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 어둠속 등불

종소리

갓바위 2015. 8. 3. 20:40
종소리  
개울가에는 창포꽃이 피고 산자락에는 
때늦은 철쭉꽃이 불을 놓고 있었다. 
암자를 찾은 신도나 스님들의 
얼굴도 꽃빛깔처럼 환했다. 
초하룻날은 궁벽한 암자에도 제법 
사람들의 그림자가 잦았다. 
낯익은 할머니들이 산길을 오르면 산꿩들도 
반가운지 홰를 치고 다람쥐도 암자 마당까지
 나와서 합장을 했다.그러나 암자 객실에
 머물던 동자승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아침 공양이 끝난 뒤에 삼촌스님으로부터 마침내 
섭섭한 얘기를 듣고야 말았던 것이다.
큰절에서 비구니스님들만 사는
 암자를 찾아온 지 하루 만이었다. 
삼촌스님은 며칠 전부터 혼자서 중얼거리며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다. 
큰스님이 법문을 하고 간 뒷날부터였다. 
하긴 여름철을 날 것 같은 큰절을
 떠나 올 때부터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동자승이 질문을 해도 대답을 잘 안 했다. 
“삼촌스님, 큰스님한테 꾸중들었어요?”
“아니다.”
“그럼 왜 도리질하고 다녀요?”
“어딘가 체한 것처럼 마음이 통쾌하지 않구나. 
어딘가 찝찝하고 석연치 않아.”
동자승은 갑자기 그런 얼굴을 하고 
다니는 삼촌스님이 이상했다. 
삼촌스님은 성격이 활발하고 우스갯소리를
 잘하여 큰절 스님들을
곧잘 웃기던 재주꾼이었던 것이다. 
동자승은 내리막 산길을 종종걸음 치며 또 물었다.
“큰스님 법문을 알아듣지 못한 거죠?”
“알아듣기야 했지. 
하지만 그 말씀이 내 것이 아닌 듯 하단 말이야.”
삼촌스님은 또 도리질을 했다. 
동자승은 삼촌스님을 맥없이 올려다보았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그럼, 날 이해시켜 봐요.”
“자, 범바위에서 쉬었다 가자꾸나.”
범바위란 호랑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스님들이 붙인 이름이었다. 
삼촌스님은 호랑이 등을 타고 앉았고, 
동자승은 호랑이 꼬리에 겨우 엉덩이를 붙였다.
“동자야, 서울 얘기해 줄까?”
“얘기해 주세요. 서울이 어떻게 생겼어요?”
“남대문도 있고, 동대문도 있지.”
“그게 서울이에요?”
“차도 많고 사람도 많지.”
“그게 서울이에요?”
“아무리 얘기를 해줘도 시시할 거다.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그제야 동자승은 삼촌스님이 얘기하는 서울은
 삼촌스님의 서울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자승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꼭 서울에 가고 말겠어요.”
“그렇단다. 내 눈으로 직접 봐야만 
서울을 봤다고 할 수 있지, 
내가 아무리 얘기해 줘도 그건 새우깡 
맛이지 새우 맛은 아니란다.”
“더 커서 꼭 동대문도 보고 남대문도 보겠어요.”
“마찬가지다. 큰스님 법문을 들었지만
 나는 답답할 뿐이구나. 그건 큰스님이 깨달은 
진리이지 내가 깨달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야.”
동자승이 눈을 크게 뜨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자 삼촌스님이 꿀밤을 먹이며 일어섰다.
“이녀석, 이제까지 얘기해 주었는데도 못 알아듣네.
 나도 너처럼 서울 구경을 직접 하고 싶다는데도.”
동자승은 꿀밤을 먹은 바람에 지금까지 들은 ‘서울 
구경’ 얘기를 민들레홀씨처럼 바람에 다 날려보냈다. 
비구니스님이 사는 암자에 다다른 후에도 
더 묻지 않았다. 삼촌스님도 말을 아꼈다.
암자에 도착한 뒤부터 삼촌스님은 
큰스님처럼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비구니스님들 모두가 삼촌스님보다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지만 동자승 눈에는 삼촌스님이 
어깨에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삼촌스님은 암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는 독립만세를 부를 
듯한 비장한 얼굴을 했다. 
비구니스님들 앞에서 
유관순 누나가 선서하듯 약속했다.
“난 암자 위에 있는 토굴로 가겠소. 
혼자 있는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종을 칠 것이오. 
그러면 올라오시오.”
삼촌스님은 동자승과 헤어져 누에고치처럼 
토굴에 문을 닫아건 채 참선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화두는 조주 무(無) 자를 들겠소. 
토굴에 있는 것들을 다 먹은 뒤에도
 진리가 무언지 깨닫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절대로 걸어나오지 않겠소.”
동자승은 기가 막혔다.
“저는요?”
“너는 여기 남거라. 
너도 종소리가 나거든 올라오너라.”
“알겠느냐.”
비구니스님들이 대신 대답을 했다. “네, 스님.”
삼촌스님은 바로 토굴로 올라가버렸다. 
토굴에 먹을 것이라곤 뒤주에 든 쌀과 
옹기단지에 든 묵은 김치 뿐이었다. 
삼촌스님은 먹는 시늉만 했다. 
한번에 쌀을 닷 되씩 앉혀 밥을 많이 해서 
양재기에 퍼놓고 보자기를 덮었다. 
그런 뒤 바람이 드는 윗목에 놓아두고 
시장하면 김치를 한쪽씩 곁들여 먹었다. 
목이 칼칼하면 돌샘으로 나가 찬물을
 한 모금 축이는 게 전부였다. 
삼촌스님이 그런 수행을 한 지 한 달이 지나갔다. 
비구니스님들은 걱정은 하면서도 
토굴에 는 올라가지 못했다. 
삼촌스님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어느새 삼촌스님의 얼굴은 수염이 자라고
 세수도 하지 않고 이도 닦지 않아 산적처럼 변했다. 
두 눈만 반딧불처럼 빛을 낼뿐이었다.
몰래 토굴로 올라간 동자승은 그런 모습의 
삼촌스님이 배가 고파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허물어진 담으로 들어가
 종을 치고는 뒷산으로 숨었다.
잠시 후 비구니스님들이
 허둥대며 토굴로 달려왔다. 
한 비구니스님은 삼촌스님이 가장 좋아하는 
순두부를 차관에 가득 담아 이고 올라왔다. 
곧 쓰러질 것처럼 마른 삼촌스님이 버럭 화를 냈다.
“종을 치지 않았는데 어째서 올라왔소.”
“종소리가 나서 올라왔습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 비구니스님이 종소리를 
들었다고 하니 삼촌 스님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삼촌스님은 마루에 순두부를 
놓은 지 며칠을 그대로 보냈다. 
순두부에는 곰팡이가 새카맣게 끼었다. 
무자 화두에 집중하느라고 좋아하는 순두부가
 마루에 있는 것조차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날 이후부터 비구니스님들은 토굴에 올라가는 
일 없이 정진하는 삼촌스님을 위해 기도했다. 
비구니스님들은 삼촌스님의 수행에 감동한 
부처님이 종을 쳤을지도 모른다고 믿기도 했다. 
동자승은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을 졸였다. 자신은 부처님이 아니라 
삼촌스님이 굶어 죽을지도 몰라 
종을 몰래 친 까까중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 불교설화(佛敎說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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