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스님 좋은 말씀

내 얼굴에 단풍 들면

갓바위 2022. 6. 15. 09:49

 

저게 누구일까? 철없는 나뭇잎이 때이른 단풍옷을 꺼내 입은 것일까?

유난히 빨간 얼굴이 푸른 나뭇잎과 어우러져 단풍잎처럼 흔들리고 있다.

늦여름 한낮, 매미의 울음소리가 쨍쨍할 만도 한데

더위에 매미도 지쳤는지 우레 같은 고요만이 절안을 휘감아돈다.

 

목수들도 일손을 놓고 그늘 아래 달아오른 등을 눕히러 갔는지 보이지 않고,

공사장에 켜켜이 쌓아놓은 나무틈 사이 단풍 물든 얼굴의 주억거림만이 절의 고요를 건드리고 있다.

누구일까? 주억거리던 고개가 '휴' 하는 한숨소리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무렇게나 퍼질러앉은 채, 쓰윽 눈가를 훔치는 그 손의 오동통함이 그가 임행자임을 말해주고 있다.

토해내는 한숨소리에 떨떠름한 냄새가 진하게 배어 나온다. 또랑또랑하던 그의 눈빛이 초점 없이

알딸딸하니 풀려 앞에 놓여 있는 사발 속의 희뿌연 액체를 바라다보고 있다.

 

사실 그이는 이렇게 퍼질러앉아 술을 마실 생각은 아니었다.

공사장 안을 기웃거리다 인부들이 사다놓은 막걸리를 처음엔 그저 호기심으로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셔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한 모금의 막걸리 맛이 아련한 기억들을 떠오르게 하여, 결국 이렇게

퍼질러앉아 한 잔 한 잔 취하도록 술을 마시게 되어버렸다.

새벽을 뚫고 아침하늘이 푸르게 전져올 즈음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얘야, 양조장에 가서 탁주 한 됫박 받아오너라."

아버지의 엄명에 아늑한 잠자리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던 기억, 달그락거리는

빈 주전자를 들고 아침을 헤치며 비틀비틀 걸어가던 그 길, 양조장 입구에서부터

맡아지던 시큼떨더름한 냄새, '오늘도 왔냐' 하며 반겨주던 양조장 아저씨의

걸걸한 목소리가 마치 지금도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 키보다 더 커다란 단지 속의 막걸리를 휘휘 저어

한 됫박 철철 넘치게 주전자에 가득 부어주곤 했었지."

조금은 힘에 부치는 무거운 주전자를 들고 걸어가던 그 길이 왜 그리도 멀게만 느껴지던지......

 

이리저리 다른 팔로 옮겨들 때마다 찔끔찔끔 흐르던

막걸리의 뿌연 방울들은 또 어찌나 아깝게 느껴지던지......

아버지의 심부름이 주었던 유일한 낙은 떼어놓은 발걸음이 무거울 때마다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막걸리를 한 모금씩 마시는 일이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쪽 뺨이 붉디 붉게 물들어 있기가 일쑤였다. 그

래도 아버지는 짐짓 모르는 척 주전자를 받아들고는 한 대접 가득 부어 시원스레

마시고는 임행자를 돌아보며 어른에게 하듯 물어보곤 했다.

 

"어디, 너도 한 잔 맛보겠느냐?'이미 알딸딸한 기운이 몸 구석구석 퍼져 있는

자신을 아버지께 들킬까 황급히 도리질을 치며 외면하곤 했었다.

'그래! 바로 그 맛에 그 기분이야. 아버지는 이런 맛과 이런 기분 때문에 늘 술을 마셨던 것일까?'

 

기억 저편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이런 상념들이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과는 아랑곳없다는 듯 술잔으로 자꾸만 손이 가게 했다.

마치 술꾼처럼. 그리고 어른처럼 소리까지 내며 쭈욱' 또 한 잔을 들이켰다.

 

그의 눈빛이 더욱 흐려졌다.

손 끝까지 퍼져나가는 알코올 기운이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한다.

여름 한낮, 땅에서 솟는 열기와 알코올 기운이 그의 몸을 옆으로 자꾸만 기울어지게 한다.

 

한줄기 땀이 그의 가슴을 따라 눈물처럼 또르륵 흘러내린다.

적막만이 감도는 절간에서 그의 머릿속만은 웅웅 소리를 내며 와글거렸다.

어느날 갑자기 누으신 아버지가 더 이상 술 받아오라는 말씀이 앖으셨다.

 

그날부터 그이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술심부름뿐만 아니라,

그렇게 드러누우신 것처럼, 그렇게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나버리셨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막걸리는 내 앞에 있는데 아버지는 어디로 가버리셨을까?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만약 아직까지 아버님이 살아 계셨다면

오늘 아침에도 나는 졸린 눈을 부비면서 막걸리를 받으러 갔겠지?

 

그리고 또 아버지 몰래 술을 마셨겠지?

버지도 내가 몰래 마셨던 것을 아셨을까? 아버지지도? 아버지!

오줌을 누려고 임행자는 몸을 일으켰다.

순간 앞산이 기우뚱 논앞까지 다가왔다. 물러간다.

 

"아! 세상이 빙빙 도네. 네가 취했나? 흥, 어림도 없지. 그 동안

아버지 술을 먹으면서 갈고 닦은 실력이 있지. 내가 이 정도에 취했을라구."

기울어지는 몸을 겨우 추스리고 오줌을 다 누고는 고개를 들었다.

 

순간 땅바닥이 벌떡 일어나 이마를 냅다 때리는 것 같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땅이 일어난 게 아니라 자신이 땅바닥에 넘어져 이마를 부딪힌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이는 얼른 방에 들어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자신이 좀 이상해진 것만 같았다.

공사장을 나와 비틀비틀 절 앞마당을 지나 방으로 향해 갔다.

앞마당 땅바닥이 쑥쑥 발이 들어가는 것처럼 푹신푹신했다.

 

대웅전이 찌그러졌다가 퍼지고 그 옆에 누군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눈을 부비고 비틀비틀 자세히 보았다. 순간, 그이는 숨이 훅 느껴졌다.

큰스님과 원주스님이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앗다.

 

"저어, 큰스님, 저 아픈 것 같아요. 이상하게 어지럽고 열도 나고 해서 좀 쉬려고요......"

"큰스님, 저놈이 아프다네요? 어디 병원에라도 데려가야 하는것 아닐까요?'

원주스님이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배꼽을 잡으며 놀려댔다.

 

"어허, 그놈 참. 임행자야. 돼지 같은 네 얼굴에 단청불사 한번 멋들어지게 했구나.

게다가 이 더운 여름에 네 얼굴엔 무슨 연유로 벌써 단풍이 들었는고?"

그이는 아무 말고 하고 싶지 않았다.

 

입만 떼었다 하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실룩이는 빨간 볼이 얼마나 울음을 참고 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방에 들어온 그이는 차가운 방바닥에 등을 댔다. 문득 시원한 우물물 한 대접이 먹고 싶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잠이 그를 심연 속으로 깊숙이 끌고 들어갔다. 깊디깊은 잠이었다.

심한 갈증과 두통 속에서 그이는 눈을 떴다.

 

갑자기 어디선가 아버지인 듯, 혹은, 큰 스님인 듯한 목소리가

뒤범먹이 되어 그이의 머릿속을 한 번 흔들어댔다.

"이놈 임행자야. 어서 일어나 아랫마을에 가서 탁주 한 됫박 받아 오려무나.

해장술 한 잔 해야 되지 않겠느냐!"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卍 스님 좋은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값치르기  (0) 2022.06.18
큰스님 되거들랑....  (0) 2022.06.17
새 생명을 키우기 위해  (0) 2022.06.14
공부도 노동도  (0) 2022.06.12
아련한 옛추억  (0) 2022.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