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스님 좋은 말씀

돌고 도는 세상에서

갓바위 2022. 5. 31. 09:44

깊은 겨울을 예견하듯 언제부터인가 나뭇잎들이 산 속 절에 깊게 내리고 있다.

휑휑한 나뭇가지 틈새로 아직도 채 생명을 저버리지 못한 나뭇잎이 하나 둘 겨우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쏴아아' 하는 산의 신음소리가 풍경소리보다 더욱 깊게 절 주위를 휘돌아가곤 한다.

 

쓸어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망연히 낙엽 위에 서서 임행자는 "아아아--!" 하고 소리를 내어보았다.

그 소리에 놀란 듯, 여기저기에서 몇 남지 않은 나뭇잎이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나뭇잎이 땅에 닿는 순간까지 그이는 집요하게 지켜보았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다 떨어져버린 잎들이 겨울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봄이 되면 다시 생겨나서

겨울엔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또 생기고...... 참말 알 수 없는 일이야.

 

세상의 모든 이치도 다 이와 같은 것이라고 큰스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그리고 세상만사는 다 윤회한다고 하셨는데....... 윤회라? 그게 과연 뭘까?'

비처럼 내리는 낙엽 속에서 큰스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그의 뇌리에서 맴맴 돈다.

 

저 멀리서 운력에 동참하라고 그이를 부르는 소리만 없었더라면,

이렇게 한나절은 족히 서 있어도 좋을 시간들이 바람과 함게 저 멀리로 사라져버린다.

 

밭에는 이미 자랄 대로 다 자란 굵직굵직한 무, 쭉쭉 뻗은 단무지무, 통통하게 알찬 배추,

푸릇푸릇한 청갓, 불긋불긋한 홍갓 등이 뽑힐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씨를 뿌리고 인분으로 퍼다가 거름을 주고 옆으로 퍼드러진 배추를 속이

꽉 차도록 끈으로 묶어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배추를 거둬들일 날을 맞은 것이다.

그 동안의 수고를 생각하니 어쩐지 배추를 뽑아 김장거리로 없애버린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의 눈에는 배추가 예쁜 꽃 이상으로 아름답고 귀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스님들은 이런 임행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배추를 쑥쑥 잘도 뽑아 휙 하니 집어던진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이를 보고 원주스님이 한마디 하셨다.

 

"이놈아, 일은 안하고 뭘 멍하니 서서 보기만 하냐? 구경하러 여기 왔냐?

그는 원주스님이 큰스님의 흉내를 내며 자신을 '이놈, 저놈' 할 때는 정말 스님이 밉기만 하였다.

"치이, 스님. 스님은 저 배추가 아깝지도 않으세요? 난 어쩐지 뽑기가 아깝고 가여워서......"

 

"하하, 이놈 보게. 여름엔 꽃 달린 호박을 댕강 따서 방에 갖다 꽃으려고 하더니,

이번엔 이 배추가 가엽다고? 이놈이, 이렇게 뽑혀서 우리네 뱃속으로 들어가는 게

바로 배추의 인생살이여, 알겠냐? 그놈, 참" 원주스님을 향해 하얗게 눈을 흘기는

그이를 큰스님께서는 저 멀리서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계셨다.

오백 포기나 되는 배추가 두 토막으로 나뉘어지고 소금에 절여

씻어진 후 채반마다 그득그득 담겨져 물기가 빠지고 있었다.

미리 땅을 파서 묻어놓은 항아리는 김치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양,

입을 크게 벌리고 있고, 무채를 써는 스님의 손길이 분주하기만 하다.

 

춥지도 않았지만 매운 바람이 그의 손등을 빨갛게 얼려놓기에는 충분했다.

호호 손을 불어가며 여기저기서 불러대는 자신의 이름에 임행자는 달려가기 바빴다.

속 넣을 준비가 다 되자 비로소 한숨을 돌릴 시간이다.

 

얼음같이 차가워진 손을 자신의 겨드랑이 사이에 묻고 나니,

문득 지난날 속가에서의 김장날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바쁜 일손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한 짐 해오던 일, 입이 매어져라 배추쌈을

그의 입에 가득 넣어 주시던 어머니의 그 손길, 그 맛, 그 눈길......

 

속절없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왔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그이는 한 쌈 가득 배추쌈을 집어넣었다.

무슨 맛인지 느낄 새도 없이 또 한쌈을 가득 싸서 입에 넣고 올라오는 울음을 막았다.

 

또 한 쌈, 또 한 쌈.....옆에서 원주스님이 '먹는 것을 탐' 하는 임행자를 윽박질렀지만

그 말엔 아랑곳없이 그이는 자꾸 쌈을 싸서 입에 넣고 올라오는 울음과 싸우고 있었다.

아무 말씀도 없이 김칫속만 넣고 계시는 큰스님의 눈치를 살피면서.

달빛 한 점도 없이 밤은 깊어가고 김칫속을 너무 먹은 탓에 쓰린 배는

가라앉을 줄 모르고 자꾸만 아파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간절하게 생각나던

어머니의 모습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이 칠흑 같은 밤을 뚫고

정랑까지 갔다와야만 하는 걱정만이 온통 마음을 덮었다.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픈 배를 문지르며 고무신을 겨우 찾아 신고

뒤뚱거리며 어둠 속에 더욱 어둡게 웅크리고 있는 정랑의 문을 들쳤다.

엉덩이를 내놓고 앉아 있었지만, 아픈 배일랑은 아랑곳없이 볼일은 나오지 않았다.

 

무서운 탓일까? 그때 정랑 밖에서 낯익은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큰스님이셨다.

큰스님이 밖에 계신다는 사실을 느낀 순간, 무서움은 사라지고 뱃속이 뚫린 듯 시원해져 왔다.

'큰스님이 안 주무시고 웬일로 밖에 나오셨을까?

 

어쨌거나 큰스님이 나와주셔서 다행이야. 가만,

내가 이렇게 싼 똥을 퍼다 붓고 배추를 키워서 먹고 내가 이렇게 또 똥을 싼다?

이 똥은 또 내년에 밭에 거름으로 뿌려질 것이고,

그 거름으로 밭의 것들은 잘 자랄 거고, 또 나는 그걸 먹고.......

 

하하하! 맞아, 세상은 다 이렇게 돌고 도는'. 거구나

뭔가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그의 눈앞이 환해져 왔다.

자신도 모르게 염불 한 자락이 흘러나온다.

 

"아금지송대준제 즉발보리광대원 원아정혜속원명

원아공덕개성취 원아승복변장엄 원공중생성불도...."

 

어둠을 헤치며 투명하게 흘러나오는 임행자의 맑은 염불소리에 바람도,

낙엽도, 풍경도 귀를 기울이는 듯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요만이 산허리를 휘감는다.

단지 어둠 속에서 끄덕이는 큰스님의 고갯짓만이 보일 듯, 말 듯 어둠을 흔들고 있다.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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