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행자야, 어서 이리 나와 봐라. 여기 곳곳에 네 머리통이 있다.
늘 임행자를 상대로 장난을 치는 원주스님의 장난기 섞인 소리에 그이는
'이번엔 당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느릿느릿 걸어나갔다.
원주스님은 절 아래쪽 밭에서 그이를 보고 웃고 계셨다.
거기는 바로 봄에 그이가 빠졌던 호박똥구덩이가 있던 자리였다.
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그의 빡빡 깍은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아침녘에 삭발한 그의 머리는 반들반들 햇빛 속에서 윤이 나고있었다.
"와!'' 밭으로 내려간 그이는 저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여기저기 조그맣게, 동그랗고 길다란 호박들이 매달려 있었다.
"저기 저, 네가 빠졌던 넝쿨호박 똥구덩이에서 나온
저 호박이 조금만 더 크면 바로 네놈 머리통이랑 똑같겠다."
아니게 아니라 동글동글하니 임행자의 머리를 꼭 닮았다.
아직 채 꽃대공이 떨어지지 않은 것조차도 그의 어린 티를 그대로 꼭 닮은 것 같았다.
밭고랑에는 봄에 큰스님께서 마디호박의 싹을 끊어주어
이제는 제법 많은 호박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동글동글한 것은 넝쿨호박이고, 길죽한 것은 개량된 마디호박이다.
봄에 올라오는 마디호박의 싹을 끊어주면 옆으로 퍼져서, 열 개 열릴 것이
스무 개가 열리게 된다. 바로 큰스님께서 개발해내신 방법이다.
시골서 농사를 지어보지 않았던 임행자로서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가을에 매달린 누런 호박을 따와서 호박죽을 끓여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 눈앞에
호박죽이 왔다갔다하였다. 게다가 이제 어디 보통 호박인가!
바로 그 봄날, 그의 심금을 울려주었던 호박이 아니던가. 똥구덩이를 딛고
난 뒤 한 달 가량, 대중스님들은 임행자만 나타나면 "이게 웬 냄새지?'
하면서 코를 싸쥐고 그이를 놀려댔다.
한동안 그이를 비운에 빠지게 했던 주인공이 아니었던가!
또 그 봄날 큰스님이 하시는 일을 그이도 한몫 거들려고 하다가 큰스님께 혼난 적이 있었다.
호박 곁으로 가서 한 마디 끝을 큰스님처럼 댕강 잘라주었다.
그러자 마치 호박이 '이놈' 하고 소리치듯 '쩌렁' 하는 큰스님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아. 아무렇게나 마디를 자르면 어떡하냐.
호박꽃 마디의 밑에것을 따야만 하는게다.
저놈이 괜한 호박 하나 버린 셈이구나."
그때 대중스님들은 또 얼마나 키득거렸던가!
호박에 얽힌 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임행자는 자신이 빠졌던 똥구덩이 앞에 섰다.
윤이 반질반질한 게 자신을 꼭 닮은 호박을 손으로 만지다가
그이는 그 호박을 오늘 저녁거리로 갖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꽃대공이가 아직도 매달려 있는 가녀린 호박을 몇 번 쓰다듬다가 결심한 듯 '툭' 땄다.
동시에 머리에 큰 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았다.
곧 이어 머리통이 콩 볶는 것같이 타닥거렸다.
순간 어안이 벙벙했지만, 큰스님으 꿀밤세례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한참을 맞고 난 뒤었다.
'아! 이번엔 또 무엇이 잘못이지?
큰스님의 호통은 바로 이어져 나왔다.
"이놈아, 아직도 색(色)에 눈이 어두워서 호박꽃도 꽃이라고 예쁜것을 밝혀?
아무리 호박꽃도 꽃이라지만, 호박 달린 꽃을 꽃병에 꽂아놓으려고 그것을 땄냐?
저놈이 제방에 몰래 갖다 놓으려고 딴 것이 틀림없어. 떼끼, 이놈아."
참고 참았던 대중스님들의 웃음소리가 매미소리만큼 요란스러워졌다.
분명 혼날 것을 미리 알고도 지레 어떻게 되나 가만히 보고 있었던게 틀림없었다.
'흥, 좋아. 오늘은 울지 않으리/'
눈물을 안 흘리려고 애쓰는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거렸다.
"임행자야, 무릇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호박을 미리 따면 그것을 어디에 써먹겠느냐?
꽃 달린 호박은 아직 채 안 여문 것이니라. 꽃이 떨어지고 여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직 채 안 여문 것이니라. 꽃이 떨어지고 여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직 채 여물지 못한 네 심성과 똑같은 것이야. 알겠느냐?"
큰스님은 호박통 같은 그의 반들반들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웬일인지 따뜻하게 말씀하셨다.
그 손길이 어찌나 다정한지 임행자의 참았던 울음은 더운 여름 한낮,
뜨거운 햇살을 쩌렁쩌렁 깨뜨리며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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