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스님 좋은 말씀

아득한 세상사

갓바위 2022. 6. 4. 09:41

임행자는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적막한 산의 고요 속에서, 발자국 하나 없이

쌓인 눈 속에서,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는 절의 적요 속에서 그 무언가를 기다려 본다.

그렇지만 그이는 그 기다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산문에 나와 저 멀리 끝간 데 없이 구부러져 있는 눈 쌓인 길을 망연히 바라보기도 하고,

앙상한 가지 위에 쌓인 눈을 흔들어 털어내 보기도 하지만 알 수 없는 기다림은 깊어져갈 뿐이다.

문득 그이는 열 손가락을 다하고도 모자라는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 본다.

 

새삼 열다섯이라는 나이의 무게가 자신을 무겁게 짓누름을 느낀다.

어머니가 시집을 왔던 나이, 형이 아버지 대신 가장 노릇했던 나이, 나는 ......

그이는 절의 고요를 베고 누워 본다.

 

잠 속으로 도피를 하는 게 최선인 양 눈을 감아 보지만, 잠이 올 리 없다.

올 리 없는 잠은 다시금 눈을 뜨니 천장의 얼룩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이 지어낸 망상만큼이나 얼룩은 갖가지 모양으로 보였다가 사라지곤 한다.

 

"임행자야......"가끔은 큰스님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릴 때가 있다.

자신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깊고깊은 마음속의 한부분을 슬쩍 들여다보는 목소리다.

벌떡 일어난 그이는 한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한 손으로는 얼굴을 쓰윽 쓸어 보았다.

 

문을 열었다. 산을 향해 돌아선 큰스님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정겹게 느껴진다.

달려가 그 등에 얼굴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그이는 꾸욱 참았다.

먼 산을 향해 말을 걸 듯 큰스님은 산을 보고 말씀하셨다.

 

"임행자야, 오늘은 삭발이나 하자꾸나, 네 머리도,

네 마음도 삭발을 해야겠구나 어서 더운 물 떠갖고 오너라."

큰스님께서 직접 대중스님들의 머리를 삭발해 준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임행자의 머리를 손수 삭발해 주신단다.

더운 물에 머리가 푸욱 적셔지도록 목덜미를 가만히 잡고 있는 큰스님의 손길이 따사롭다.

서걱서걱하고 삭도기가 머리칼을 자르며 지나가는 소리가 묘하다.

 

큰스님의 오랜 법랍만큼이나 스님의 삭발 솜씨가 뛰어나다.

머리카락이 잘려지는 만큼 번뇌덩이가 잘려나가는 것 같아

그이는 머리 깍는 소리가 시원스럽게 느껴졌다.

 

목덜미 부분을 삭도기가 지나가자 선뜩하다.

큰스님의 익숙한 솜씨답지 않게 상처를 냈나 보다.

"어허, 그놈 참. 얼마나 망상을 많이 피웠으면 머리가 이렇게 상기가 돋았느냐?

자고로 성질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모발이 억세어지고 상기가 창궐해지느니라."

 

큰스님의 손길이 귀 쪽으로 다가갔다. 스님은 귀를 잡고 잠시 있더니 입을 여셨다.

"임행자야. 재미있는 이야기해 주랴? 삭발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건 바로 이 귀밑 돌리기다.

이 부분을 잘 밀어야만 잘된 삭발이라고 할 수 있는 게다.

옛날에 어떤 상좌가 은사스님의 머리를 삭발하고 있었단다.

 

그러던 중 바로 요 귀밑 돌리기를 할 참이라.

은사 스님은 노파심에서 한 말씀하셨것다.

자고로 귀밑 돌리기가 제일 어려우니 잘하라고 말이다.

 

근데 이 상좌라는 놈이 삭도기로 은사스님의 귀를 싹뚝 잘라놓고는 머리를

삭발하며 하는 말인즉슨, '스님, 어렵긴 뭐가 어려워요?' 라고 했단다."

키득대고 웃는 그이를 미소 띤 얼굴고 바라보던 큰스님께서는 웃음을 거두고는 말씀하셨다.

 

"이놈아, 넌 이 세상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이 세상이란 생각하기에 따라서 수미산만큼 클 수도 있다.

이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네 마음에 따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네놈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 네놈이 직접 스스로 겪어야만 할 일들이지만 말이다.

내 말은 망상이 피어날 때마다 그때 끄때 네 마음을 잘 다스리란 말이다. 어쨰, 알아들을 만하냐?"

아까의 길고긴 그 기다림이 이제는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잡힐 듯 잡힐 듯 하기만 할 뿐 선명하지는 않았다.

더불어 큰 스님께서 왜 자신의 머리도 삭발해 주신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 이놈아. 이제 네놈의 모든 번뇌덩어리를 다 잘라놓았다. 대야에 네놈 머리통 한번 지워 보거라."

 

새하얀 머리가 세숫대야의 물위로 흐릿하게 드러났다.

순간 임행자는 세상이 눈앞에 다가와 서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이는 눈을 감았다. 그래도 저 엄청나고 커다란

세상이 감아도 감아도 가꾸 눈앞에 다가와 서는 것만 같았다.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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