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스님 좋은 말씀

괴로워도, 슬퍼도

갓바위 2022. 5. 30. 09:39

 

이른 아침 툇마루 끝에 나와 선 맨발의 감촉이 자꾸만 달라져간다.

싸늘하게 전해져 오르는 선선함이 임행자의 빡빡 깍은 머리 끝까지 타고 오는 듯싶다.

저 높이로 둥실 떠오르는 파란 하늘하며, 산 속 나무들의 색깔이 비현실적으로 선명하게 보인다.

 

'그래, 바로 작년 이맘때쯤일 거야!

유난히 높고 파란 하늘 아래 총총하게 들어찬 나무들 사이로 웃음을 흩날리며

함께 뛰어다니던 그 친구들. 야생밤나무 밑에서 그 까칠한 밤송이들이 머리 위로 떨어져도,

 

아픈 줄도 모르고 흔들어 따먹던 밤의 아릿한 맛. 집에서는 한창 추석 음식준비로

분주하고 어머님이 사오신 때때옷이 장롱 속에 들어 있고,

아!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던 그 시절. 뒷집 은철이는 머리에 이가 너무 들끓어

머리를 빡빡 깍아버려 모두들 까까중이라고 많이도 놀려댔지.'

 

입가에 번져오는 미소를 거두고 그이는 빡빡 깍은 자신의 머리를 '쓰윽' 쓸어보았다.

산 속 절에도 추석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여느 때보다는 후원의 손길이 조금은

분주해진 듯 보이지만, 속가에서처럼 풍요롭고 들뜬 기분은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분위기가 그이의 마음을 아련하게 한다.

먹물옷 하나 이외에는 별다른 추석빔도 필요가 없는 절 집안에서의 명절은

왜 이리도 쓸쓸한지, 임행자의 마음은 자꾸만 절 밖으로, 절 밖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추석을 맞아 절 아래 마을에는 5일 장이 섰다.

산문을 나설 때만 해도 장에 가려는 마음 따윈 토옹 없었는데,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전(紙錢)이 만져지면서 그이는 들뜬 마음으로 장으로 향했다.

 

일주일 전쯤인가, 우편물 하나가 임행자 앞으로 날아왔었다.

그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혹시 어머니의 편지는 아닐까?

그러나 그런 기대는 곧 깨지고 말았다.

 

겉봉투에는 형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고,

속에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천 원짜리 한 장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생전 구경도 못해 본 큰돈이 들어 있었지만 그이는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그에겐 따뜻한 말 한마디가 훨씬 필요했던 것이다.

돈으로 인해 더욱 쓸쓸해진 마음을 안고 돈을 주머니 속에 무심히 집어넣었다.

바로 그 돈이 이 순간 그에게 이렇게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장은 초입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오랜만에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 들어온 임행자는 모처럼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천 원의 위력은 엄청났다.

 

지난 겨울, 산 속의 그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손발은 차치하고서라도

머리가 시려서 견딜 수 없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모자 하나를 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왜 그리 소변은 자주 마렵던지,

아무곳에서나 실례를 하고 싶어도 큰스님이 아시는 날은 경치는 날이었다.

 

무서움을 참고 정랑가지 가야만 했던 그 고통, 그래서 귀하디귀한 플래시를 하나 샀다.

그리고 장갑, 셔츠, 신발, 털스웨터, 가방 등을 사고 난전에서 팥죽 한 그릇으로

쓸쓸한 마음을 달랬다. 또 칠 원씩이나 하는 라면 세 개를 사서 가방 속에 소중히 넣었다.

 

짐은 금세 한보따리로 늘어났다.

반면 천 원따리 지폐가 백 원짜리 지전이 되더니, 이에는 달랑 동전 몇 개만 남게 되었다.

그 동전으로는 그 동안 너무나 먹고 싶었던 크라운 산도를 샀다.

 

천 원의 의미를 알 리 없는 임행자는 한나절 만에

뚝딱 천 원을 다쓰고는 한보따리의 짐을 메고 산을 올라갔다.

오늘은 그 길이 힘들 줄도 모르고 올랐다. 크라운 산도 덕분이었다.

 

양손으로 산도를 잡고 가운데를 가르면, 그 안에서 유혹적인 하얀 크림이 드러났다.

아껴서 아껴서 조금씩 혀로 핥아먹지만 크림은 금세 바닥이 나버린다.

그렇게 먹으면서 올라간 산도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산문 앞에 당도하였다.

 

산문 앞에는 큰스님이 서 계셨다. 큰스님은 저 멀리서부터

임행자의 손에 들린 커다란 꾸러미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계셨다.

아무 생각 없이 올라오던 그이는 뚫어지게 보다리를 쳐다보는

큰스님의 눈을 의식하고부터는 무언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해서 입술 가장자리에 묻은 산도크림을 핥아먹을 염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이가 큰스님께 인사를 하고 스님 곁을 지나쳐 저만치 갈 때까지

스님은 한마디 말씀도 없이 계속 보따리만 쳐다보고 계셨다.

 

그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가던 발걸음을 되돌려 큰스님 앞으로 걸어오면서 떠듬떠듬 말을 꺼냈다.

"스님, 저, 이건 형이 돈을 보내줘서...필요한 게 있어서...장에 가서...천 원을 갖구요...다 썼어요."

 

그의 목소리는 갈수록 기어 들어갔다.

아무 말씀도 없이 큰스님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이는 쭈뼛쭈뼛 스님을 따라 방에 들어가 사온 물건들을 펼쳐놓았다.

 

신이 나서 샀던 물건들이 큰스님 앞에 펼쳐놓고 보니, 왜 그리 초라해 보이는지

아무 쓰잘데기없는 물건들을 몽땅 주워온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큰스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야속하여 괜시리 그이의 콧잔등이 시큰해져 왔다.

삐죽삐죽 새어나오는 울음이 그의 서글픔을 더해주었다.

그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온 물건을 끌어안고 큰스님의 방을 나왔다.

 

뒤에 큰스님의 혼잣말이 들여왔다.

"저놈이 크게 되려고 저러나, 아님 망나니가 되려고 저러나.

그 큰 돈을 어린놈이 한나절 만에 다쓰고 들어오다니, 쯧쯧쯧......"

 

큰스님의 말씀은 회초리처럼 임행자의 마음을 후려쳤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방으로 들어온 그이는 저녁 먹는 것도 잊은채,

꾸러미를 끌어안고 서러운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한가위 둥근 달이 휘영청 산 속 절을 비추며 떠올랐다.

달빛 한 줄기가 그이의 방 틈에 스며들었다.

그때 소리 없는 그림자가 임행자의 방으로 다가왔다. 바로 큰스님이셨다.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신 큰스님은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누워 울다 잠든

그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는 이불을 덮어주셨다.

그리고 달빛을 휘저으며 조심조심 나오셨다.

 

큰스님의 따뜻한 손길을 임행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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