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스님 좋은 말씀

일상생활이 곧 수행

갓바위 2022. 6. 10. 09:28

 

제일 먼저 산 속의 봄을 알린 것은 바로 임행자였다.

개울가 얼음 밑으로 졸졸졸 흘러가는 시냇물소리도, 저 산 너머의

아지랑이도 그이보다는 한 발 늦게 봄소식을 들고 나타났다.

 

산을 넘고 앙상한 나무의 둘레를 돌아 굽이굽이 달려온 봄은

자신이 가장 먼저 정착해야 할 곳으로 임행자를 찍었던 것 같다.

 

두리둥실한 엉덩이를 흔들고 다니는 폼이 별반 달라진 바는 없지만 어깨 위로

굼실대며 넘쳐나는 기운과 턱 주위로 일렁이던 솜털이 자취를 감추고, 마악 새싹이라도

돋을 것처럼 성글어진 그의 살결이 무엇보다도 더욱 완연하게 봄을 말해주고 있다.

 

어느덧 그이가 절에 온 지도 이태가 지났다.

웬만한 절 살림 정도야 이제는 식은 죽 먹기처럼 한눈에 훤히 들어왔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주제넘게 참견과 잔소리 하는

폼이 어엿한 스님처럼 어느만큼 몸에 배어버렸다.

 

"그놈 참, 바람난 처녀처럼 엉덩일 어째 그리 씰룩대며 다니느냐?'

그간 그에게 한번도 야단도, 칭찬도 하지 않고 무관심했던

노스님께서 그 걸걸한 목소리로 한말씀하셨다.

 

"너 절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 이제 몸에 절에서 살 물이 좀 배었나 한번 볼까?

어디, 얼마나 컸는지 고추나 한 번 보자."

"싫어요, 노스님. 큰스님도 고추 보자는 소린 안하시는데......"

 

"아, 이놈아. 큰스님이 네깟 고추 봐서 뭐하냐? 나는 노스님이라서 네놈 고추 좀봐도 된다."

언제달려들지 모를 노스님을 경계하며 뒷걸음치는 그이를 보고

예의 그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노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추를 못 보여주겠다? 좋아. 그럼 너는 이제 어엿하게

네가 스님 노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으로 보여줄 테냐?"

"고추를 보여주는 일말고는 뭐든지 할께요."

 

"좋다. 그럼 오늘 점심 대중공양을 네놈이 한 번 내도록 해라.

오늘 점심은 바로 국수공양이다. 쫄깃쫄깃하게 잘 삶아야 하느니라.

잘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네놈 고추가 그 벌의 대가를 톡톡히 받을 것이니라."

 

얼굴에 가득 장난기 어린 웃음을 채 지우지 않고 돌아서는

노스님을 보면서 그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대의 대강백으로 소문이 자자하신 노스님이 오늘은 왠지

그 근엄을 풀고 자기에게 장난을 거는지 알 수 없는 터였다.

 

게다가 모두 노스님의 그 걸죽한 말솜씨 때문에 스님이고

신도고 간에 노스님 앞에서는 영 맥을 못 추는 판이었다.

한번은 야하게 옷을 입고 온 한 보살님이 노스님한테 혼비백산해서 달아난 적이 있었다.

 

한껏 치장을 하고 온 그 보살을 보고 노스님은 스님 식으로 야단을 친 것이었다.

노스님을 보자. 그 보살은 예의를 다 갖추어 공손히 합장배례를 했다.

그러자 노스님은 인사를 받아주기는 커녕 대뜸 욕 한자락이 날아간 것이다.

 

"저런 미친년이 있나? 네 이년. 이 절에 누구를 꼬시려고 그렇게 치장을 하고 왔더냐?

냉큼 돌아가지 못하겠느냐?"노스님의 큰소리에 어쩔 줄 몰라하던 신도는 옆에 서있던

큰스님께 도움의 시선을 보냈으나 도와주기는 커녕 큰스님은 '네. 스님 말씀이 백 번 옳습니다'

 

하는 눈초리로 히죽 웃고만 있던 터였다.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는 부리나케

일주문을 빠져나가는 보살을 보고는 한술 더 떠서 큰스님이 입을 떼었다.

"미친년......""그래 네 말이 옳다. 미친년이다. 껄껄껄......"

 

곧 이어 터져나온 큰스님과 노스님의 웃음소리가 한바탕 절마당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런 노스님이었으니, 어쨌거나 그이도 경치지 않으려면 국수를 잘 삶아야만 했다.

깜짝 놀랐을 그 보살남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쓰린 임행자로서는

자신도 그와 같은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큰스님께 야단 맞는 일이라면 어느 정도 이력이 난 그였지만 큰스님과는

또 다르게 노스님한테 야단 맞은 일은 어쩐지 견뎌낼 방법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이는 불에 댄 듯 얼른 후원으로 내달랐다.

아궁이 가득 군불을 지폈다. 조금 지나자 가마솥의 물이 설설 끓어 올랐다.

한 다발의 국수를 안고 온 임행자의 얼굴에 약간 불안의 기운이 감돌았다.

늘 하던 짓도 멍석을 깔아 놓으면 못 한다고, 혹시 실수라도 하여서 국수를

설익게 삶거나 너무 푹 삶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었다.

 

사실 그이가 절에 와서 국수를 삶은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절에서 국수를 삶아 먹는 것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절에 큰일이 있을 때나,

특별히 누군가가 대중공양을 낼 때가 아니면 국수는 보기드문 음식이었다.

 

해서 스님네들은 거의가 다 국수를 아주 별미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이 역시 국수 좋아하는 것으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판이었다.

그이는 끓는 물 속의 국수를 휘휘 젓다가 젓가락으로 국수 한 가닥을 꺼내 입 속에 넣었다.

 

약간 꼬들 꼬들 한 것이 덜 익은 것 같았다.

한 번 더 국수를 뽀글뽀글 끓여서는 채로 국수를 건져올려 양푼에 담았다.

물통 속의 찬물을 국수에 들이부으려고 통속을 들여다보았다. 빈통이었다.

 

미리 물을 길어다 놓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어쩌랴. 양동이를 들고 우물로 내달았다.

얼음 같은 물을 한 바가지 푸어서 국수에 들이부었다.

노스님의 상을 따로 보아서 스님 방에 들여놓고 대중공양 방으로 들어갔다.

 

대중스님들은 국수가 맛있다며 여기저기서 칭찬이 자자했다.

임행자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웬걸?

노스님방에서 나온 상에는 국수가 그릇에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쯧쯧쯧, 이놈아, 세상에 그렇게 푹 퍼진 국수를 어떻게 먹으라고 들여놓는 거냐?

내가 네놈보고 밀죽을 쑤라고 했더냐? 네놈의 솜씨를 보니 영 절에서 살긴 다 틀렸다.

우선 국수부터 잘 삶아야 그간 얼마나 행자생활을 열심히 했는가 알 수 있는 법인데......,

오늘은 특별히 너를 위해 국수 삶는 법문을 할 테니 마음 깊이 잘 새겨서 어김이 없도록 하여라."

 

"노스님은 무슨 국수 잘 삶는 것 가르쳐 주면서 법문이라고 하세요?"

"어허, 이놈 봐라. 너 이놈아, 국수 삶는 것 하나라도 잘 배워두면 나중에 절에서

나가더라도 굶어죽지는 않을 터인데, 어찌 그것을 하찮게 여기느냐.

도둑질말고는 배워둬서 손해보는 일은 하나도 없느니라."

 

그이는 차라리 노스님이 초발심사 경문을 외워보라고 한다면 신바람 나서

하나도 틀림없이 없이 잘할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에 속이 상했다.

 

"자, 우선 물이 펄펄 끓을 때 국수를 넣고 그 국수가 한 번 끓어오르면 그때 거기에

찬물을 부은 후, 다시 끓어오르면 또 찬물을 봇고 하기를 세번, 그러고 나면 국수가

아주 쫄깃쫄깃하고 맛있게 삶아지느니라. 자, 법문 들은 소감이 어떠냐?"

 

"치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노스님은?"

"이놈이? 내 말을 잘 들어라. 이놈아, 이게 어찌 별것이 아니더냐?

그럼, 너는 이런 별것을 알고 있기나 했더냐?"

 

그이는 할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당대의 대강백이신 노스님이 무엇 때문에

국수 삶는 것을 가지고 이러시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옛날 중국에 똑똑한 유생이 한 명 있었느니라.

 

그는 자신의 지식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에 그 당시

유명한 한 선객을 찾아가 도(道)란 과연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그 스님 왈, 착하게 살아라 했것다.

 

그 시시한 대답에 실망한 유생은 그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라고 했것다?

그 스님이 하는 말,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말이지만 육십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라고. 그러자 그 유생이 크게 깨우친 바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떠냐? 너도 뭐 느끼는 바가 없느냐?'

 

그이는 무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조금은 느껴지는 게 있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 내가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었으니 이제 너도 그 대가를 해야하지 않겠냐?

어디 고추나 한 번 볼까?" 조금 전 그 근엄한 노스님의 모습은 어디 가고 어린애 같은

 

장난기 가득 담긴 미소를 지으며 노스님께서 임행자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오셨다.

당황한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떨리며 나왔다.

"잠깐, 잠깐만요, 노스님. 생각 좀 해보고요......"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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