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잠을 뚫고 들려오는 도량석 소리는 왜 이리도 야속한지......
전날 힘들게 일 했던 기운이 아직도 몸 이곳저곳에 피곤의 무게로 남아 있어서,
뻑뻑해진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그이는 조금 더 잘 수 없을까 하는 망상을 피워 본다.
그러나 문 앞을 지나 점점 멀어지는 도량석 소리에 까무륵 다시 잠에 빠져들 즈음,
큰스님의 방망이 자락이 퍼뜩 떠오르자, 곳곳에 남아 있던 피로 정도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지난 저녁,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너무 들이켠 탓일까?
갑자기 느껴진 요의가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데 한몫을 한다.
간밤에 눈이 내렸나 보다. 온 세상이 하얗게 하얗게. 그야말로 은세계로 보인다.
여느 사람보다 낭만적인 부분이 무딘 임행자였지만 오늘같이
흰눈이 쌓인 새벽을 맞는 날은 포근한 기분에 빠져들기에 충분하다.
아련한 슬픔 같기도 하고, 또 크나큰 희열 같기도 한 그 무엇, 그러나 큰 뜻을 품고
출가한 그이기에 이 따위 느낌은 다 부질없는 감상이라 덜쳐버린다.
서너 번 머리를 흔들어 보고는 아무 흔적 없이 소복이 쌓인 눈 속에 한 발을 내디뎌 본다.
"뽀드득, 뽀드득."
그 소리에 맞춰 흥얼흥얼 노랫소리 한 자락이 절로 흘러나온다.
"똑,똑,똑, 구두소리, 빨간 구두 아가씨. 똑,똑,똑......"
갑자기 흠칫 놀라 누구 들은 이 없나 주위를 살펴보고는 '휴!' 하고 한숨을 쉰다.
"계수관음대비주 원력홍심상호신 천비장엄보호지 천안광명변관조......"
염불 한 자락을 읊조리며 해우소(解憂所) 문을 들치며 들어간다.
"해우소라! 근심 걱정을 다 해결해버린다고? 거, 참! 맞는말이야. 맞는 말이고말고."
시원한 신중줄기가 포물선을 그린다.
"원! 새벽예불 드리고 났을 때의 감동보다 더 뿌듯한 희열일세. 밤새 참았다
누는 오줌이 이렇게 시원할 수가......!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예불 시간 늦겠네."
큰스님이 느꼈다던 법열이 어쩌면 이런 시원함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그의 입가에 득의만면한 미소를 풀어놓는다.
휘익- 하니 한 줄기 바람이 그의 몸을 감싼다. 임행자의 몸이 갑자기 기우뚱하니
화장실 벽에 슬며시 기대어 서고 그의 입가엔 만연한 미소가 감돈 채......이게 웬일?
이미 시작된 새벽예불에도 불구하고 살포시 감겨진 그의 눈은 떠질 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세찬 바람에 해우소 문이 털썩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힌다.
그 소리에 퍼뜩 눈을 뜬 그이는 입가에 미소를 거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이 몰고 온 지린내가 그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서야,
그는 자신이 오줌을 누다가 깜빡 화장실에서 잠이 든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법당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놓으려는 순간,
저 멀리 법당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소리에 기절할 듯 멈춰선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또르륵, 똑, 똑, 똑......"
'아니? 저것은 예불 끝나는 소리가 아닌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된일이지?'
단지 눈꺼풀만 잠시 닫았다 떴던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20여 분간을 화장실 벽에 기대어 졸았던 것이다.
문득, 그의 눈앞에는 새벽예불에 불참한 벌로
치켜올려진 큰스님의 방망이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공을 초월한 것처럼 후딱 지나간
그 몇 분이 무엇인가를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또한 오줌 누는 시원함을 법열에 비교했던
자신의 버릇없음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해우소 문을 들치고 나오자, 새벽빛이 넘어오는 듯
저쪽 산등성이가 푸르게 번져오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새벽산, 그리고 이 하얀 눈 속에 서 있는 임행자인 나,
날아가는 제비처럼 사뿐히 법당에서 나오는 스님네들의 소리없는 발걸음,
두런두런 둘러보던 그의 눈빛이 갑자기 반짝 빛나고
몸을 돌려 걸음을 떼어놓는 그의 발길이 뜻밖에도 가볍기만 하다.
큰스님의 방망이 찜질 정도는 오늘쯤은 왠지 달디달게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상쾌함이 임행자의 발길에 번져오는 것만 같았다.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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