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추녀 끝에 부서진 초여름의 햇살이 추녀를 넘어 방 안까지 넘실거리며 들어온다.
햇살은 파도보다 힘차게 그의 가슴을 쓸고는 밀려왔다 밀려간다.
잔뜩 물오른 산빛 또한 유혹의 손짓을 그치지 않는다.
멍하니 앉아 저쪽 산마루에 눈을 주고 있다가 몇 번이나 큰스님께 혼줄이 났던지......
그이는 유혹의 손길을 덜쳐버리기라도 하듯 문고리를 당겨 문을 닫았다.
그러나 창호지 틈새로 들어온 햇살은 초발심자경문의
채찍과도 같은 힘찬 문구보다 훨씬 강하게 그이를 후려쳤다.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큰스님께 들은 '공부하라'는 소리는,
그 나이의 임행자에겐 별 의미가 없었다.
별로 중요한 일도 없이 그저 방 밖으로 내닫고자 하는 마음은 왜 그리 강한지......
문득 그의 두 귀가 쫑긋해진다.
문 밖에 깜빡 어른대는 그림자를 그리고 들리지 않는 발걸음이 움직이는
그 소리를 감지하곤 책상 위의 초발심자경문을 아무 데나 펼치고 소리내어 읽었다.
"자락을 능사하면 신경여성이요, 난행을 능사하면 존중여불이니라,
간탐어물은 시마권속이요, 자비보시는 시법왕자니라.
자기의 즐거움을 능히 버리면 믿고 공경하기를 성인과 같이 함이요,
행하기 어려움을 능히 행하면 존중하기를 부처님과 같이 함이니라.
물건을 아끼고 탐하는 이는 이 마군이의 권속이요,
자비로 보시하는 이는 이 법왕의 아들이니라......"
'법왕의 아들이니라......' 부분을 길게 빼고 그이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 틈을 기다렸다는 듯 큰스님의 혀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어, 그놈 참. 어찌 책 읽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허공에 떠다니고 있는 게
마치 눈에 보이는 것 같구나. 쯧쯧쯧... 자고로 책은 마음으로 읽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찔끔한 그이는 혀를 낼름 내밀며 밖의 큰스님께 슬그머니 눈을 흘겨 보았다.
큰스님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이는 엉금엉금 문 쪽으로 기어가 엉덩이를 치켜든 채,
한쪽 눈을 감고 문틈으로 밖을 엿보았다. 순간 그이는 뒤로 벌러덩 나자빠지고 말았다.
어떤 뭉툭한 것이 냅다 눈을 찌르는 것이었다.
곧 이어 그것이 큰스님의 손가락이라는 걸 말해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뭐 하려고 문틈으로 밖을 엿보느냐?
내가 간 줄 알고 그새 게으름을 피우려고? 이놈아, 척 하면 삼척이오,
내다보면 절터요, 툭 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요,
짝하면 귀싸대기 올려붙이는 것 정도라는 건 눈 감고도 다 아는 사실이다.
허니 네놈 속마음 아는 것 정도야 손바닥 보듯 훤한 일이 아니겠느냐?
고얀놈. 꼼짝없이 들어앉아 공부하고 있거라. 궁둥이를 삐죽거리며 다니고 있는
네놈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간 그땐 불똥 떨어질 줄 알아라."
맵싸한 큰스님의 손가락 맛이 눈에서 괜한 눈물이 삐죽삐죽 배어 나오게 했다.
몸을 배배 꼬며 긴 한숨을 연신 내쉬던 그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다.
'그래, 맞아. 요기 요 방 앞에 쪽마루를 놓으면 어떨까?
그리고 그위에 앉아서 글을 읽으면 얼마나 머리에 쏙쏙 들어오겠어?
좋아, 마루부터 놓고 공부해야지.'활짝 열어놓은 문 밖으로
선뜻 내디뎌지지 않던 발걸음이 이젠 마음 놓고 내디딜 충분한 이유를 찾아냈다.
임행자는 후다닥 일어나 밖으로 내달았다.
공사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쌉쌀하게 나무 켜는 내음이 풍겨 왔다.
그이는 신바람이 났다. 수북이 쌓인 톱밥, 나무냄새. 연장들, 왁자지껄한 소리들.
한쪽 구석에 모아둔 쪽나무 옆으로 다가간 그이는 나무를 고르기 시작했다.
대체로 편편하고 결 좋은 나무를 골라잡은 그이는 비록 어깨너머로 배운
서투른 솜씨였지만 톱으로 자르고 대패로 열심히 나무를 켰다.
쪽마루를 놓을 만큼의 나무를 다듬은 그이는 방 앞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몇 번씩이나 방과 공사장 사이를 무거운 나무를 들고 왔다 갔다했지만 조금도 힘든 줄 몰랐다.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빡빡 깍은 임행자의 머리 위에 쏟아져 내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땀방울이 송송 맺혔지만, 그이의 눈 빛은 지칠 줄 모르고 형형하게 빛났다.
고요한 산 속에 뚝딱뚝딱 못 박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어느 누구의 글 읽는 소리보다도 힘차게 마음으로부터 내려치는 소리였다.
완전히 마루놓기 삼매에 빠져든 그의 손길과 몸은 부단히 움직였다.
이리 가서 못 박고,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고, 또 다가가서는 나무를 맞추어 보고......
어디선가 초여름의 서늘한 저녁 바람이 한줄기 불어왔다.
땀으로 얼룩진 얼굴에 스친 시원한 바람에 퍼뜩 그는 정신이 들었다.
마루는 거진 다 완성되어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한바탕 끝내고 났을 때처럼 흐믓한 마음이 오히려 허탈하게 느껴졌다.
뭔가 힘이 빠져 부실부실 바닥에 주저 앉으려 하다가,
그이는 큰스님의 목소리에 불에 덴 듯 벌떡 일어섰다.
"어이, 임목수. 마루는 다 놓았는가?
이놈아, 공부보다 목수질이 더 좋으면 스님 노릇 하지 말고 당연히 목수가 되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어서 옷 벗고 산을 내려가 목수가 되어라, 이놈. 어섯!"
큰스님의 웃음기 걷힌 얼굴을 보자 겁이 더럭 나기도 했지만 한가닥 오기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큰스님, 스님은 공부하고 노동은 둘이 아니라고. 일도 다 공부라고 해놓으시곤......"
순간, 그의 눈앞엔 아직 뜨지도 않은 초저녁 별들이 아롱아롱했다.
"어허, 이놈이 뭐가 되려고......쯧쯧. 공부와 노동, 둘 다 중요하다고 한 말은 니 말이 맞다.
허나 너처럼 공부하기 싫어서 하게 된 일 따윈는 다 소용없는 법이니라.
게다가 마루는 추녀를 잘 살피고 놓아야지 이것처럼 짧은 추녀에는 마루를 안 놓는 법이다.
알지도 못한 것이 그새 절밥 좀 먹었다고 어디에서 말대답이냐?
그 마루 부숴버리기 전에 얼른 걷어치우지 못하겠느냐?
쓸모 없는 것을 치워버리는 것도 니 말마따나 다 공부이니라. 어서 걷어라."
큰스님의 호통소리에 이끌리듯 그이는 하는 수 없이 연장을 챙겨들었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어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말갛게 켜놓은 나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까운 듯 나무의 결을 찬찬히 쓰다듬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돌아보며
하시는 큰스님의 말씀이 바람결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그놈, 어디가도 굶어죽진 않겠군. 눈썰미 하난 쓸 만한데?"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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