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스님 좋은 말씀

귀신이닷!

갓바위 2022. 6. 28. 08:15

"야, 임행자! 빨랑 걸어. 벌써 어두워졌다.

자꾸 꼼지락거리면 캄캄할 때 다비장을 지나면 뭐 어때서 그래요,

원주스님! 눈 감고서도 갈 수 있는 길인데..... 좀 쉬었다 가요."

 

"내가 지금 너랑 입씨름 할 군번이 아니다. 잔말말고 어서 걸음이나 재촉해."

벌써 산 속에서는 밤을 알리는 밤부엉이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내일 노스님의 사십구재를 지낼 제물祭物을 준비하기 위하여

원주스님과 마을에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임행자는 산문을 나서는 일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비록 돌아올 때는 등짐이 한짐이어서 허리를 펴기도 힘들 만큼 무거운 짐을 지고

절에 올라와야 했지만 그이는 저잣거리로 나가는 심부름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우선 장터에는 훈훈한 향기가 있었다.

가끔 짓궂은 원주스님이 "어디 저 씨뻘건 국밥 한 그릇 사주랴?

하면서 은근히 떠볼 때도 있지만 그이는 한번도 넘어가지 않았다.

"어디 수행자가 육고기를 먹는데요? 무식하게스리."

 

이런 대답 뒤에는 어김없는 꿀밤 세례가 뒤따랐지만 그래도

임행자는 읍내에 나가는 심부름에는 군말 없이 따라나서곤 했다.

국밥이 설설 끓는 가마솥의 냄새만으로도 그이는 마치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수행자라는 이유 때문에 기름이 둥둥 뜨는 국밥 한그릇 사 먹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운이 좋으면 노점에서 떡 몇 쪽은 얻어먹을 수가 있어 좋았다.

게다가 장터의 술렁거림이 마치 사람 사는 소리 같아서 그이는 그렇게 흥겨울 수가 없었다.

 

그런 심부름을 마치고 오늘 따라 늦어진 하루일정을 뒤로 하고 원주스님과 절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산 속에서 '부엉! 부엉!'하고 부엉이 우는 소리가 어느새 꽤 가까이 들려왔다.

그이는 그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부엉! 부엉!' 하고 따라했다.

그런 소리가 영 거슬리는지 원주스님이 하얗게 눈을 흘기며 쳐다보았다.

 

"스님! 어두운 데서 스님이 눈을 흘기니까 하얀 눈자위만 보이는 게 꼭 귀신 같아요."

귀신이라는 말에 원주스님은 움찔 놀란 듯 아무 대답도 없이

어두워져만 가는 산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등에 진 짐이 흘러내려 엉덩이께에서 흔들거렸다.

엉덩이를 한 번 들썩거려 다시 등위로 짐을 치켜올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이는 오늘 따라 걸음이 엄청 빨라진 원주스님의 뒤를 헉헉거리며 따라갔다.

 

얼마쯤 그렇게 아무 소리도 없이 원주스님을 따라 걷다 보니

발 밑은 어느새 분간이 안 될 만큼 어둠 속에 놓여 있었다.

산 속의 해는 빨리 저문다는 소리는 정말 맞는 말이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희뿌옇게 모든 사물을 비출 만큼의 해가 남아 있었는데

어느새 캄캄한 어둠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위는 어두워지고 등에 진 짐은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그이는 숨을 몰아쉬며 원주스님의 뒤를 쫓아갔다.

한숨을 돌리며 잠시 걸음을 멈추자, 저 앞쪽 어둠 속에서 희뿌옇게 다비장이 눈에 들어왔다.

둥그렇게 둘러선 나무들 사이로 휑하니 비어 있는 다비장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는

더욱 을씨년스러워보였다. 이쯤이면 이제 한숨을 내쉴 때도 되었다.

 

"스님, 이제 거진 다 와가는데 우리 저 다비장에서 좀 쉬었다 가요. 네?"

임행자는 다비장에 오면 속가마을의 공동묘지가 생각났다.

속인들이 죽으면 땅에 묻고, 스님들은 화장을 했다.

그 속인들이 누워 있는 공동묘지는 늘 임행자 또래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이는 동그랗게 봉분을 돋워 올록볼록하게 만든

무덤을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전쟁놀이를 할 때면 공동묘지는 천혜의 전투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무덤 하나하나에 자기의 기지를 만들고 이 무덤과 저 무덤 사이를 오가며

적들을 총으로 쏘아 쓰러뜨리기 바빴던 속가에서의 놀이가 생생하게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피곤에 지치면 저마다 무덤을 베개삼아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잠 속으로 빠져들어 뉘엿뉘엿 해거름이 되어서야 겨우 깨어나 집으로 달려가기도 했던 곳이었다.

 

그런 장소이니만큼 그에게 있어 다비장이나 공동묘지는 정겹기 그지없는 장소로 늘 존재하였다.

삶과는 다르게 죽은 이가 묻혀 있다는 을씨년스런 느낌으로가 아닌

언제나 밝고 환한 즐거음이, 추억이 있는 그런 곳으로 존재하였다.

 

"스님, 좀 쉬었다 가자니까요?'

"하필이면 재수없이 다비장에 앉아서 쉬냐? 그것도 이렇게 한밤중에......"

"왜, 다비장이 어때서 그래요? 하긴 묘지가 쉬었다 가긴 훨씬 낫긴 하지만......

묘지에 입힌 떼 위에 앉으면 푹신푹신하거든요.

그러지말고 여기서라도 조금만 앉았다 가요, 네?"

 

"허허, 이놈이! 바쁘단 말이야. 다들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서 가야지.

그렇게 쉬고 싶으면 너 혼자 쉬고 와라. 나는 먼저 갈테니까......

무덤에 걸터앉아 너나 실컷 쉬었다 오렴."

 

그이보다 두 배는 커다란 등짐을 지고도 원주스님은 웬일인지

오늘은 한번도 쉴 짬도 내지 않고 괜한 부지런을 떨고 있었다.

다비장 가장자리 바위위에 엉덩이를 내리며 걸터앉는

임행자를 보고도 원주스님은 멈출 생각도 안 하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이마에 삐직삐직 식은땀이 번지고 있는 것을 보면 스님도 결코 쉬고 싶지

않은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웬일인지 원주스님은 더욱 발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위에 앉아 보고 있자니, 어둠을 휘적휘적 헤치며 걸어가는 원주스님의 도포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어둠 속을 저만치 걸어가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르자스님의 도포자락이

마치 나무에 목을 매단 여자의 치맛자락처럼 바람에 펄럭이는 것만 같았다.

그이는 슬며시 장난기가 발동했다. 등짐을 다시 단디 메고 큰 소리로 외치며 내달렸다.

 

"귀신이닷!"  "으악"

생각지도 않게 원주스님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내달려 갔다.

임행자는 항상 잘난 척하던 원주스님이 놀라는 것을 보니 기가 막혔다.

 

저 얄미운 원주스님이 무서워했던 것이 바로 귀신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굳이 다비장에서 안 쉬고 가는 원주스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난기가 발동하여 웃음이 슬며시 돋아났다.

 

"으악! 원주스님, 나 좀 데리고 가요. 귀신이 막 잡아당겨요. 으악, 사람 살려!"

"빨리 뛰어. 임행자, 빨리 뛰어. 나 먼저 가서 큰스님 모셔올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소리만 크게 지르고 원주스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빨리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뛰는 사람은 정말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이는 너무나 웃겨서 더 이상 발을 떼어놓을 수가 없엇다.

"으악, 원주스니임!"

 

얼마만큼이나 앞으로 내달려 갔는지 그의 비명에 답하는 원주스님의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는 해도 무슨 소리인지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임행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찔끔찔끔 배어 나왔다.

너무 웃겨서 웃음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늘 잘난 척 하며 자신을 놀리던 원주스님을 자신이 이렇게 놀려먹은 것을 생각하니,

허리도 제대로 펴지지 않을 만큼 고소하였다. 그의 폭소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퍼져나갔다.

"하하하하......! 저 겁쟁이 원주스님이 나의 이 통쾌한 웃음소리도 아마 비명소리로 듣고 있겠지."

 

주저앉아 한참을 웃던 그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의 별들도 오늘 자신의 쾌거를 아는지 더욱 반짝이며 빛을 내고 있었다.

절로 향하는 그의 벌걸음이 오늘처럼 가벼웠던 적은 한번도 없어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주스님은 어디만큼 달려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저쪽 깜빡이는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절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그이는 원주스님의 경고망동을 대중스님들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될지 몰라 웃음부터 나왔다.

그때 길 옆 바위 위에 시커먼 그림자가 하나 움직이며 비적비적 일어났다.

 

"원주스님? 원주스님 맞죠?"

"그래 나다. 네가 잘 오나 보려고 앉아 있었다."

"하하하하, 요령소리 나게 달려가더니 이제 절에 다 왔는데,

안 들어가고 왜 거기 앉아 계세요?

무덤은 무섭고, 이제 절이 보이니 안 무서운가 보요? 하하하......."

 

"누가 무서워했다고 그러냐, 임마."

원주스님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원주스님, 노스님 열반하셨을 때 생과 사는 둘이 아니라고 제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가르침을 주시더니, 그러는 원주스님은 귀신이 무에 무섭다고 그렇게 도망을 가셨어요?"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그이는 짐짓 무게를 잡고 물어보았다.

"무서워하긴, 누가 뭘 무서워해?"

"그래요? 그럼, 무서워했는지 안 무서워했는지,

어디 대중스님들 한테 가서 한 번 물어볼까요?"

 

"너, 너, 이놈 다른 누군가에게 이야기했다가는 너, 죽을 줄 알아?"

"그거야 앞으로 원주스님 하시는 것 봐서요.

참네, 천하의 원주스님이 귀신 때문에 도망을 가다니......

스님, 이 세상은 다 마음먹기에 달린 거예요.

 

무릇 귀신이라는 것은 중음신으로 색신色身만 여의었을 뿐,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 왜 겁을 먹어요? 귀신이 나타나면 도량 넓은

원주스님께서 저한테 하듯 꿀밤세례를 하든가 법문 한 자락 하시면 그만일 텐데, 쯧쯧......"

 

"야, 너, 임행자! 이게 정말......"

그의 머리 위로 들어 올려진 원주스님의주먹이

무슨 생각에선지 내려치지지 않고 잠시 멈추어 있었다.

"왜요? 때려 보세요. 때려 보시라니깐......"

 

원주스님의 치켜든 주먹을 쳐다보자,

그 위로 별들이 한꺼번에 쏟아질 듯 빛을 내며 낄낄 웃는 것 같았다.

무색해하는 원주스님을 다시 한번 놀리듯 통쾌하게 터지는 그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의 별무리를 흔들며 멀리멀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임행자에게는 더 이상 원주 스님한테

쥐어박히지 않고 살 수 있는 새날이 도래한 것이었다.

영담스님의 동승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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