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스님 좋은 말씀

자비하신 원력으로 굽어살펴 주옵소서!

갓바위 2022. 6. 1. 09:33

 

어제 종일 내린 눈이 무릎까지 쌓여 녹지도 않았는데,

여전히 하늘은 꾸무륵 하니 또 한 차례 퍼부을 기세다.

그래서 산 속 절의 스님들은 총동원되어 겨우내 땔감을 준비하러 산 속으로 올라갔다.

 

그 동안 위장병으로 고생하시던 큰스님도 이날은 운력에 동참하시어 지금은 그야말로

절간같이 고요한 시간, 열 네 살짜리 임행자만이 홀로 남겨저 절을 지키고 있다.

 

오후쯤 간식을 내와야 한다는 원주스님의 엄명(?)을 받은 그이는 있는 간식을

준비하고 싶은 마음에 연신 코를 훌쩍이며 절 마당과 후원을 쥐 드나들 듯 부지런히

드나들었지만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마음은 그득했지만 할 줄 아는 음식도 없고, 또 절에 만들 만한 재료도 없고......,

그러던 중 문득, 아랫마을 묘련화 보살님이 아무도 모르게 건네주었던 라면이 떠올랐다.

볼이 늘 발갛고, 눈이 유난히 반짝이는 임행자는 아랫마을 보살들에겐 귀여움의 대상이었다.

 

보살들은 절에 와서 그이를 보면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볼을 한 번씩 꼬집어 뜯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의 볼은 더욱 붉어지고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히곤 했다.

"내가 뭐, 어린앤가...... 나도 엄연히 예비스님인데......"

 

어느날 보살님이 그에게 슬며시 건네주며 "행자님, 이건 라면이란 건데 국수 같은 거예요.

배고플 때 끓여 드세요" 하고 말했던 신문지에 싼 꾸러미가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 오늘 간식은 라면이란 것이다."

 

신바람이 난 그는 아궁이 속을 후후 불어가며 불을 지피고,

우물에서 물을 한 동이 길어와 가마솥에 들이부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물을 가마솥에 붓자마자 그이는 물 속에 라면을 하나하나 뜯어 넣었다.

 

그러고는 아궁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불 속을 쑤석이며, 코끝에 검댕 하나가

너풀대며 날아와 앉는 것도 모르고 물과 라면이 끓기만을 일심으로 기다렸다.

빨리 맛난 음식을 스님들께 드리고 싶은 그이의 마음을 아는지,

불기운이 점점 기세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임행자의 불도 더욱 발갛게 물들어갔다.

그이는 불꽃이 조금 스치다 만 장작 하나를 아궁이에서 꺼내 후원 바닥을 드드리며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이산 혜연선사 발원문을 한가락 뽑았다.

 

"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법보와 보살성문 스님네께

지성 귀의 하옵나니 자비하신 원력으로 굽어살펴 주옵소서......"

그이는 자기도 모르게 심취되어 엉덩이까지 들썩이며 '염불삼매에 빠져들었다.

 

가마솥을 향해 배례를 연신 하던 임행자는 문득 가마솥이 끓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가마솥 뚜겅을 열자 구수한 냄새와 더운 김이 공양간을 휘돌았다.

함지박에다 그릇을 죽 놓고 땀을 흘리며 라면을 퍼담던 그이는 무언가가 이상해

손길을 멈추고 라면 가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라면 가락이 너무나 많이 굵어져 있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 그의 새끼손가락만 했다.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쩌랴.

 

국물이 식을가 부지런히 팔을 놀려 라면을 퍼담고는 국물이 새지 않도록 조심하며

스님들이 올라간 발자국을 다라 다시 한 번 코를 ;훌쩍' 훔치고는 발을 내디뎠다.

 

무릎까지 쌓인 눈 때문에 그의 발은 더디게 움직였다.

코끝에는 송송 땀방울까지 맺혔건만,

먼저 올라간 스님들의 발자국은 끝간 데 없이 눈길 위에 찍혀 있었다.

함지박을 든 어깻죽지가 뻐근해져 이리저리 옮겨 쥐고 정신없이 얼마쯤 왔을까?

 

저 멀리 스님들의 나무 찍는 소리가 둘려왔다. 너무나 반가워

'스님!' 하고 외치자 여기저기 나뭇가지 위에 쌓여 있던 눈이 후드둑 떨어진다.

"어이--, 임행자냐?' 저 멀리 위에서 원주스님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의 힘들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한달음에 달려 올라간다.

스님들은 하던 일손을 놓고 추운 겨울날에 흘린 소중한 땀을 훔치고 계셨다.

"그래, 간식은 가져왔느냐?" "네, 여기......."

 

함지박을 받아든 원주스님은 큰스님 앞으로 들고 가서 뚜껑을 열었다.

아! 그런데 그 속에 라면은 어디 가고 형체도 없이 퉁퉁 불어

풀어진 밀가루덩이만 빽빽하게 들어 있을 뿐이었다.

 

"아니, 이게 뭐야. 얘. 이녀석, 네가 해온 이 음식 이름이 무어냐?

큰스님 속 아프신데 이런 걸 어떻게 드시라고......., 쯧쯧쯧."

원주스님의 야단에 임행자의 어깨가 축 처지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렇게 애쓰면서 기쁜 마음으로 마련한 음식인데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큰스님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함지박 속을 들여다보시고는 빙그레 웃으셨다.

 

"아니다. 아니다. 저놈이 내가 속 아픈 걸 어떻게 알고 밀가루 죽을 쑤어왔구나.

보통 정성이 아니구나. 오냐, 고맙다. 내 맛나게 먹겠다.

저놈이 나이는 어려도 남 아픈 데를 다 헤아릴 줄 아는구나. 허허허......,"

 

큰 소리로 껄껄 웃는 큰스님의 웃음소리가 산을 울렸다.

그 소리에 임행자 곁 어린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간다.

그러자 나뭇가지에 쌓여 있던 눈이 그의 얼굴에 쏟아졌다.

 

떨어진 눈이 눈에 들어가자 눈에서는 눈(眼)물인지

눈(雪)물인지 모를 맑은 눈물이 한줄기 또르륵 흘러내렸다.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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