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스님 좋은 말씀

아련한 옛추억

갓바위 2022. 6. 11. 08:58

 

한 밤을 자고 일어날 때마다 산빛이 달라져 갔다.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아 들꽃들이 그 빛을 더욱 요염하게 뿜어내고,

나무 들은 겨우내 묵혀 두었던 땅 속의 진한 영양들을

힘차게 끌어올려 푸르게 푸르게 물이 올라갔다.

마치 산 전체가 '와와' 함성이라도 지르며 꿈틀끔틀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임행자의 오동통한 뺨에도 진달래 꽃물이 들었는지 볼이 더욱 발그레해졌다.

더구나 입술 근처까지 내려왔다가 올라가던 콧물줄기도

만발한 봄기운에 사라지고 말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절 근방에는 온 대중들이 모여 재담으로 배가 아프도록 웃기도 하고,

혹은 간간이 졸기도 하면서 '부처님 오신 날' 에 쓸 등을 만들고 있었다.

 

분주히 놀리는 임행자의 손 끝에도 겨우내 앉은 터더부리가 벗겨져 말간 빛을 띠고 있었다.

고운 색종이를 돌돌 말아가며 등을 만들던 그이는 색깔에 취한 듯 아련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아! 벌써 절에 와서 두 번째로 맞는 '부처님 오신날' 이로구나. 세월은 참 빠르기도 하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데 벌써 이태가 지나가다니......'

 

예쁘게 분홍물이 든 종이를 집어들다가 그이는 그 색깔이 주는 아련한 기억 때문에 가슴이 저려왔다.

'그래, 맞아. 옥희의 치마색이야. 옥희는 그날도 이 종이색처럼 예쁜 분홍빛 치마를 입고 왔었지.'

고운 분홍빛 치마를 입고 팔락팔락 나비처럼 뛰며 고무줄 놀이를 하는 옥희의 모습이 선연했다.

 

'옥희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은철이와 재훈이, 나, 이 셋은 약속이나 한 듯 달려가 훼방을

놓거나 고무줄을 끊어오기 일쑤였지.'그때 울먹이며 쳐다보는 옥희의 얼굴이 정답게 떠올랐다.

당시는 이들의 치마 걷어올리는 일은 또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통쾌했던가.

 

비록 한바탕 놀리고 난 뒤에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맞고 복도에 꿇어 앉아

손들고 벌을 설지언정 그 놀이는 결코 멈출 수 없는 재미를 갖고 있었다.

한패거리가 되어 늘 붙어다니며 잘 놀다가도 이유도 없는 싸움이 붙으면,

또 얼마나 집요하게 놀렸던가. 유난히 누런 코를 줄줄 흘리고 다니던 임행자를 보고

싸움 뒤 끝에 놀리던 소리가 꼭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코부리 딱딱 군산 기계배, 코부리 딱딱 군산 기계배......."

뭉긋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서로들 고추를 내놓고 누구의 오줌줄기가 멀리까지 가나 내기를 했던 기억,

내기에 이기기 위해 마렵지도 않은 오줌을 겨우 짜내 오줌을 싸야만 했던 일.

불장난을 하고 불 주위에 모여서 불자동차 흉내를 내며 오줌을 싸서 불을 끄던 일.

 

"가만, 그때 오줌줄기가 더 멀리 가기로 한 내기엔 누가 이겼던가?

은철이었나, 아니야, 아마도 나였을 거야. 그럼 지금 다시 내기를 하면 누가 이길까? 히히......"

진달래 꽃줄기를 넘기면서 오줌줄기를 힘차게 쏘아대던 그 논두렁을 다시 한번 올라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처럼 그렇게 다들 모여 고추를 내놓고 통쾌하게 오줌누기 시합을 해보고 싶었다.

 

아련하기도 하고, 생생하기도 한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나른한 봄날이 주는 권태처럼 저절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상념들이 그의 마음을 따뜻하니 데워주었다.

"저런, 저런. 야, 임행자야, 뭐 그리 좋은 생각을 하길래

혼자 빙긋이 웃고 있냐. 재미있는 일니면 같이좀 웃자."

꼭 기분 깨지는 소리만 하는 원주스님이 이때를 놓치랴 한마디 던졌다.

갑자기 쌜쑥해진 그의 마음을 아시는지 큰스님께서 한마디 거든다.

 

"임행자야, 네가 지금 만들고 있는 연등이 유난히 곱구나.

무얼 생각하면서 만들었길래 그리도 고우냐?"

큰스님의 말씀을 듣자 그이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더올랐다.

 

"큰스님. 저. 이 등 제가 가지면 안돼요?"

"왜! 누군가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가부지? 그러려무나."

또 원주스님이 얄밉게 끼어들었다.

"고향에 두고 온 애인 생각이 나서 애인한테 등 달아주려고?"

"칫, 원주스님은 애인밖에 몰라요?"

수많은 연등이 도량 가득 둥실 떠 있었다. 그 많은 등 중에서도

그이가 대번에 알아볼 수 있는 등 하나가 저쪽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등은 팔각등, 수박등, 연등 가지각색의 등 중에서도

환하게 빛을 발하는 것처럼 유독 곱게 느껴졌다.

 

멀리서 연등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바람결을 따라 고운 연등이 흔들거렸다.

연등을 따라 등 끝에 매달린 이렇게 씌어진 이름표도

임행자의 마음을 아는지 가만가만 고갯짓을 하고 있었다.

'유옥희, 은은철, 엄재훈, 강덕만.'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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