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겨울, 깊은 밤, 어둠을 뚫고 불어오는 바람이 간혹 문풍지를 두드릴 때, 그 아득함은
얼마나 가슴저린가. 그 아득함에 너도 나도 화로 옆에 모여 앉아 긴 밤이 지새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로 꽃을 피울 때, 정작 겨울의 의미는 이때 한껏 되살아나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손뼉을 치며 껄껄 웃는 소리에 촛불이 놀란 듯 방안에 출렁인다.
뛰어난 재담으로 큰스님들의 일화에서부터 옛날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난 원주스님은 목이 탄지 임행자에게 장독대에 가서 동치미를 떠오라고 하였다.
그이도 발그레한 볼이 더욱 붉어질 만큼 한바탕 웃고
난 뒤라 웃음기를 채 지워버리지도 못하고 문을 열고 나왔다.
어느새 내린 눈이 발목까지 쌓이고 있었다.
아무도 지나지 않은 눈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그이는 장독대로 향했다.
내린 눈이 어둔 밤을 환하게 밝힌 덕분에 그이는 무서운 줄도 몰랐다.
장독의 뚜껑을 열고 단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차가운 기운이 손끝에 전해져왔다.
미끈한 무 하나와 배추 한 포기를 꺼내고 국자로 국물을 퍼담았다.
문득 그이는 자신도 원주스님처럼 대중스님들을 재미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워낙 부끄러움을 잘 타는 지라 입만 벌렸다 하면 얼굴부터 빨개지기 때문에
그이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국물이 샐까 눈길 위를 조심조심 걸어가면서
그이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골똘히 생각하였다.
동치미 국물을 들고 방안에 들어선 그이는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대중스님들이 싱글벙글한 웃음으로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쭈뼛쭈뼛 그릇을 바닥에 놓고 그이는 자신을 둘러보았다.
도무지 스님들이 자기를 보고 웃는 이유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금세 홍당무가 되었다.
"왜들 그러세요?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님......,"
왁자지껄하게 스님들이 웃어젖혔다.
원주스님이 눈을 반짝이며 그이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임행자야, 재미있는 일이 생각나서 그래. 그리고 그 역활은 꼭 네가 제격이라서. 어때, 할래?"
"무슨 일인데요?" "다름이 아니고, 요 아래 비구니 암자 있잖니?
거기에 가서 그 비구니 스님들 고무신에다가 물을 가득 부어놓고 오는 일이야.
그러면 그 물이 밤새 꽁꽁 얼 것 아니니? 이른 아침에 새벽예불 드리러 나와서
신을 신으려고 할 때, 그 도도한 비구니들의 얼굴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오는데?'
"그렇지만 큰스님이 아시면 혼날 텐데......,"
스님들은 모두 입을 모아 큰스님이 아실 리 없다는 것과 임행자 너라면
다녀올 수 있는 용기가 충분할 거라는 말로 부추겼다.
스님들의 부추김과 자신도 스님네들을 재미있게 해주고 싶다는
열망이 그이로 하여금 그 일을 승낙하게끔 만들었다.
소복소복 쌓인 눈은 생각만큼은 미끄럽지 않았다.
길 옆 숲에서 무언가 푸드득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그이는 웬일인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눈빛 덕분에 밤은 그렇게 어둡지 않았고 대중스님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무서움조차도 달아나게 하였다.
눈빛을 받아서 그런지 비구니 스님들이 사는 암자는
뿌연 안개 속에 그림자처럼 아련한 모습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정말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웃음 띤 원주스님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이는 이 일을 어떻게 해서든지 곡 성사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난기 많은 스님한테 한 번 흠을 잡히면 적어도 한 달은 놀림감이 되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비구니 스님들의 암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이는 발걸음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댓돌 쪽으로 다가갔다.
댓돌 위에는 눈만큼이나 뽀얀 고무신이 놓여 있었다.
준비해간 주전자의 물을 주르륵 고무신 안에 들이부었다.
그리고 그 옆의 고무신에도, 그 옆의 신에도, 처음에는 약간 떨렸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능숙해졌다.
떨리기는 커녕, 신바람마저 났다. 이 댓돌, 저 댓돌에 있는 고무신마다 모두 물을 하나 가득 들이부었다.
맨 마지막 고무신에 물을 부으려다가 그이는 멈칫하고 말았다.
그 고무신의 크기는 다른 것보다 유별나게 작았다.
자기와 같은 처지의 여자아이가 이 절에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 신발엔 차마 물을 붓지 못한 채 임행자는 올 때처럼 살금살금 비구니 절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냅다 달려서 한달음에 스님들이 모여 있는 곳에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어왔다.
전쟁터에서 커다란 승리를 하고 온 용사처럼 스님들은 임행자를 맞아주었다.
그이는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는 식의 거짓말도 조금 보태서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야, 참 장하다. 우리 임행자. 이제는 다 컸네. 너, 장가 가도 되겠다."
장가라는 소리에 그이는 얼굴이 빨개졌다.
"치이, 스님은. 누가 장가를 간대요? 나도 곧 이제 어엿한 스님이 될 텐데."
"그럼, 그럼. 우리 임행자는 아주 훌륭한 스님이 될 거야."
스님네들은 그에게 한마디씩을 던지고는 다음날 예불을 위해 하나씩 방으로 돌아갔다.
그이도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자신이 하고온 일이 과연 잘한 짓일까 하는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그리고댓돌 위의 조그만 고무신이 자꾸만 마음에 밟혔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있엇다.
스님들의 권유와 부추김으로 다음날 밤도 그이는 몰래 비구니 스님들의 암자로 기어들어갔다.
절에서부터 오줌을 참고 오는 바람에 아랫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댓돌 앞으로 살금살금 걸어간 그이는 바지의 끈을 풀었다.
시원한 오줌 줄기가 어둠을 가르고 터져나왔다. 아랫배가 시원해졋다.
한 고무신에 오줌이 차면 또 그 옆으로 옮겨서 고무신 안에 가득가득 오줌을 쌌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오줌이 그치지를 않는 것이엇다. 그이는 오줌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계속해서 오줌이 흘러나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러다가 들키는 거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안하게 스며들었다.
어디선가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그이는 눈을 번쩍 떴다.
그것은 꿈이었다. 해는 벌써 중천에 올라와 있는 듯. 방안이 훤해졌다.
새벽예불도 참석하지 못하고 늦잠을 자버린 것이엇다.
갑자기 그는 불안한 마음에 이불 밑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 이 일을 어쩌지!'
여름 홑바지를 입고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임행자 주위에서 스님들이 키득거리고 있었다
후원에서 원주스님이 큰스님의 명령에 따라 키를 찾아들고 싱글거리며 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이는 대중스님들이 원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어젯밤에 그런 일이 있은 후인데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면 어때서 한결같이 자기를 놀리는 사람들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놈아, 다 큰 놈이 무슨 넋을 놓고 있길래., 오줌을 싸느냐?
저놈이 야문 줄 알았더니 영 형편없는 놈이구나. 자. 이 키를 쓰고 저 아래
비구니 암자에 가서 소금을 얻어 오너라. 듬뿍 얻어와야 한다."
'뭐? 아래쪽 비구니 암자? 말도 안돼.'
그이는 눈앞이 아득해져 왔다. 곧 이어 떠오른 그 자그마한 신발의 임자가
키를 쓰고 간 자신을 볼 거라는 생각을 하니 더더욱 끔찍하였다.
"큰스님, 제발 그것만은. 차라리 다를 벌을 받겠어요.
네? 매일매일 정랑 청소를 할게요. 네? 아님, 종아리를 맞던가."
"네 이놈. 자고로 오줌을 싸면 키를 쓰고 옆집에서 소금을 얻어와야만
다시는 오줌을 안싼다고 했느니라. 가기 싫으냐? 왜?
물을 붇지 않은 그 고무신의 임자가 볼까 봐 창피하냐. 이놈아.
그런게 창피하면 왜 못난 짓을 해? 어서 가거라.
네가 싼 오줌만큼이나 잔뜩 소금을 얻어 오너라."
어젯밤. 밤길 속에서도 한번도 미끄러지지 않던 길을 몇번씩이나
곤두박질을 치며 내려갔다. 얼마쯤 왔을까?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그이는 뒤돌아서서 허리춤을 끌렀다.
그러곤 눈길 위에다 힘차게 오줌을 쌌다. 뽀얀 김이 눈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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