 고종황제(高宗皇帝)가 불러
 보시고 자조(慈照)라는 호를 내렸다. 
 3월 23일, 탁성(鐸城)에서 대중에게 
“나는 교화할 인연이 이미 다하였다.
 이젠 가야겠다.” 하고는, 
합장한 채 죽었다. 
다비에 붙이니 무수한 사리가 나와, 나라에서 
최승지탑(最勝之塔)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법지(法持) 

송(宋) 법지는 화도사(化度寺)에 살았다. 
미타참(彌陀懺)을 닦으면서 염부제를 
하루빨리 벗어나 안양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였다. 
나중에 병이 들어 눈물을 흘리며 슬파 울며
 접인해 주시기를 기원하며 큰 소리로
 끊임없이 염불하더니, 홀연히 장육
(丈六: 1장 6척尺)의 부처님 몸이 못 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이젠 중품(中品)에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하고는, 서쪽을 향하여 죽었다. 
찬(贊) 

인간의 정리란 오래 살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런데 죽음을 재촉하면서 
안양을 간구했으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지극한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러나 발원은 그럴 수 있다 하겠으나, 
바다에 뛰어들거나 절벽 위에서 몸을 던지며 
나무더미를 쌓아놓고 스스로 불길 속에
 뛰어드는 것은 마군의 짓이다. 
본여(本如) 

송(宋) 본여는 호를 신조(神照)라고 하였다.
 동산(東山) 승천사(承天寺)에 살면서, 
군수인 장순(張郇)과 결사(結社)를 맺었다. 
  하루는 자리에 올라 설법하여 대중과 
결별하고 물러나와 앉아서 죽었다. 
  그 때 강가의 어부가 구름 속에 어떤 스님이
 서쪽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 해 탑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전과 같고 탑 안에 연꽃이 피어있었다. 
기 법사(基法師) 

송(宋) 기 법사는 보운(寶雲: 고려스님인 
보운 의통)에게서 배웠다.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에 
살면서 일념으로 염불하였다. 
  하루는 병색을 보이면서도 제자들을 
위해 널리 현지(玄旨)를 설하고 있노라니,
 대중들이 보니 서방에서 광명이 비치면서 
공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스님이 “아미타불과 두 보살이 오셨다.
” 하고는, 오른쪽으로 누워 서쪽을 향해 죽었다.
문인이 아미타불이 스님에게 초세여래
(超世如來)라고 수기하는 꿈을 꾸었고, 
어떤 이는 스님이 청련화대(靑蓮花臺)에 
앉아있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법지(法智) 선사가 이렇게 찬탄한 적이 있었다.

병들어 누웠으면서 현지를 설했고 
임종에 부처님을 친견했으니
참으로 공경할 만한 어른이시다. 
와병담현  臥病談玄 
임종견불  臨終見佛 
시가경야  是可敬也 
찬(贊) 

 어떤 이는 기(基)가 어떻게 수기를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할지 모른다. 
  아! ‘여래 무량광을 친견하옵고 현전에서 
제가 보리기(菩提記)를 받고저.’ 하는 
말을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약우(若愚) 

송(宋) 약우는 운천(雲川) 선담(仙潭)에
 살면서 무량수각(無量壽閣)을 지어
 스님들과 세속인들에게 염불하기를 
권하며 30년 동안 정근하였다. 
도잠(道潛)과 칙장(則章), 두 스님과 
벗을 맺었는데, 잠은 시(詩)에 능하여
 명예를 가까이 하였으나, 
우와 장은 오직 실행에만 힘썼다. 
죽을 무렵에 이르러, 꿈에 신인(神人)이
 ‘너의 동학인 칙장은 보현행원 삼매를
 얻어 이미 정토에 태어나 너를
 기다리고 있다.’ 하였다. 
  그리하여 우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서
 대중에게 <관경(觀經)>을 읽게 하고 
단정히 앉아 묵묵히 있더니,
 갑자기 “정토가 앞에 나타났다.
 나는 가야겠다.” 하고는, 
다음과 같이 게(偈)를 쓰고는 죽었다. 
본래 집이 없으니 돌아갈 곳 있으랴만 
구름 속에 길이 있는 줄 누가 알랴 
시냇빛(계광溪光)에 서산 달이 지니 
바로 선담(仙潭)에서 꿈을 깰 때네.
본자무가가득귀  本自無家可得歸 
운변유로허수지  雲邊有路許誰知 
계광요락서산월  溪光搖落西山月 
정시선담몽단시  正是仙潭夢斷時 
허공 속에 천 꽃(千花)의 그물 
꿈 속엔 칠보의 연못 
서방의 길을 밟고나서는 
다시는 한 점의 의심도 없네 
공리천화라망  空裏千花羅網 
몽중칠보연지  夢中七寶蓮池 
답득서방로온  踏得西方路穩 
갱무일점호의  更無一點狐疑 
찬(贊) 

우와 잠과 장은 벗이었으나,
 잠은 시에 탐익해 명예를 가까이 하여 
정토의 이익을 잃어버렸다. 
세상의 지혜를 멀리하고 세상과의 
인연을 소원(疎遠)히 하라. 서방을 
찾는 자는 이를 반드시 명심하라. 
수진(守眞) 

송(宋) 수진은 영흥(永興) 사람이었다. 
기신론과 법계관(法界觀)을 강의하면서,
 늘 한밤중에는 무량수불왕생비밀인
(無量壽佛往生秘密印)을 맺고서 
서방에 뜻을 두었다. 
어느날 새벽, 몸이 정토에 오르는 것을 
느끼고서 눈을 들어 부처님을 보고 
상 앞에 엎드려 ‘48원으로 능히 나를 제도하실 분!’ 
하고는, 향과 꽃을 가지고 법당에 들어가 
공양하고 자리에 돌아와 죽었다. 
지례(知禮) 

송(宋) 지례는 
호를 법지(法智)라고 하였다. 
남호(南湖)에 살 적에 
<묘종초(妙宗鈔)>를 지어 관심(觀心)과
 관불(觀佛)의 뜻을 널리 밝혔다. 
해마다 2월 보름에는 염불시계회
(念佛施戒會)를 열어 만인들을 깨우쳤고, 
<융심해(融心解)>를 찬술하여 일심삼관
(一心三觀)과 사정토(四淨土)의 뜻을 밝혔다. 
  후일 정월 초하루에 광명참(光明懺)을 
주관하더니, 닷새 째 되는 날, 대중을 불러 
설법하고 수백 번의 부처님 명호를 
부르고서 조용히 앉아 죽었다. 
찬(贊) 

예(禮)는 <묘종초>을 짓고 정관(淨觀)을 
설하여 널리 천태의 교의를 밝혔으나, 임종에 
염불하며 앉아서 죽었으니, 어찌 부질없이 
입을 놀리는 자와 같은 수준에서 논의할 수 있으랴. 

* <묘종초(妙宗鈔)>: 천태 지자대사의 
<관무량수경소>를 상세히 해설한 책. 
* 일심삼관(一心三觀): 천태종의 
관상법(觀想法)의 하나. 일념의 마음중에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관(中觀)의 3관을 
동시에 아우르는 것. 현상세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공관, 현상세계를 긍정적으로 보는 가관, 
이 양자가 서로 갖추어져야 비로소 
진리를 체득할 수 있다고 하는 중관의 3관을
 일념으로 동시에 관념하는 것. 
* 사정토(四淨土): 천태 지자대사가 
분류한 정토의 4종류인데, 지례가
 <묘종초>에서 자세히 설함. 
1. 범성동거토(凡聖同居土) - 
범부와 상인이 함께 머무는 정토. 
2. 방편유여토(方便有餘土) -
 2승이 방편으로 미혹은 끊었으나, 
근본무명의 견사혹(見思惑)을 끊지 
못하여 삼계 밖에 태어나 생사의 
몸을 받아 태어나는 정토. 
3. 실보무장애토(實報無障碍土) - 
중도(中道)를 깨친 법신보살이 
법성신(法性身)을 체득하여 머무는 
정토. 미세한 무명은 남아있다. 
4. 상적광토(常寂光土) - 
법신불이 머무는 정토. 시공을 초월한
 묘각(妙覺)의 지혜가 머무는 곳. 
* 사명 지례(四明知禮960-1028)스님은 
천태종 17대 조사이며, 자운 준식과 동문으로, 
스승은 고려 스님으로 천태종 16대 조사이신
 보운 의통(寶雲義通. 927-988)이십니다. 
유엄(有嚴) 

송(宋) 유엄은 태주(台州) 적성(赤城) 
숭선사(崇善寺)에 살면서 신조(神照)를 
의지하여 천태교를 배웠다. 
만년에 명자나무 아래에 띠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사암(樝庵)이라고 호하였다.
평생 독실히 정업을 닦아 ‘안양 고향을 
생각함[懷安養故鄕]’이라는 시가 
당시에 전하였다.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1101] 4월, 
죽음에 임박하여 보배 연못에 큰 연꽃이 
피어있고 하늘음악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을 보고는 ‘정토로 돌아감[餞歸淨土]
’이라는 시를 지어 대중에게 보이고
 7일 후에 가부좌하고 죽었다. 
탑 위에 달과 같은 광명이 
서려있더니 3일 후에야 사라졌다. 
찬(贊) 

앞의 법상(法祥)은 거울을 비추는 듯한 
광명이 벽 위에 나타났고, 지금 엄(嚴) 
공은 달과 같은 광명이 탑 위에 나타났다.
 이것은 몸과 마음이 형철(瑩徹之明)했던 
영험이었다. 
그리고 광명이 방에 가득했던 경우나 
금색 광명이 강변 수백 리까지 뻗쳤던 경우를, 
아! 이것들을 거짓이라 하겠는가. 
혜명(慧明) 

송(宋) 혜명은 호를 회암(晦庵)이라
 하고, 혜광(慧光)에게서 배웠다. 
  만년에 청산(菁山) 상조사(常照寺)에 
있으면서 정업을 닦아, 하루에 반드시 
법화, 능엄, 원각경을 독송하고
 미타의 명호를 만 번 불렀다. 
경원(慶元) 기미(己未)[1199] 봄에 병색을 
보이더니, 제자에게 “나는 대승을 배워정토에 
왕생하려 하였다. 지금 그 뜻을 이루었다
.” 하고는 발을 포개고 앉아 죽었다. 
 대중이 하늘음악이 서쪽에서 흘러와
 머리 위에서 맴도는 것을 들었다. 
다비하니 오색의 사리가 무수하였다. 
사찬(師贊) 

 송(宋) 사찬은 옹주(雍州) 사람으로,
 승동(僧童)이 되어 열네 살적부터
 염불을 끊이지 않고 불렀다. 
문득 병이 들어 갑자기 죽더니, 
잠시 후에 다시 깨어나 스승과 부모에게
 “아미타불이 이곳에 오셨으니
 저도 따라가려 합니다.” 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보니, 공중에 보대(寶臺)와 
오색의 기이한 광명이 서쪽을 향하여 사라졌다. 
두 사미(二沙彌) 

수(隋) 문주(汶州)에 두 사미가 있었는데, 
뜻을 함께 하여 염불하더니 
큰 사미가 갑자기 죽었다. 
정토에 이르러 부처님을 친견하고 
“아우인 사미와 함께 정업을 닦았습니다. 
왕생할 수 있사오리까?” 하고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저가 너를 권하였기에 
너도 발심하게 되었다. 너는 지금 
돌아가서 더욱 정업에 힘써라. 3년 후에는
함께 이곳으로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때가 되어 두 사람이 대지가 진동하고 
하늘 꽃이 휘날리는 가운데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함께 죽었다. 
요연(了然) 

송(宋) 요연 법사는 호를 지용(智涌)이라 하고
, 24년 동안 백련사(白蓮寺)에 살았다.
 꿈에 용 두 마리가 공중에서 유희하더니, 
한 마리가 신인(神人)으로 변하여 소매 속에서 
편지를 꺼내보고 ‘스님께서 7일 후에는
 가실 것입니다.’ 하였다. 
  잠에서 깨어 대중을 모아 설법하고 ‘
염불의 힘으로 극락국에 왕생한다. 
너희들도 힘쓰지 않으랴.’ 하고 크게 쓰고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서 대중에게 <미타경>을 
독송하게 하여 ‘서방세계’라고
 한 대목에 이르러 홀연히 죽었다. 
능인사(能仁寺)의 스님들이 누구나 
하늘음악과 상서로운 광명이 하늘가에서 
비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조(思照) 

송(宋) 석사조(釋思照)는 연종(蓮宗)을
 연구하고 정업에 전심하여 사경(四更. 오전1-3시)
만 되면 일어나 부처님 명호를 부르니, 
게으른 비구는 편안히 잠을 잘 수 없었다. 
법장의 48원을 본받아 승속을 모아 염정회
(念淨會)를 만들어 30년 동안 주관하였다. 
어느날 병이 들어 누워있다 꿈에 장육(丈六)의 
금빛나는 몸을 보고, 대중을 모아 염불하다 
홀연히 큰소리로 대중과 함께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손가락을 구부려
 인(印)을 맺고는 앉아 죽었다. 
  다비하니 치아와 염주는 불타지 않았다.
지렴(智廉) 

송(宋) 지렴은 상우(上虞) 화도사
(化度寺)에 살았다. 처음에는 
선문에 두루 참예하였으나, 늙어서는
 한결같이 서방에 뜻을 두었다. 
  경원(慶元) 개원(改元)[1195] 8월에 
대중에게 고별하고 “나는 꿈에서 아미타불이 
대중에게 둘러싸여 설법하시는 것을 보았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선인들은 정업에 전심하여 
나의 국토에 와서 왕생하라’하셨다. 
나는 이렇게 승상(勝相)을 보았다. 
나는 반드시 왕생할 것이다.” 하고, 
다음과 같이 게(偈)를 쓰고 몸을 돌려 
서방을 행한 채 결인(結印)하고 갔다. 
기러기가 장공을 지나감이여 
그림자가 한수(寒水)에 잠기도다 
죽음도 태어남도 없음이여 
연화국이로다 
안과장공   雁過長空 
영침한수   影沈寒水 
무멸무생   無滅無生 
연화국리   蓮花國裏 
지심(智深) 

송(宋) 지심은 호를 자천(慈川)이라 하고,
 해월(海月)에게서 배웠다. 
고향인 가화(嘉禾)로 돌아가 광명참회(光明懺會)를 
열어 20년을 하루같이 시행하다, 늙어서는 
염불에만 뜻을 두어 항상 정업으로 사람들을
 교화하여 무수한 자를 왕생케 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병색을 보이었으나 객이 와서
 문안을 여쭐 때도 평시와 같이 담론을 나누더니, 
객이 문 밖을 나가자 마자 금방 천화(遷化)하였다. 
사람들이 보니 붉은 구름이 서쪽을 향하여 사라졌다. 
법인(法印 혹은 法因) - 
신수대장경에는 法因으로 나옴. 

송(宋) 법인은 사명(四明) 광수사(廣壽寺)에서 
30년 동안 살면서 일심으로 정토를 찾았다. 
 나중에 병이 들어 대중을 모아 <관경(觀經)>을 
읽게 하고 사흘 동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더니, 
문인에게 “나는 가야겠다.” 하고 말하였다. 
어떤 이가 게(偈)를 남겨 줄 것을 간청했더니 
나와 미타 본래 둘 아니나 
둘이니 둘 아니니 하는 것 모두 버렸네 
나 이제 이렇게 미타를 친견하니 
감응과 사귐 부사의하네 
아여미타본무이   我與彌陀本無二 
이여불이병개리   二與不二並皆離 
아금여시견미타   我今如是見彌陀 
감응도교난사의   感應道交難思議 
하고 쓰고는 단정히 앉아 죽었다. 
찬(贊) 

나의 마음으로 저 부처를 생각하면 중생과 
부처가 완연하지만, 범부의 마음으로 부처의 
마음을 보면 중생과 부처가 어찌 다르랴. 
  다르지 않으므로 두 가지를 여의었고, 
완연하므로 두 가지가 아닌 것까지 여의었으며, 
두 가지를 여의었으므로 다른 곳을 따라 찾지 않고,
 두 가지가 아닌 것까지 여의었으므로 
정토를 찾는 것도 상관없다. 
  또한 두 가지를 여의었으므로 범정(凡情)이
 다하였고, 두 가지가 아닌 것까지 여의었으므로
 성해(聖解)마저 다 없어졌다. 
  이렇게 부처를 보는 자는 늘 사바요, 
늘 정토며, 생각마다 석가가 출세하고 언제나 
미륵이 하생할 것이니, 진정으로 미타를
 친견한 자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얼굴을 마주보고 
만나더라도 만 리의 구름일 뿐이다. 
지선(智仙) 

송(宋) 지선은 호를 진교(眞敎)라고 하였다. 
백련사(白蓮寺)에 살면서 13년 동안
 도를 강의하며 서방을 향한 예념(禮念)을
 잠시도 버린 적이 없었다. 
  어느날 저녁, 약간의 병색을 보이고는 관당(觀堂)의
 대중을 청하여 <미타경>을 읽게 하다가, 
송경이 끝나지도 않아서 앉아서 죽었다. 
  이웃 능인사(能仁寺)에 사는 스님들이 
모두 그윽한 하늘 음악을 듣고서,
 여명이 되어 스님이 돌아간 것을 알았다. 
종리(宗利) 

송(宋) 종리는 신성(新城) 벽소(碧沼)에
 살면서 10년 동안 염불삼매를 닦았다.
  나중에 도미산(道味山)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일상(一相)이라고 불렀다. 
  15년이 지나 어느날 제자에게 “내가 벽연화
(碧蓮花)가 허공 속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하더니,
 3일 후에 다시 “부처님이 오셨다.” 하고는, 
이렇게 게(偈)를 쓰고 조용히 죽었다. 
내 나이 구십, 머리는 눈이 내린 듯 
세상에는 으례 백년객(百年客) 없네 
일상도인(一相道人)이 돌아감이여 
금대에 앉으니 건곤이 비좁네 
오년구십두설백   吾年九十頭雪白 
세상응무백년객   世相應無百年客 
일상도인귀거래   一相道人歸去來 
금대좌단건곤착   金帶坐斷乾坤窄 
제옥(齊玉) 

송(宋) 제옥은 호를 혜각(慧覺)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잡천(霅川) 보장사(寶藏寺)에서 
정토회를 열어 주관하다, 나중에는 상축(上竺)에 
살면서 한밤중에는 미타상을 머리에 이고
 행도(行道)하면서 염불하였다. 
하루는 수좌에게 “책상 앞에 다보탑이 나타났으나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다. 바라는 것은 정토일 뿐이다. 
대중을 모우고 나를 위해 염불하라,” 하였다. 
수좌가 종을 쳐서 스님들이 백여 명이 모이니
 “내가 이미 부처님을 친견하였다.” 하고는,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갔다. 
찬(贊) 

다보탑도 역시 불국토인데, 
옥(玉)은 어찌하여 원치 않은 것일까? 
 옛날 위제희(韋提希)가 두루 정토를 살펴보고는
 유독 안양만을 요구했던 것은, 대개 전심으로 
공덕을 닦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줄을 안다면 서방만을 말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원조 본(圓照本)선사 

송(宋) 종본(宗本)은 
상주(常州) 무석(無錫) 사람이다. 
처음에는 천의 회(天衣懷) 선사를 
참예하여 염불로 깨달음이 있었다. 
 나중에 정자(淨慈)로 옮겼다가, 조칙을 
받들어 동경(東京) 혜림사(慧林寺)에 들어가, 
연화전(延和殿)에서 임금을 대하여 
밀지(密智-旨)를 설하였다. 
  평소에 몰래 정업을 닦아, 뇌봉재(雷峯才)
 법사가 신통으로 정토를 여행하다, 
연화 한 송이가 매우 수려한 것을 보고, 물으니 
정자사(淨慈寺)의 본(本) 선사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또한 자복 희(慈福曦) 공이 혜림사에 와서 
그의 발에 예하고 돈을 시주하고 갔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정 중에서 금련화
(金蓮花)를 보았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본(本) 공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또한 무수한
 연꽃이 있었는데, 이는 태어날 자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또한 시든 것도 있었는데, 이는 퇴타(退墮)한 
사람의 것이라고 하였다.” 하고 말하였다. 
  어떤 이가 “스님께서는 직지(直指: 禪法)을 
전해 받으셨으면서 어찌하여 연경(蓮境)을 
사모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비록 종문에 있으나 
정토도 겸수(兼修)할 뿐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나중에 임종에 편안히 앉아 갔다. 
  시호는 원조 선사다.
찬(贊) 

옛날 중봉(中峯)과 천여(天如)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선과 정토가 이치는 하나이나 공(功)은 같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 겸수한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대개 겸한다고 한 뜻이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두 배에 발을 걸친다는 의미의 겸한다는 
뜻은 참으로 옳지 않다. 그러나 원통(圓通)에
 방해되지 않는다는 의미의 겸한다는 뜻은 
어찌 옳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더욱이 선 밖에 정토가 없고보면, 
국토가 바로 마음이어서 원래 두 가지
 물건이 아니다. 어찌 
다시 겸한다고 말할 것이 있겠는가. 
대통 본(大通本) 선사 

송(宋) 선본(善本)은 화엄을 시험받고
 득도하였다. 조칙을 받들어 법운(法雲)에 
살면서 대통이라는 호를 받았다. 
  나중에 항주 상오사(象塢寺)로 돌아가 정업을 
닦다가, 정 중에서 아미타불이 금색의 몸을 보이신 
것을 보고, 어느날 아침 문인에게 
“단지 3일 동안만 머물 것이다.” 하더니, 
그 때가 되어 가부좌하고 앉아 
염불하며 서쪽을 향하여 죽었다. 
영지 조(靈芝照) 선사 

  송(宋) 원조(圓照)는 영지사(靈芝寺)에 살았다.
 계율을 숭상하고 독실히 정업에 전념하여 염불을 
끊이지 않았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관경(觀經)>
과 ‘보현행원품’을 읽게 하고는, 가부좌하고 죽었다. 
  서호(西湖)의 어부들이 
모두 공중에서 음악소리를 들었다. 
청조 율사(淸照律師) 

송(宋) 혜형(慧亨)은
 무림(武林) 연수사(延壽寺)에 살았다.
  처음에는 영지(靈芝)를 의지하여 계율을
 읽혔으나, 60년 동안 정업만을 전수(專修)하여 
사람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염불을 권장하였다. 
  보각(寶閣)을 짓고 셋 성인의 상을 모셨는데 
거룩하기 비할 데 없었다.   강 자임(江自任)이라는
 자가 어느날 꿈에 보좌(寶座)가 허공에서
 내려와 ‘형(亨) 율사가 이 자리에 앉을 것이다
.’ 하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 
그 때 마침 사우(社友)인 손(孫) 거사가 미리
 형(亨)에게 고별하고 집에서 인(印)을 맺고 죽었는데, 
스님이 가서 향을 사루고 돌아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손군도 갔으니 나도 가야겠다.” 하고는, 
대중을 모아 염불하고 이렇게 게(偈)를 설하고 갔다. 
입으로는 미타를 부르고 
생각으로는 백호(白毫)를 생각하라 
이렇게 하여 퇴타하지 않으면 
반드시 안양에 왕생하리 
미타구구칭   彌陀口口稱 
백호염념상   白毫念念想 
지차불퇴심   持此不退心 
결정생안양   決定生安養 
호를 청조 율사라고 하였다. 
찬(贊) 

60년 동안 정업을 닦았으니, 
임종에 상서로운 감응을 어찌 의심하랴. 
 세상에는 잠깐의 공력으로 정토가 영험이 
없다고 탓하는 자도 있다. 잘못된 노릇이다. 
사민(思敏) 

송(宋) 사민은 영지 율사를 의지하여 수계하는 
법을 보충하였고, 20년 동안 전심으로 염불하던 이다. 
나중에 병이 들어 대중에게 반 달 동안 
<관경(觀經)>을 읽게 하더니, 3일이 지나서 
화불(化佛)이 허공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임종에 큰소리로 염불하는 소리가 뇌성이 치듯 하였다. 
혹서(酷暑)에 시체를 감실에 두었으나 7일 동안 
변하지 않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희담(晞湛) 

송(宋) 희담은 산음(山陰) 사람이다. 젊어서는 
유생이었으나 홀연히 세간을 싫어하여 출가하였다. 
형(瑩) 스님과 완두(阮杜)에 무량수불전
(無量壽佛殿)을 세우고 정업을 전수하여
 앉아있을 적에도 서방을 등지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하여 항상 부처님과 두 보살의
 모습을 친견하더니, 어느날 저녁 서쪽을 향하여 
염불하고 똑바로 앉아 인(印)을 맺고 죽었다. 
등 법사(登法師) 

수(隋) 등 법사는 병주(幷州) 흥국사(興國寺)에서 
<열반경>을 강의할 때, 와서 설법을 듣는 자에게
 널리 염불왕생을 권장하였다. 
  개황(開皇) 12년[592], 죽을 때는 기이한 향기가
 허공에 가득하였고, 장사지낼 때까지 광명과 
향기로운 구름이 온 마을에 서리고 있었다. 
승애(僧厓) 

석승애는 익주 다보사(多寶寺)에 살았다. 
간절히 정업에 전심하여 다섯 손가락을 태워 
서방의 삼성(三聖)에게 공양하였다. 
  누가 고통스럽지 않았는가 하고 물으니 
“마음이 이미 고통스럽지 않았거든 손가락이 어찌
 고통스러우랴.” 하고 대답하였다.
임종에 하늘꽃이 비내리 듯 하였고 
사람들이 보니 애(厓)의 납의와 석장이
 5,6백의 스님들과 함께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장 법사(藏法師) 

송(宋) 승장(僧藏)은 분주(汾州) 사람이다. 
일생동안 스님들이나 세속인의 예배를 받은 적이 
없이 정토에만 전수하였다.
  죽을 때 하늘 음악이 차례로 와서 맞이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더니, 서방의 부처님이 오시자 
대중과 고별하고 죽었다. 
고산원(孤山圓) 법사 

송(宋) 지원(智圓)은 서호(西湖) 고산에 살면서 
수많은 경전들을 주석하였고, 정토에 전심하여 
<미타소(彌陀疏)>와 <서자초(西資鈔)>를 
지어 왕생을 권장하였다. 
죽어 도기(陶器)에 묻었는데, 15년 후에 장마로
 산이 무너져 도기를 열어보니, 몸이 엄연한 채
 손톱과 머리카락이 그대로 자라고 있었다. 
찬(贊) 

죽은 후에도 전과 다름 없었다는 말만 하고,
임종에 왕생했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죽은 후의 현상을 살펴보건대 그 영험은 
닦은 대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바로 그 청정한 업이
 견고함으로 해서 감응한 것이다. 
 반드시 왕생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원정(元淨) 

송(宋) 원정은 항주 사람이다. 
열두 살에 출가하였고 나중에는 용정사(龍井寺)에
 살았는데, 당시의 지식인이었던 조청헌(趙淸獻) 
공과 소문충(蘇文忠) 공과 같은 무리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죽을 때 방원암(方圓庵)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내가 7일 동안만 아무 장애가 
없다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말하더니, 7일 후에 게(偈)를 써서 대중에게 
보이고는 편안히 앉아 죽었다. 
유미타(喩彌陀) 

  송(宋) 사정(思淨)은 성이 유씨로서 전당 
사람이다. 자호를 정토자(淨土子)라고 하였다. 
  젊어서는 영(瑛) 법사를 모시고 <법화경>을 
강의하였으나, 나중에는 염불에 전념하고 
여가가 있으면 불화를 그렸다. 
  그림을 그릴 때에는 고요한 방에서 조용히 
생각하여 미타의 광명을 보고서야 붓을 놓았다. 
소흥(紹興) 정사(丁巳)[1137]에 7일 동안 
단정히 앉아 일심으로 염불하다 편안히 갔다. 
찬(贊) 

 부처를 그리고 부처를 관하는 것이
 잘 하기만 하면 자못 같을 수도 있다.
대개 그림은 능히 사람을 말의 배 속에 둘 수도 있거든, 
어찌 사람을 불국에 두지 못하랴. 그렇다면 화공이 
부처님을 그려 어찌 왕생하지 못하랴만 
  아! 그들에게 물어보라. 
방은 반드시 고요하고 생각은 반드시 조용한가 하고. 
  더욱이 화공은 온갖 형상을 마음대로 그리지 않는가. 
그러나 유(喩) 노인은 오직 한 부처님에만 전념하였다. 
  전념하면 관하는 것이지 그리는 것이 아니다.
 단청하는 자들은 이것을 핑계하지 말라. 
몽윤(蒙潤) 

석몽윤은 자(字)가 옥강(玉岡)으로, 
고원(古源) 선사에게서 법을 받았다. 
늙어서는 풍황령(風篁嶺)의 백련암(白蓮庵)에 
살면서 문을 닫아 걸고 염불하였다. 
임종에 화불(化佛)이 와서 맞이하고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운옥(雲屋) 

 원(元) 선주(善住)는 자가 운옥으로 소주 사람이다. 
문을 닫아 걸고 종일 염불하여 병이 들어도 변함없었다. 
 죽을 때에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저서로 <안양전(安養傳)>과 <곡향집(谷響集)>이 있다. 
지관주(旨觀主) 

원(元) 지관주는 자가 별종(別宗)으로 항주 사람이다. 
계덕이 매우 엄정했고 용산(龍山)의 서쪽 산록에 
관실(觀室)을 짓고 염불삼매를 수행하여, 비록 병난
(兵亂)을 피해 도망하면서도 잠시도 버리지 않았다. 
  임종에 병 없이 목욕하고 단정히 앉아 죽었다. 
  지운 인(芝雲仁) 법사의 <행업집(行業集)>
에 자세한 행적을 기록하였다. 
담의(曇懿) 

송(宋) 담의는 전당에서 의업(醫業)에 종사했던 이다. 
  만년에 염불삼매를 닦으며 평소에 모아놓았던 
재산을 내어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하고, 
불상을 조성하고 목욕소를 시설하였다. 
이렇게 20년 동안 한 후, 나중에 병이 들었으나 
일체 약을 멀리하고 일곱 분의 스님들을 모셔
염불을 간청하였다. 
다음날 크기가 집채만한 연화를 보았고, 
또 하루는 범승(梵僧)이 침대 곁에 다가와 
안부하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밤중에 대중들이 염불소리가 차츰 낮아지는 
것을 듣고 가보니 편안히 죽어가고 있었다. 
태미(太微) 

송(宋) 태미는 어린아이 적에 전당의
 법안(法安) 법사에게 출가하였다. 
처음에 <미타경>을 주니 끝까지
 외워버리는 것이었다. 
구족계를 받고 나서는 문에 빗장을 
지르고 염뷸에 전념하였다. 
  이와같이 정진하여 늘 뒷산을 거닐다, 
홀연히 젓대소리를 듣고 활연히 깨달았다. 
이로부터 젓대 하나를 들고 스스로 즐겼다
  능 감부(凌監簿)라는 이가 있었는데, 
함께 정업을 닦던 자였다. 그는 미(微)를
 ‘정토향(淨土鄕)의 형님’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문을 두드리며 “정토향의 
아우가 뵐까 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미(微)가 “내일 정토에서 만나세
. 오늘은 염불하느라 한참 바쁘네.” 하였다.
  다음날 아침, 아침 공양에 참석치 않은 것을
 이상히 여겨 가 보니, 젓대와 발우와 선상을 
이미 불태워버리고 땅 위에 가부좌한 채 죽어있었다. 
찬(贊) 

젓대를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하니, 고인은 나름대로 
젓대에 깨달음의 노래를 실어 불사를 지었던 것이다.
  구지(俱胝) 화상은 천룡(天龍) 화상에게서
 일지두선(一指頭禪)을 얻어 종신토록 손가락을 
세워 보였으며, 단(端) 공은 사자놀이를 보고 
심지(心地)를 발명(發明)하고는 늘 오색이 찬란한 
비단옷을 입고 다녔다. 그리고 <능엄경>을 잘못 
읽고서는 구두점(句讀點)을 고치지 않았던 경우도 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이와 유사한 일이다. 함부로 미쳐 
날뛰면서 방자를 떠는 자들은 이런 일을 핑계대지 말라. 

* 일지두선(一指頭禪): 구지화상이 천룡선사가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곳에서 깨닫고,
 이후로 학자들이 참문(叅問)하면 언제나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는 고사. 
* 단(端) 공: 정단(淨端)을 말함. 송(宋) 귀안(歸安) 
사람. 용화 악(容華岳) 선사의 제자. 
용흠(用欽) 

송(宋) 용흠은 전당 칠보원(七寶院)에 살면서
 대지(大智)를 의지하여 계율을 배웠다. 
  대지가 대중에게 ‘살아서 계행을 청정히 
지키면 죽어서 안양에 돌아간다.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일을 이것으로
 다 마칠 수 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정토를 결심하여 한결같이 물러가지
 않으며, 하루에 염불 3만 번을 불렀다. 
  하루는 정 중에서 정토를 여행하다, 
부처님과 보살과 갖가지 기이한 모양들을 보고, 
시자에게 “나는 내일 서방으로 간다.” 하고는,
 대중을 모아 염불하고 여명에 합장한 채 
서쪽을 바라보면서 가부좌하고 죽었다. 
구법화(久法華) 

송(宋) 가구(可久)는 명주(明州)에 살았다.
 <법화경>을 읽으면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했으므로 당시에 흔히 구법화라고 불렀다. 
원우(元祐) 8년[1093], 나이 81세에 앉아서 죽었다. 
  3일 후에 다시 깨어나 사람들에게 
“내가 정토의 경계를 보니 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연화대 위에마다 
태어날 자의 이름을 표기해 두었는데, 
한 금대(金臺)에는 성도부(城都府) 광교원(廣敎院)
 훈(勳) 공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한 곳에는
 명주(明州) 손 십이랑(孫十二郞)이 적혀 있었으며
, 한 곳에는 가구(可久)의 이름이 있었다. 
또한 한 은대(銀臺)에는 명주(明州) 서도고(徐道姑)
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고는, 다시 죽었다. 
5년 후에 서도고가 죽었는데,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했으며, 12년 후에 손십이랑이 죽을 때는
 하늘 음악이 허공에서 쟁쟁하여, 
모두 구가 말한 것과 일치하였다
찬(贊) 

연화에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는 
말을 여기서 누차 보게 된다. 
환상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환(幻)과 같은 
마음으로 환과 같은 부처를 생각하고, 
환과 같은 꽃에 환과 같은 이름을 표기하였으며, 
내지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는 것이 어떤 것인들 
환이 아니랴만, 나는 우선 환생(幻生)이라는 생각을 
접어두노니, 어찌 굳이 그 사실 여부를 논하랴. 
조휘(祖輝) 
원(元) 조휘는 사명군(四明郡)의 성불각
(成佛閣)에 살면서, 사람을 만나면 다만 
‘나무아미타불! 말할래야 말할 수 없어!’ 
할 뿐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설부득
(說不得: 말할 수 없다) 화상이라고 불렀다. 
  운현위(鄞縣尉)인 왕용향(王用享) 부부가 
그를 공경하여 섬겼는데, 하루는 그의 집에 가서 
“내가 내일 가야겠어.” 하고 고별하였다. 
  다음날 대중을 모우고 감실에 들어가 
단정히 앉아, 참외를 달라하여 맛있게 다 먹고는
 염불하며 죽었다. 
초기(楚琦) 

대명(大明) 초기는 촉군(蜀郡) 
사람으로 독실히 서방을 믿었다
연경(燕京)에 들어가 
북소리를 듣고는 크게 깨달았다. 
홍무(洪武)초에 경도(京都)에 가서 세 번이나
임금에게 법을 설하여 임금을 매우 기쁘게 하였다. 
나중에 서재(西齋)라는 집을 짓고 한결같이
 정업을 닦다, 큰 연꽃이 온 세계에 가득한데, 
미타가 그 가운데 계시고 많은 보살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죽는 날, 게(偈)를 써서 대중에게 
보이고는 “나는 가야겠다.”고 하였다. 
누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서방(西方)!” 하였다. 또 “서방에만 부처가 있고 
동방에는 부처가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 
큰 소리로 한 번 할(喝)하고, 편안히 갔다. 
보주(寶珠) 

대명(大明) 보주는 일찍이 항군(杭郡) 
가화(嘉禾) 부근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한 벌 누더기 뿐이었고, 자는
 곳도 일정한 거처가 없이 걸식하며 살았다. 
평소 염불이 끊이지 않아, 누가 부르면 
겨우 대답만 하고는 염불을 연이으면서 
다시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해문사(海門寺)에서 갑자기
 반 달여나 미친병에 걸린 듯하며 지냈다. 
어떤 스님이 “스님의 평소 실행대로라면 
당연히 세인들의 안목이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럴 수 있습니까?” 하고 
나무라자, “그렇다면 나는 가야지!” 하고는,
 목욕을 하고는 편안히 죽었다. 
총론(總論) 

<무량수경>에는 세 가지 부류의 왕생을 논하였다. 
그 첫째는 집을 버리고 세속을 떠나 사문이 되어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전념하는 자라 하였다. 
  집을 버리고 세속을 떠났다는 것은 몸이 
출가하였다는 의미요, 한결같이 전념한다는 것은
 마음이 출가하였다는 뜻으로서, 몸과 마음이 모두
 청정하다면 어찌 정토에 왕생하지 못하겠는가. 
  세상에 어떤 미친 중은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은 재가의 이중(二衆)을 잘 접인하기 위해서다.
 나는 사문이다. 
내가 어찌 이런 짓을 달갑게 여기랴.’ 한다. 
  또 어떤 중은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은 
스님 중에서 둔한 근기를 접인하기 위해서다.
 나는 교리에 밝고 나는 종문(宗門)에 밝다. 
내가 어찌 이런 것을 달갑게 여기랴.’ 한다. 
  아! 이들이 어찌 원조(遠祖: 혜원 법사)
 이하의 모든 대화상들을 알 리가 있겠는가. 
어떤 이는 경법(經法)에 능통하여 명성이
 천하에 떨쳤고, 어떤 분은 조사의 법인(法印)을
 잡고 도가 고금에 충만하였다.
 저분들이 교리나 종문에 어두웠던 자였던가? 
또한 정토 밖에 따로 종문이나 교리도 없고,
 사문도 없음을 어찌 알 리가 있겠는가. 
나는 이 자리를 빌려 감히 미친 자들에게 말하노라. 

출처/연지대사 왕생집 
나무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