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스님 좋은 말씀

삼천배로 신심을 돋우고

갓바위 2022. 6. 7. 09:38

떨어지지 않으려는 새벽잠을 겨우 떼어내고 나와 선 법당의 기운이 며칠 전하고는 영 달랐다.

두 손을 맞대고 합장한 손끝이 '싸' 하니 차가워지는 게 요 며칠새 봄날씨 같던 기운하고는 딴판이다.

이빨마저 딱딱 맞부딪치는게, 물러갔던 동장군이 기세등등하게 다시 찾아온 것이 분명하였다.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절을 하면서 이마를 바닥에 대자 찬기운이 까까머리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순간, 임행자는 머리속이 확 열리는 것처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정도 추위라면 앞 논의 물도 꽁꽁 얼어붙었을 것이 분명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급한 속마음하고는 딴판으로 더디게 새벽예불이 끝나고,

느릿느릿 나가는 스님네들을 보며 나갈 차례를 기다리는 그의 속은 불이 났다.

겨우 차례를 맞아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검정 고무신으로 급하게 발을 밀어넣었다.

 

'아' 차거'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러자 회심의 미소가 입가에 감돌았다.

'그래, 이 정도 추위면 충분할 거야.'

채 밝아지지 않은 새벽 어둠을 헤치며 그이는 논으로 달려갔다.

 

어둠 속으로 논의 물이 얼어 뿌옇게 떠오르고 있었다.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어 논으로 던졌다. 돌멩이와 얼음이 부딪히며

나는 명쾌한 소리가 논물이 꽝꽝 얼어붙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반들반들 잘 닦인 썰매를 그이는 사랑스로운 듯 쓰다듬어 보았다.

내년엔 어쩌면 이 썰매들을 못 탈지도 몰랐다. '공부는 안 하고 놀이에만

정신팔린 돼지 같은 놈' 이라고 불호령을 내릴 큰스님이 눈앞에 서 계신 것만 같았다.

 

올해까진 그래도 슬쩍 눈감아 주셨지만 한 살을 더 먹으면,

사실 임행자 스스로도 체면상 썰매를 타기가 좀 그럴것 같았다.

내년에 후배 행자라도 한 녀석 들어오게 되면 잘 만든 이 썰매를 물려줄 요량으로

녹슬지 않게 닦아둔 게 뜻하지 않게 다시 사용할 기회가 온 것이다.

 

입춘이 내일 모렌데, 갑자기 찾아온 늦추위가 썰매를 신나게 탈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었다.

그이는 썰매를 어깨에 둘러멨다.

넓적한 판자 밑에 박힌 칼날과 꼬챙이에 꽉 박힌 못대가리가 햇빛에 반들거렸다.

 

다른 쪽 어깨에선 나무 스케이트가 흔들리고 있었다.

논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그이는 우선 재래식 나무 스케이트를 타기로 했다.

발 크기만한 나무판 밑에 철사를 두 줄 대어놓고, 앞쪽에는 못을 박아 만든 것이었다.

 

끈으로 발과 나무판을 잘 묶고 그이는 도약을 시작했다.

못 박힌 곳으로 발을 세워 얼음을 찍으며 뛰어가다가 속도가 붙을 즈음,

철사가 있는 바닥으로 서면 앞으로 쭉 미끄러져 갔다.

 

균형을 잡기 위해 벌린 양팔이 춤추는 것처럼 너울거렸다.

속가에 있을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타던 솜씨가 이제는 더욱 능숙하게 발전을 하였다.

맑은 햇살이 얼음에 부딪쳐 튀어오르고 못과 철사에 찍혀 튀어오른 얼음은

맑은 햇살에 녹아내리고 그의 콧등에는 땀이 송송 맺혔다.

 

임행자는 자신의 이 환상적인 썰매 솜씨를 많은 사람이 알아주었음 싶었다.

수많은 관중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상상을 하며 멋진 폼으로 내달렸다.

속도를 한층 가해 달려가던 그이는 그만 얼음 밖으로 나와 있는 볏짚에 걸려 썰매가

달리는속도와 합쳐져 얼음판 위에 힘껏 내팽개쳐져 콩 태(太) 자로 벌러덩 누운 채 주욱 밀려나갔다.

 

눈군가 볼까 싶어 그이는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상황은 벌써 그렇지 않았다.

때맞춰 논두렁에서 한패들이 보고 낄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임행자. 썰매타는 솜씨보다 넘어지는 모습이 훨씬 멋있는데? 기가 막힌 광경이었어."

대중스님들이 산책을 나오셨다가, 하필이면 그이가 넘어진 순간을 보았던 것이다.

얼음물에 얼룩진 옷을 비비며 그이는 분통을 삼켰다.

 

"임행자야, 나하고 썰매타기 시합할래?' "원주스님하고요?''

그이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간 자신에게 꼭 미운 짓만 골라했던

원주스님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기회가 온 것이다.

 

출발선 위에 원주스님과 임행자가 나란히 섰다.

대중스님들의 '준비, 땅!' 하는 소리가 들리고, 전력을 다하여 그이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꼬챙이로 얼음을 콱콱 찍으며 있는 힘껏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원주스님의 휘날리는 승복자락이 그의 눈앞으로 조금씩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다.

원주스님이 조금 앞서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논 가운데를 지나칠 때쯤인가. 웬일인지 원주스님의 속도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이는 이때다 싶었다. 있는 힘을 다하여 꼬챙이로 얼음을 찍으며 내달렸다.

젖 먹던 힘을 다한 보람이 있었는지 그이는 금세 원주스님을 따돌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씽씽 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릴 정도로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이쯤이면 원주스님도 못 쫓아올 거라는 안도감이 들 즈음인가,

앞으로 달리던 썰매가 땅 속으로 푹 꺼지는 것 같았다.

어찌된 일인가 생각할 틈도 없이 '어어' 하는 사이 그이는 허둥대며 밑으로 가라앉았다.

 

눈 깜짝할 새 차가운 얼음물 속에 두 다리를 담그고 있었다.

그이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얼음이 녹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자기만 슬쩍 빠져나온 원주스님을 원망할 마음도 없었다.

 

콧등에 맺힌 땀방울도 쑥 들어가버렸다. 논두렁에서 웃어젖히는

스님들의 소리가 꼭 여름 한낮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와글거렸다.

다리에 휙휙 감기는 젖은 바지를 입고 그이는 어기적거리며 썰매를 메고 돌아왔다.

 

이미 정해져 있었던 일처럼 저만치 큰스님이 서 계셨다.

어찌된 일인지 큰스님께서 모르셨음 싶을 일이 생기는 날은 꼭 큰스님께

정곡으로 들키는지 몰랐다. 그이는 큰스님 눈치를 슬슬 보며 게걸음치듯 옆으로 걸어갔다.

 

"어허, 네놈이 보아하니 시간이 남아돌아 어쩔 줄 모르는가 보구나.

그렇게 할 일이 없거들랑 하루종일 절이나 하거라.

한 삼천배쯤 하고 나면 오늘 하루해 정도는 심심해하지 않고 후딱 보낼 수 있을 테니......

 

이놈아! 또 돼지처럼 얕은 꾀 써서 대충 하고 다했다는 소릴랑은 말아라.

삼천배 한 얼굴이랑 안 한 얼굴은 금세 알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알겠느냐?"

법당 문고리를 잡아당기다 말고 그이는 앞산을 돌아다보았다.

 

'내가 이 법당을 나올 때쯤이면, 저 산에 붉게 노을이 물들어 있겠지?"

임행자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 못하고 노을 속에

엉금엉금 기어나올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환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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