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불교 교리 강좌

있음과 없음, 모두를 보라

갓바위 2024. 5. 2. 19:34

 

 

있음과 없음, 모두를 보라

발심하여 출가하는 일은 큰일 중에 큰일이다.

삶에 대한 온갖 욕망을 끊고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마저

야멸차게 끊고 세상을 떠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출가란 모름지기 어제를 떠나 오늘을 사는 것이고, 전생을 떠나

이생을 사는 것이라는 고매한 가치가 있지만,

그런다 해도 모든 욕망을 내려놓기란 참으로 어렵다.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청년이

출가하러 왔다. 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한국에서 군생활, 직장생활을

하며서 녹록치 않은 삶을 산 그는 《나의 행자생활》이라는 책을 읽고

행자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했다.

 

1주일 동안 하루 천 배씩 절을 하라고 했다.

절은 긴장한 몸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조화롭게 회복시켜주는 좋은 수행법이다.

또 그동안 삶의 길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

습관들을 온전히 비우기에 가장 적절한 수행법이기다 하다.

 

절을 하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수많은 일들과 사람들과 말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몸이 느끼는 고통,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한 번에 휘휘 저어

비워낸다. 욕심이 비워지고 화가 비워지고 고집스러움이 비워지는 순간,

몸은 청정해지고 고요함으로 채워지고 지혜로운 눈이 생긴다.

 

절을 통해 몸을 낮추고, 비우고, 가벼워지는 체험은 매우 중요하다.

수행의 길에 첫 번째로 필요한 덕목인 '비워있음;을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절 아랫마을에서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을 하며, '꿈을 담는

도서관'이라는 글귀를 신영복 선생으로부터 받아 현판을 단 일이 있다.

 

전교생 다섯명인 폐교 직전의 분교가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학생 수 75명의 본교로 승격했다.

어느 날 신영복 선생이 변방까지 찾아와 나에게 맞는 글귀 같다며

'당무유용當無有用'이라는 글씨를 불쑥 내밀었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들지만 그릇은 그 속이 '비어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 쓰임새가 생깁니다.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입니다. 찻잔 한 개를 고르는 우리의 마음을 반성하게 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모양이나 무늬 등 그것의 유有에 한정되어 있을 뿐

그 비어있음에 생각이 미치는 경우는 드뭅니다."

비어있음으로 쓰임새가 있다는 말은 육조 혜능 대사의 '정定과 혜慧가

둘이 아니다.'라는 말과 유사하다. 고요함 속에서 지혜가 나온다.

 

번뇌와 망상이 가득하면 고요할 틈이 없고, 지혜가 생겨날 틈이 없다. 우리가

선 수행을 하면서 깊은 선정에 들었을 때의 효과를 적적성성으로 표현한다.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지금 붙잡고 있는 집착들이 고요해지는 상태,

곧 번뇌가 멈추는 수행과 나를 비우는 무아적 통찰이 이루어져야 윤회의 원인이

끊어진다. 텅 빈 충만이라고 해도 좋다. 번뇌와 망상과 나에 대한 집착이

텅 비고. 지혜와 자비심이 충만해지는 깨달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 수행은 도덕적 엄정함을 발달시키고, 진리에 대한

이햬를 높이고, 다른 사람들을 잘 돕는 방법을 터득하게 한다.

한 달에 한 번 교도소 법회를 다녀온다.

 

수인들의 눈빛에 가득 담겨 있는 답답함이 안타까울 때가 여러번이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가득한 그들의 눈빛에는 한순간도 고요할 틈이 없다.

 

잠시라도 고요한 마음 상태를 느끼고 선정의 마음을 갖도록 지도해 보지만

늘 제자리다. 고요할 수 없는 환경의 에너지가 지배하고 방해하기 때문이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비우고 쉴 수 있는 절호의 기호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참선 수행은 교도소 수인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효과도 높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과 함께 정定을 체험하는

참선 프로그램을 진행해보리라. 마음먹는다.

물흐르고 꽃은피네