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물 소리가 자꾸만 유혹을 한다.
'우당탕탕' 흘러내려 가는 소리가 '어서 오라' 고 임행자를 부르는 것만 같다.
큰스님과 대중스님들이 수도암이라는 산 속 암자로 모두 떠나고 난 지금,
간혹 들리는 그의 숨가뿐 소리만이 절의 적요를 달래주고 있다.
큰스님과 대중스님들의 방청소를 다 끝내고 마루 끝에
나앉은 그의 발간 얼굴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아직 채 청소를 끝내지 못한 뒷마루와 앞마루, 그리고 절 앞 뒤 마당을
둘러보는 그의 마음은 자꾸만 계곡 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실은 스님들이 모두 가고 난 뒤 그이 나름대로 세워놓은 계획이 있었다.
산 속으로 올라가 지금쯤이면 알맞게 익었을, 어름(국산 바나나)과 산머루를
잔뜩 따먹고는 시원한 계곡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참이었다.
그런데 그의 속마음을 어떻게 아셨는지 큰스님은 절 안의 여기저기를
청소하라고 일러주고는 수도암으로 올라가셨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루종일 바삐 움직여야만 겨우 치울 수 있는 일의 양을 떠맡은 임행자에게,
계곡물은 속절없이 자꾸만 유혹을 하는 것이었다.
'계곡물아! 제발, 날 좀 유혹하지 마.'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이는 갑자기 '유혹'이란 단어에 저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드디어 자신도 어떤 경계에 부딪혀 자신과의 싸움길에 들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암, 이겨내야지. 사내대장부가, 그까짓 계곡물 유혹에 넘어갈 수야 없지.'
마음은 이렇게 다짐했지만, 사타구니께에 돋은 땀띠가 유혹의 손길에 가세를 더하였다.
옷을 훌렁 벗고 시원한 물 속에 몸을 담그면 따끔거리는 땀띠도 좀 가라앚을 것만 같았다.
마음은 '안 돼!' 하고 외치고 있었지만, 발길은 어느새 계곡물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 조금만 놀다 하지, 뭐."
겨우 마음을 달래고는 짙은 녹음 사이로 하얗게 부서지며 흘러내리는 물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이는 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풍덩, 계곡 속으로 뛰어들었다.
계곡물은 힘찬 포옹으로 임행자를 맞아주었다.
자맥질을 하고 물방울을 튀기며 헤엄치는 그이와, 계곡물은 신나게 한바탕 놀아주었다.
사타구니의 땀띠도 가라앉은 지 오래, 파랗게 입술색이 변한 그이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물에서 나왔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따뜻한 햇살이 그이의 반들반들한 등을 감싸주었다.
벗어놓은 옷을 꿍쳐 들고, 홀랑 벗은 몸으로 달려가는 임행자의 모습은 여름 한낮과 한몸이 된 듯싶었다.
햇살은 절 마루를 따뜻하니 데펴놓고는 이미 저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달려온 그이가 따뜻한 마루에 검게 탄 맨살을 대자, 눈두덩이가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벗은 옷을 채 입지도 못했는데 그의 몸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져내렸다.
옷은 그저 팔 안에 껴안은채. 오후의 햇살이 마당에 반쯤 그늘을 만들면서 기울어지기 시작해졌다.
한 점 없는 바람 속에서도 간혹 울리는 풍경소리가 절의 적요를 한층 더해주었다.
깊은 나락과도 같은 잠 속에 빠져든 그이는 기울어진 해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가끔 사타구니께를 한 번씩 긁적거릴 뿐이었다.
쏟아지는 물보라를 밟고 힘차게 도약을 하면 임행자의 몸은 허공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계곡 주변에 몰려든 토끼, 산새, 사슴 할것 없이 모두가 박수를 치며 놀라워하였다.
이 산 속의 산신령인 그이를 따르지 않는 미물을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저쪽 절에 있는 큰스님이란 분만은 그이의 존재에 무심하였다.
그래서 지금 그이는 절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온통 절 안에 장난을 쳐놓고 땀을 식히려 이곳 계곡에 온 것이었다.
허공에서 춤을 추던 임행자는 저쪽 길모퉁이를 돌아오는 큰 스님을 보았다.
분명 자신을, 아니 임산신령을 찾으로 오는 게 분명했다.
'킥킥' 웃음을 터뜨리며 그이는 계곡물 속 깊숙이로 몸을 숨겼다.
'나를 찾으러 오는 게 틀림없어. 내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라지!'
숨과 웃음을 참으며 물 속에 숨어 있는데, 저쪽에서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가 덮쳐왔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듣도 못한 커다란 가재가 오고 있었다.
당황한 그이는 '쉬쉬' 가재를 쫓았지만 가재는 피할 겨를도 없이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하필이면, 아주 하필이면 임행자의 코를 '꽉' 무는 것이었다.
"아야-."정신이 아뜩해지는 것 같은 아픔에 그이는 소리치며 눈을 번쩍 떴다.
눈 앞에는 빨간 노을을 배경으로 하고 서 있는 큰스님과 대중스님들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깜짝 놀라 일어나려고 했지만, 큰스님 손 안에 있는 코 때문에 그이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파하는 임행자와는 아랑곳없다는 듯 큰스님은 더욱 세차게 코를 비틀러면서 말씀하셨다.
"이놈아! 우리 인생사란 게 꿈속의 한바탕 놀이처럼 다 헛된 것이다.
그래, 허망한 꿈에서 깨어나니 기분이 어떠냐. 그래도 공부 안하고 허송세월만 할 거냐. 이놈아.
어디 네놈에게 하나 묻자. 꿈 속의 가재 맛이 더 매우냐. 내 손맛이 더 매우냐? 빨리 한 마디 일러 보거라/"
큰스님의 호통소리에 이어 온 스님네의 웃음소리가 노을진 하늘로 번져 올라갔다.
어디선가 불어왔는지 한 줄기 바람이 풍경을 세차게 흔들면서 지나갔다.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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