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둥 걷어올린 바지 밑으로 그의 늘씬한 무다리가 쓰윽 드러났다.
다리통이 얼마나 실한지 눈이 부실 정도다.
젖살이 아직 채 벗겨지지 않은 것 같은 뽀얀 종아리가
오월의 푸른 햇살을 받아 힘에 넘쳐 굼실거린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 물을 대어놓은 논에는 푸른 다리를 쭉쭉 뻗으며
헤엄치는 청개구리들이 물여울을 만들고 다녔다.
논두렁에 올라서서 헤엄치는 개구리들을 바라보다가
그이는 '첨버덩' 하고 논에 발을 들여놓았다.
눈에 띄지 않았던 작은 벌레들의 후다닥 놀란
움직임이 논무물에 작은 물살을 여기저기 만들곤 했다.
미끌미끌한 논바닥의 흙이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며 파고들었다.
간지러운 듯 '이크 이크' 하며, 이 발과 저 발을 번갈아 떼어놓던 그이는 논두렁 위로
무심히 눈길을 돌리다가, 얼른 웃음을 거두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버렸다.
"어허, 저놈이 그냥 절에 남아 있다가 중간에 참이나 내오라니깐.
말도 안듣고 미리 논에 와버리면 어쩌느냐? 저놈이 웬 고집을 저리두 부릴까?
이놈아, 모심는 일이 네놈 생각처럼 그리 신나고 재미있는일인 줄 아느냐? 어서 들어가거라."
"싫어요!" 그이는 싫다는 표현을 좀더 완강하게 하기 위해 윗몸과
두 팔이 서로 엇갈리게 뒤흔들어댔다. 볼멘소리가 툭 튀어나온다.
"큰스님! 큰스님은 저보고 눈썰미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뭐든지 한번만 보면 척하니 흉내를 잘 낸다고 해놓으시고는 그러세요?"
"큰스님, 저 놈의 임행자를 한 방에 쫓아버릴까요? 저런 고집 센 놈은 그저......
어휴, 임행자야. 너는 다 나쁜데. 그 중에서도 고집 센게 제일 나쁘다. 이놈."
꼭 얄미럽게 끼어드는 원주스님을 보고 그이가 막 대드려는 순간 큰스님께서 손을 내저었다.
"나둬라. 어디 오늘 저놈 솜씨좀 보자꾸나."
못줄을 따라 간격을 맞추어 가며 벼뿌리를 잡고 논바닥에 쿡쿡 알맞게
찔러놓는 법을 원주스님이 윽박지르듯 가르쳐 줬다.
벼를 너무 꽉 잡으면 벼의 중간이 부러져버리고, 너무 살살 잡고 심으면
벼가 땅에 제대로 꽂히지 않아 나중에 물 위로 둥둥 뜬다고 하였다.
그이는 듣는 등 마는 둥, 건성으로 설명을 듣고는 의기 양양하게 모심는 일에 동참하였다.
큰스님께서 놓으시던 으름장에 비해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이는 신바람나게 모를 심어나 갔다.
한참이 지나자 구부린 허리가 아파왔다. 그래도 임행자는 참았다.
억지를 부리다시패 해서 나온 논일인데 이깟 아픔 때무에
게으름을 피운다면 영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허리가 뻐근해져왔다.
그이는 허리에 한 손을 짚고 한 손으로 허리를 자근자근 두드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절로 '끙" 하는 소리가 났다.
'휴--'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기가 한 일이 얼마나 되나 뒤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눈과 입이 '쩍' 벌어졌다. 논바닥에 정성을 다해 꽂아 놓았던
벼들이 모두가 물 위로 둥둥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쯧쯧쯧......" 큰스님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아, 새 생명을 하나 새로이 키우는 일인데 그깟 눈썰미 하나로 될 같으냐?
정성과 익숙한 솜씨가 한테 어우러져야만 되는 일. 어떠냐?
앞으로도 계속 공부 안 하고 네놈 솜씨만 믿고 살 거냐?"
큰스님께 야단을 들은 그이는 속상함과 부끄러움이
한테 뭉쳐져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시 모를 심었다.
'에이. 씨. 원주스님이 가르쳐 줄때 좀더 주의 깊게 봐둘걸.
그랬으면 이런 망신살은 안 뻗쳤을 텐데......'
벼의 허리가 부러지지 않게, 또 물 위에 뜨지 않도록 논바닥에
꾹꾹 눌러 심다 보니 속도가 처음보다 배는 느려졌다.
임행자의 급한 성질에 그만 부아가 치밀었다.
"에이, 그냥 참이나 내올걸. 괜히 나와가지고......'
부글부글 끓는 속에 기름이라도 붓듯 갑자기 오른쪽 종아리가 따끔거렸다.
깜짝 놀라 논물로 종아리에 붙은 흙을 씻어내고 자세히 보았다.
빨간 거머리 한 마리가 종아리에 달라붙어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아니, 이놈이 감히 어디에 들러붙어 피를 빨아먹고 있어? 에라잇 요놈!'
분풀이할 데가 생겼다는 듯이 흙을 한줌 집어 거머리에 대고 힘껏 비벼댔다.
거머리의 몸뚱어리가 짓이겨져 떨어져 나갔다."못된 놈......"
마음속으로 '못된놈' 하고 욕을 하는데 어디선가 마찬가지로 "못된 놈"
하는 소리가 똑같이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들려는 순간,
진흙 한 움큼이 날아와 그의 얼굴을 짓이겨버렸다.
"네 이놈, 저런 고얀놈이 있나! 이놈아, 왜 살생을 하느냐?
그 피둥피둥한 다리의 피 좀 거머리가 빨아먹었다고 잔인하게
몸을 조각조각 짓이겨서 죽여버려? 물을 흘려서 잘 떼어내도 될 것을 ......
일도 못하는 것이 논에 나와서 아까운 생명이나 죽이고,
그러고도 네놈이 부처님 밥 먹는 놈이라고 할 수 있느냐?
어디, 네놈의 몸뚱이도 한 번 짓이겨 보자. 그
래야만 네놈도 그 괴로움을 조금은 알 거다."
논바닥에 몇 번 쳐박혀 얼굴과 옷에 온통 흙이 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새참이 오는 바람에 임행자는 큰스님으로부터 몸뚱이가 짓이겨지는 일은 겨우 모면했다.
한쪽에는 스님들의 새참이 마련되어 있고, 저쪽에는 속인들의 새참이 마련되어 있었다.
큰스님께 당한 서러운 일도 있고 하여, 그이는 선뜻
스님들 새참자리에 끼어들지 못하고 어색하게 몸을 꼬고 있었다.
저쪽에서 처사님 한 분이 손짓을 하며 그이를 불렀다.
큰스님의 눈치를 보며 슬슬 뒷걸음치듯 속인들 틈에 합류했다.
"어서 오세요. 꼬마스님. 자. 이 밥 드세요."
목까지 밀려오던 서글픔이 꿀맛 같은 밥 한 숟가락에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흙 묻은 볼에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저씨 한 분이 문득 사발을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자, 꼬마스님. 피로도 풀고, 마음도 풀게 이 막걸리 한 사발 들어보슈."
"아, 안돼요. 스님은 술 안 먹어요."
"아, 이게 어디 술인가요. 일하고 나서 이것 한 사발 하는 것은 보약이요,
자. 조금만 들어봐요. 기분이 한결 나아질게요."
큰스님 계신 쪽을 흘긋 바라보고 나서 그이는 용기를 내어 사발을 받아들었다.
그 뿌연 액체를 지그시 바라보다 그이는 한 손으로 코를 막고 쭉 들이켰다.
팔뚝으로 쓰윽 입가를 훔치고는 신김치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 찝찔한 막걸리의 맛과 싸한 냄새가 신김치보다 더 시큼하게 콧잔등을 건드렸다. 눈물이 맺혀왔다.
그러자 뱃속에서 서러움을 뱉어버리기라도 하듯 '끄윽' 하고 떨떠름한 트림이 진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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