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원주 땅 어떤 농가에서의 일이었다.
주인 여자가 이제 막 대청에 있는 뒤주에서 저녁거리를 챙겨들고 내려서려는데
문간에서 똑딱 똑딱 목탁을 두드리며 늙은 중이 염불을 외우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간 쌀바가지를 물끄러미 들여다 보다가
그길로 나와 노승의 바릿대에 폭삭 쏟아부어 주는 것이었다.
"관세음보살"
고맙다고 고개를 굽혔다 든 노승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곱게 쓸은쌀을.......그것도 주인 대주와 같이 자실 저녁쌀이었던 모양인데."
다시 한 번 합장하여 사례를 하고 쳐다보니,
주인 여인은 외면하고 돌아서는데 노승은 뭉쿨하니 가슴에 느끼는 것이 있었다.
나이는 스물 서넛 아름다운 옆모습, 별반 다듬은 데도 없건만 그런대로 모습에서 광이 난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검은 안개처럼 수심의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말씀 여쭙기 황송합니다만, 아주머니께서는
남모르는 수심에 싸여 계신 것 같습니다. 무슨 걱정이라도 계시오니까?"
"......"
"말씀 아니하셔도 소승은 소승대로 다소 짐작되는 바가 있어서 말씀드리는 것이올시다.
아주머니께서는 결혼하신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아직 아기가 없으셔서 그 일로 걱정이 되시는 것은 아닌 성싶습니다.
부부 정리情理도 그만하면 남 보기에는 의도 좋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렇건만 부군에서 약주만 잡수시면 손찌검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시지요?"
"......"
"그렇지만 아주머니께서는 정성스럽게 이렇게 곱게 쓸은 쌀로 시주를 해주시기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길로 집 안팎을 말끔히 치우시고 손에 들고 때릴만한 것은 말끔히 치워 버리십시오.
그리고 단 한가지 목화 따서 말리는 다발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묶어서 마루 귀퉁이에 세워두시면 다 되는 도리가 있을 것입니다.
부디 잊지마시고 그리 하십시오. 그리하여 부군의 그 매질하는 버릇이 없어지시거든
이것은 소승의 공덕이 아니오라 부처님의 높으신 은덕이오니 그 상세한 말씀은 내년 이날
이 시간에 다시 와 말씀드리겠사오니 오늘 모양 깨끗이 쓸은 쌀로 시주나 하여 주십시오.
그럼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나무 관세음보살."
노승이 돌아간 뒤 부인은 다시 쌀을 떠다 저녁을 지어, 밥을 먹을 생각도 않고
식기를 덮어 윗목에 두고 동그마니 앉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노승 말대로 때릴만한 것이라곤 신발짝 부지깽이 하나까지라도
깨끗이 치워놓고 목화 다발만 묶어서 세워 두었는데 어찌 되려는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바깥이 떠들썩했다.

"에튀 이년 어디 갔어? 이런 죽일 년! 옳지 이 년 이 남편이 돌아와도
일어나 나오지도 않아? 이런 죽일 년!옳지 이 년 너 잘 만났다. 이년 이제 나와?"
어쩌고 하며 때릴 것을 찾는데 손에 집어지는 것이 없다.
사방을 찾아다니다가 간신히 목화 다발 묶어세운 것을 집어 들고 쫒아와서 후려친다.
푹석하나 아플 것도 없다.
"옳지, 그러면 무슨 도리가 있다더라, 실껏 때리려무나."
두 손을 모아 머리를 싸고 엎드려서 반항을 않으니 때리기도 싱겁든지
푹석푹석 한참을 때리다가 제 풀에 숨이 차서 집어 내 동댕이치고 나가 나동구라진다.
그러더니 이내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고는 것이다.
처음 겪은 일이 아니라 허리띠 대님 끄르고 버선 벗기고 베게 베어 주고
이불 끌어당겨 덮어주고 나서 자신은 치마 고리도 끄르지 않은채 옆에 누워 그렁그렁 밤을 났다.
남편이 부스스 일어나더니 물을 찾는다.
집어주는 대로 자리끼를 한 그릇 들이키고 나더니 겸연쩍은 듯이 말을 한다.
"내가 엊 저녁에도 몹시 취했었지?
어디 몹시 때리지나 않았소? 안그래야지 하면서도 자꾸 그래서 탈이야."
신기한 일도 다 있지. 그런일이 있은 뒤로 술에 취해 돌아와도
다시는 매를 드는 일이 없어지고 저녁 안 먹었느냐
좀 늦은 것 같기든 먼저 먹지 그랬느냐고 상냥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렇기로 제 버릇 개주랴? 며칠 가나 했더니
한 달, 두 달, 반 년, 어언 일 년이 되도록 다시는 그런 기색이 없다.
옳지 작년 그때가 돌아온다.
쌀을 깨끗이 쓸어서 따로 담아 놓고 그 신기한 노승이 다시 찾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또르락 또르락"
아니나 다를까 정말 저녁이 되니까 날짜도 어기지 않고 노승이 찾아왔다.
여자는 반색을 하며 쌀그릇을 들고 한 걸음 한 걸음에 달려 나갔다.
"감사합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아이고 아주머니 얼굴에 이제야 환하게 화색이 도시는구먼요,
어떠십니까? 그 뒤론 다시는 손찌검을 하지 않으시지요?"
"네 참 그런데 그게 무슨 방문입니까? 그렇게 여러 해 해오던 버릇이 하루 하침에 딱 그치니......"

"네, 모두 부처님 덕택이올시다, 작년 오늘입지요.
아주머니께서 그렇게 정성어린 시주를 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얼굴을 뵈니 수심이 가득하셔서, 소승이 몰골은 이러해도 조금 내다보는 바가 있습죠.
그래 가르쳐 드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이렇게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정성껏 부처님을 위해 받드는 마음이라면 전생의 허물쯤 하루빨리 벗겨 드리는 것이
당연하지 아무렴 그것이 부처님의 뜻이니, 실은 아주머니께서는 소 모는 사람이셨습니다.
남편께서는 아주머님께 직접 얻어맞으며 일한 소였습니다.
그래서 이생에서 서로 만나실때 전생에서 맞은 만큼 보복을 하라고 맞붙인 것입니다.
꼭 십만 대를 때리라고.""에구머니나! 십만대나요."
"예, 그러니 홍두깨로 맞거나 방방이로 맞거나 십만 대를 채워야 끝나게 마련이지요.
그러니 몸은 약하신데 무시로 그렇게 매를 맞으시면 배기겠어요?
그런데 맞은 회초리 개수가 모두 얼마나 됩니까?
천 개라고 친다면 백 번만 맞은 그 회초리 개수가 모두 얼마나 됩니까?
천 개라고 친다면 백 번만 맞으면 십만 번 아니겠습니까?
그때까지 맞으신 숫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날 약주 잡숫고 때리신 걸로 깨끗이 끝난 것입니다.
그때 만약 시주를 하시는 게 정성이 없으셨다든가 그냥 돌려보내셨다면
오늘까지도 아니 십만 대가 끝날 때까지 방망이로든 부지깽이로든
그 숫자는 채우셔야 되셨을 것입니다.
이 다음에라도 부처님 잘 위하십시오. 나무 관세음보살."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마주 합장을 하며 노승을 전송하였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한없이 바라보고 섰던 그녀의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부처님께서도 정업定業은 면치 못한다고 했다.
이는 이미 정해진 업에 대해서는 죄복을 주는 권능이 상대방에게 있기 때문에
한번 결정된 업은 면할 도리가 없이 받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이미 정해진 업은 몇 년 아니 평생 맞을 매를 한꺼번에 맞아 과보를 면한 것이다.
불보살들은 여러 생에 받을 과보라도 단생에 줄여서 받는다고 한다.
3생을 거쳐 받아야 할 업보를 3년 만에 모두 받고
고려 문종 넷째 왕자로 태어난 대각국사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인연 산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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